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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704]완전한 진리②_부흥운동 복음주의 산업혁명 그리고 쉐퍼의 라브리

by bandiburi 2023. 3. 18.

<완전한 진리> 3부와 4부로 구성되는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역사적인 사실과 구체적인 사례들이 소개되며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부흥운동에 대한 내용이 유익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가져온 변화는 물질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인류의 생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족중심의 자급자족 생활에서 일과 가정이 분리되며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몰려왔다. 

특히 과부에 대한 사례는 쉽게 와닿았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한 가족이 함께 사업을 꾸려가며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유사하고 자녀에게 가르쳐주는 가업의 의미였다. 그래서 남편이 사망해도 아내가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하는 남편이 사망하면 경제적 능력이 없는 아내는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그처럼 교양이 없고 무지막지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신앙을 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사기와 속임수가 판치는 마을에 당신이라면 어떻게 신앙을 소개하겠는가? 해답은 바로 부흥운동 당시 감리교인과 침례교인들이 했던 활동이었다.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임하는 뜨거운 감정적 체험을 하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그리고 술을 끊고, 총질도 멈추고, 똑바로 살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강렬한 감정이 수반된 회심의 체험이 제1차 제2차 대각성운동의 전도집회가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488)

대중적 복음주의자들은, 사회구조란 "자연 상태"에 사는 자율적 개개인의 합의로 만들어진 순전한 선택의 산물이라고 본 초기의 사회계약 이론가들 - 홉스, 로크, 루소 - 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있었다. 독립 이후 사회계약론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대단히 타당하다고 인정되었는데, 그 이론은 미국인이 실제 체험하고 있는 것을 잘 묘사해 주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515)

미국의 독립이 세상을 다시 시작한 것처럼, 복음주의자들에게도 교회를 다시 시작하려는 들뜬 의식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오직 신약성경에 바탕을 두고 하나하나 다시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다. (519)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다수의 사회는 인구의 90%가 노동한 대가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로 살았다. 이로 인해 개인의 자유보다는 전체의 생존에 초점을 두는 유기적 사회관이 생겨난 것이다. (...) 생명의 불확실함이 경제 관계에 대한 권위주의적 통제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생 및 산업혁명과 더불어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결핍과 굶주림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 인간 본성에 관한 과거의 칼뱅주의적 비관론과는 반대로, 보통 사람들도 자기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어디서든 부를 창출해 낼 수 있었다. (...) 즉 보통 사람들도 자유로이 자율적으로 행할 수 있다면 무척 유능하고 실력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524~525)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기독교 세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정해진 교회를 다니며 사역자의 설교를 들어야만 했지만 이제는 뜨거운 감정적 체험을 조장하는 설교자를 추종하게 되었다. 이런 사역자를 양성하는 쪽으로 신학교도 변화되었다. 지식보다 요령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이 나라에서도 유명한 목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설교를 반복해서 들으며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유명 목사들이 있는 교회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개인적인 상황에 맞는 감정적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기독교를 돌아본다. 부흥사 같은 정치적 종교인이 떠오른다. 전광훈이라는 인물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의 행동은 종교와 무관한 개인적인 사심의 영역의 추구로 보인다. 하지만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 기초한 냉철한 지성이 사라지고 감정만 남아 있는 기독교의 껍데기라고 생각된다.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영적 각성운동이 필요하다. 

부흥운동은 신학교도 변화시켰다. "사역자를 지적이며 가르치는 지도자로 보던 청교도적 이상은 서서히 약화되고, 대중적 운동가요 설득자로 보는 복음주의적 목회자상이 자리잡았다"고 홉스타터는 쓰고 있다. 신학교육은 실제적인 기술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지적인 훈련을 점차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529)

복음주의는 유명인사 중심의 리더십 모델을 여전히 양산하는 것 같다. 기업가 타입의 실용적인 인물, 일부러 청중의 감정을 조종하는 인물, 자화자찬 격의 일화를 늘어놓으면서 자기 이미지를 은근히 높이는 인물, 오만하고 군림하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 성과에 입각해서 성공을 측정하는 인물, 숫자를 늘리기 위해 최첨단의 세속적 기법을 얼마든지 사용하는 인물 등이 거기에 속한다. (539)

