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블랜더 거실
독서습관

[705]아버지의 해방일지_저자의 가족사로 보는 우리 현대사

by bandiburi 2023. 3. 4.

도서관에서 예약하고 몇 주를 기다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대출했다. 며칠 전 다산동 종로서적에 갔을 때, 베스트셀러 목록 중 10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만큼 요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소설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잔잔한 감동과 나 자신과 사회에 대해 성찰을 던지는 매력적인 소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7)

소설의 시작을 '아버지가 죽었다'라고 한 이유가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했다. 마지막에 아버지의 유골을 뿌리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즉,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82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장례를 치른 후에 화장하고 유골을 뿌리는 짧은 시간 속에 일어난 일들을 담고 있다. 

소설은 화자인 아버지의 딸, 고아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아버지 고상욱은 빨치산으로 활동하며 영원한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빨치산으로 만난 어머니와 결혼했지만 갖은 고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한약의 도움으로 딸 하나를 두었다. 고아리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44)

혈육의 관대함으로 해석하여 아름다운 모정 때문이라 쳐본들, 이데올로기란 것이 돈이나 모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구나, 천이백만원 보증을 서고 온 나는 보따리 장사 주제에 돈 갚을 걱정은 뒷전이요, 그런 냉정한 분석을 하며 식전 댓바람, 늙은 혁명가 어머니의 악다구니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60)

"자네 혼자 잘 묵고 잘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 (61)

소설은 시간적으로 짧은 장례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이지만 아버지의 삶 속에 들어왔던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과거 인연을 소개하기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한 권의 소설 속에 많은 등장인물을 압축해서 소개하다 보니 모두 읽고 난 뒤에는 기억이 흐릿해진다. 

아버지는 영원한 사회주의자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민중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빨치산을 했다. 현실에 적응하려는 어머니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을 기억하라고.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빨갱이 새끼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76)

남과 북이 분단되어 70년이 흘렀다. 북한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 사회는 무척이나 잔인했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을 억압했다. 심지어 있지도 않은 사건들을 날조해서 정치적인 입지를 유리하게 하기도 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사상범들에 대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 자신의 삶을 투영한 소설 속에서 가족이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삶이 드러난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102)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110)

불타는 마을, 쨍한 가을 하늘을 온통 틀어막은 잿빛 연기, 그 연기 속에 오줌을 지리며 까무러친 아홉 살의 작은 아버지, 총을 셋방이나 맞고 눈도 감지 못한 채 조상 대대로 시를 읊던 정자 앞에 주검으로 누워 있던 할아버지. 큰 언니의 이야기가 어찌나 생생했는지 나도 잠시 1948년의 가을 반내골에 서 있는 것 같았다. (130)

어두운 일제의 강제합병의 시대를 지나 드디어 해방되어 우리 민족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하지만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를 점령하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서로 다른 이념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1948년 반내골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사건도 이념이 다른 군대가 교차한 곳에 남아 있던 민중들의 억울한 죽음을 보여준다.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헌다고. 애들은 천날만날 놀리기만 했는디......" (140)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이 있다. 베트남에서 시집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엄마를 둔 아이에게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가 베트남이라며 격려한다. 놀림을 받던 아이가 자존감을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지한테 득이 안 된다 싶으먼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 민중이여. 민중이 등을 돌린 헥맹은 폴쎄 틀레묵은 것이제." (175)

내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삶이 부러워 미웁기도 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짐작은 할 것 같았다. (196)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198)

대한민국에서 아버지의 삶은 고통이었다. 사상이 다른 빨치산이라고 낙인 찍혀 고문당하고 투옥되어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출소해서 평범하게 사는 듯 하지만 늘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가난했지만 평등한 사회, 민중을 위한 삶을 지향했다. 그런 아버지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한 등에 두 짐 못 지는 법인디... 섬진강이 보이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에 올라타며 작은아버지는 분명 그렇게 혼잣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그날 작은아버지는 나를 뒤따라오며 내 등에 얹힌 두 짐을 보았던 것이다. 자기 등에도 평생 얹혀 있었을 두 짐을. 그 짐이 버거워 작은아버지는 떠나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술에 취해 한평생을 흘려보낸 것일까? (210)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아버지는 진짜 냉정한 합리주의자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17)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이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31)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냉철한 합리주의자요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하지만 화자와 친밀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화자에게는 아버지의 부활을 의미했다. 기억 속에서 다정다감한 아버지로 부활했다. 

자신의 빨치산 행적으로 인해 가족들이 불이익을 받아야 했기에 아버지는 괴로움을 마음속에 담고 살았을 것이다. 죽음을 통해 이런 괴로움으로부터 아버지는 해방되었다. 

"시상 더러븐 것을 깨끔허니 치우는 것이 황톳물이여. 황톳물이 휩쓸고 지나가야 새 질이 열린당게." 섬진강은 그때에 비하면 실개천처럼 마른 상태였다. 댐이 생긴 뒤로 물이 현저히 줄었다. (259)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267)

사람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 들을 걸 그랬다. (268)

대한민국의 미래가 저출산과 저성장으로 어려워 보이는 시기다. 국가의 방향을 설정하고 나라의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힘 있게 그 방향으로 나가도록 국민을 하나 되게 해야 하는 역할이 정치다. 정치인들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하지만 2023년 3월 현재 우리 정치의 모습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 개개인의 이익을 챙기는 후진적인 모습이다. 아버지가 황톳물로 세상을 깨끗하게 치워버려야 새 세상이 열린다고 한 것처럼, 우리 사회의 곪은 부분들이 싹 씻겨나가고 새살이 돋아나면 좋겠다. 

아버지는 공감의 달인이다. '사람이 오죽하면 글겄냐'라며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할 때 세상은 아름답게 보인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경쟁의 장이다. 아버지와 같은 공감의 삶을 살라고 저자는 제안하고 있다. 


독서습관705_아버지의 해방일지_정지아_2022_창비(230304)


■ 저자: 정지아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다.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올해의 소설상, 노근리  평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