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에 복학한 큰아들이 수업을 위해 <완벽한 진리> 책이 필요하다고 가족톡으로 연락이 왔다. 참고도서로 추천한 것인지 읽어야 한다기에 도서관에서 수소문을 해서 구했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어떤 책인지 궁금했다. 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책을 읽게 되었다.
기독교 관련 일반서적 수준으로 기대하고 접근했는데 오판이었다. 총 4부로 나눠져 있는데 세계관에 대한 1부에서부터 쉽게 읽히지 않았다. 데카르트와 칸트까지 소환하며 종교가 자리 잡고 있는 현재의 위치를 진단한다. 그리고 2부에서는 다윈을 소환한다. 철학과 진화론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은 독자로써 모든 페이지를 소화하기는 어려웠다.
대학교에서 이 책 <완전한 진리>를 교재나 부교재로 선정한 것은 아마도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세 가지 부분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공적인 영역에서 후퇴해서 개인의 종교로 축소된 기독교
둘째, 다윈의 진화론이 차지하고 있는 과학의 영역 혹은 사실의 영역에 대해 가치의 영역에 한정된 종교의 현실,
셋째, 하나님이 주신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지성으로 무장하고 다윈주의, 자연주의 세계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반성
방대한 분량으로 두 번에 나눠서 포스팅한다.
그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시대의 정신에 맞서려면 그만큼 포괄적인 성경적 세계관 - 독특한 기독교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인생관 - 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51)
창세기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 곧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모든 사람에게 주신 본분을 일러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97)
저자 낸시 피어시는 무신론자에서 프란시스 쉐퍼를 통해 회심했다.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이 본래 맡겨준 사명인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되새기고 종교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점이다. 개인의 종교가 아니라 세속적인 부분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도록 문화 전반을 변화시켜 나가는 공적인 종교가 되도록 지성을 갖추자고 한다.
교회가 제자도를 진지하게 여긴다면, 신자들이 일요일에 교회문을 나선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야 마땅하다. (131)
왜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자신의 신앙적 관점을 공적 영역에 적합한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134)
진정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인은 일상적인 일과 가정생활을 버리고 기도와 묵상의 삶을 살고자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일상적인 삶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성경이 아니라 헬라철학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151)
이 같은 자연/은총의 이원론은 실질적으로 중세의 이층적 영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평신도는 단지 자연적인 지상의 목표 - 이는 확실히 열등한 것이다 - 만 달성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 데 비해, 오직 종교적 엘리트만이 주로 종교의식과 의례의 집행으로 규정된 영적 완전에 도달할 역량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159)
일상적인 일과 가정생활을 공적인 영역으로 보고, 종교는 개인의 기도와 묵상으로 은총을 받는 영역으로 구분한다. 자연과 은총의 이원론이라고 비판한다. 현대 사회의 영적인 전쟁터에서 기독교인이 지적인 면에서 무장하고 준비해야 한다. 다양한 이론들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고 지적인 전투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인의 영역에 축소된 신앙을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전 삶으로 확대하자는 생각이다.
강의실에서 직면할 지적인 도전에 대응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집을 떠나기 전에 장차 접할 모든 "주의들" -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다윈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 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 한다. 젊은 신자의 경우 이런 사상들에 대해 먼저 부모나 목회자나 청소년 지도자 등에게서 배우는 것이 최선인데, 그들이야말로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이데올로기들을 분석하는 전략을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42)
지적인 작업을 외면한 채 개인적인 관계와 정서 중심의 치유 영역으로 물러서는 종교는 현대의 영적 전쟁터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245)
다윈의 진화론은 "이런 지식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종교와 도덕을 "비인지적(noncognitive) 주제들"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윈주의는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의 분할을 완전히 마무리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 두 층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서, 만나거나 합쳐지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292)
다윈의 점진주의는 그 신빙성을 잃어버렸으며, 그것을 대체하거나 널리 수용될 만한 대안적 메커니즘은 아직 없다. (314)
저자는 자연주의, 다윈주의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아래의 갈색으로 표기한 부분은 독자로서 별다른 설명 없이 저자의 생각을 기록한 것 같아 어색하게 다가온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확대되었다. 규칙들을 발견한다. 그 규칙들을 보며 '창조주의 손'과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하는 부분은 너무 나갔다. 규칙을 발견한 것은 과학의 업적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과학적 사실들이 밝혀질 것이다.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은 규칙들이 여전히 우주에는 상존할 것이다.
또한 '객관적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논리도 비약이다. 믿는 사람들의 확신일 뿐이다. 그것이 객관적 진리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저자는 자신이 믿는 바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공감하며 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로서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이고 마음에 걸리는 표현이었다.
우주가 고도로 질서 정연하여 어떤 사고력이 있는 지성 또는 창조주의 손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339)
현대의 유전학은 생명을 신적 말씀이 들려주는 거대한 이야기라고 우리게에 일러 주는 것 같다. 즉 생명의 텍스트를 쓴 한 저자(Author)가 있다고 말이다. (379)
객관적 진리는 세계 자체가 하나의 책 곧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에 의해 창조된 책일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주 내에 하나의 객관적 메시지와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460)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851
독서습관704_완전한 진리_낸시 피어시_2006_복 있는 사람(230305)
■ 저자: 낸시 피어시 Nancy Randolph Pearcey
'독서습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706]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_귀농 귀촌은 낭만이 아닌 현실 (0) | 2023.03.04 |
---|---|
[705]아버지의 해방일지_저자의 가족사로 보는 우리 현대사 (0) | 2023.03.04 |
[703]자본과 이데올로기 1부_역사에서의 불평등주의 체제들 (0) | 2023.03.03 |
[702]천식과 COPD②_천식과 폐질환에 대한 관리 방법 (0) | 2023.03.02 |
[702]천식과 COPD①_천식과 폐질환에 대한 아산병원 의사와 간호사의 전문상담 (0) | 2023.0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