19세기의 사상가 대부분은 자명한 진리에 하나님의 존재, 그분의 선함, 그분의 세계 창조 등과 같은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을 상당수 포함시켰다. 이러한 것들이 이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548)

따라서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서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역사의 한순간에 제한된 자신의 좁은 안목으로 볼 수 있는 것밖에 볼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C.S 루이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날의 책뿐 아니라 "옛날 책"도 읽으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옛날 책들이 제공하는 다른 관점에 접근할 수 없다면 우리 시대의 편견에 빠지지 않기란 무척 어렵다고 썼다. (556)

고통과 쾌락에 대한 내적 인식,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의식, 물리적 세계에 대한 본능적 믿음 같은 것들은 철학적 정당화가 필요 없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작동하도록 우리의 본성과 체질에 강제로 부과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573~574)

인간에게 자연 질서를 발견할 능력을 부여한 분도 하나님이었다. 우리에게 과거에 기초하여 미래를 예측하려는 본능적 성향이 있는 것도 인간 "설계 계획"의 일부다. (582)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장하는 바는, 오직 성경에 기초한 세계관만이 우리에게 어떻게 과학적, 도덕적, 수학적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지를 일관되고 온전하게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주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다. (586)

우리 자신은 이 점을 믿고 있는가? 도덕적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 같은 개념이 기독교 밖에서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우리는 사람들이 "속임수"를 멈추고 자신의 신념체계가 파산 상태에 있음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590)

역사적으로 말하면, 산업혁명은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마침내 가정과 신앙이라는 사적 영역과 사업과 산업이라는 공적 영역이 분리되었다. (600)

식민지시대의 과부들은 종종 남편이 죽은 후 그 사업을 이어받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과부들은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부양할 작업기술이 없는 불쌍한 구제 대상으로 여겨졌다." (609)

 


프란시스 쉐퍼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종종 들어본 이름이다.  쉐퍼는 1955년에 스위스에서 라브리를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저자 낸시 피어시는 쉐퍼의 라브리에서 그에게 큰 감동을 받는다. 이 책에서 계속해서 인용되는 인물 프란시스 쉐퍼에 대해서도 조금 더 깊이 있게 알아보고 싶다. 

쉐퍼는 스위스 알프스에 숨어 대중의 눈에 전혀 띄지 않는 작은 사역을 시작했다. 우리의 타고난 야망에 대해 "죽을 것"에 대해 썼을 때, 그는 단순히 신학적 교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한 것이 아니었다. 어렵게 얻은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통찰이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날리고 후원자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마케팅 기법을 쓰지도 않았다. (...) 그 대신 그는 소박한 기도 후원자 명단으로 시작했고, 그의 아내 이디스가 개인적인 편지들을 타이프로 쳐서 발송했을 뿐이다. (694~695)

영토에 있어 민족과 국가, 종교가 일치하지 않을 때 갈등이 발생한다. 유럽은 동일한 영토가 전쟁을 통해 다양한 국가로 국경이 만들어졌다. 지배자는 자신의 종교를 국가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종교란 삶과 함께 가는 것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종교전쟁이 발생한다. 과거의 일이 아니다. 현재도 종교로 인해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같은 종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갈등이 있고 박해가 있다.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종교에서 추구하는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중세교회의 분열은 기독교 세계의 종교적 통일을 이미 깨뜨린 상태였으나, 양 진영은 계속해서 영토에 따른 교회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즉 특정한 나라 혹은 지역에 살고 있는 자는 누구나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친 1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 전체가 종교전쟁에 휩싸여 버렸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 자기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도망치는 종교적 난민이 되었다. (702)

사회적 의무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권리 일부를 계약에 의해 양도하기로 결정할 때에 발생하는 순전히 개인적 선택의 산물일 뿐이다. 이는 시민사회의 기초가 보다 고상한 선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한 생물학적 충동에 있다고 보는, 다윈보다 앞선 자연주의의 한 형태인 것이다. (704)


독서습관704_완전한 진리_낸시 피어시_2006_복있는사람(230316)


■ 저자: 낸시 피어시 Nancy Randolph Pearc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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