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를 가진 김초엽과 휠체어를 타는 김원영이 함께 지은 책 <사이보그가 되다>를 보며 장애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시야를 갖게 되었다.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제목만으로는 SF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막상 ‘사이보그’라는 말 자체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생활에 불편함을 줄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철을 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김초엽과 김원영, 두 저자의 글이 이해가 쉽고 많은 도서를 인용해서 읽을거리도 풍성하게 제공해 주었다. 또한 장애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상당히 해소시켜주었다. 책을 덮으며 기억나는 두 가지를 정리해 본다.
첫째, 정상성의 규범이란 용어다. 우리는 장애인들이 비장애인처럼 돼야 한다는 ‘정상성의 규범’을당연하게 생각한다. 비장애인이 기준이 되고 장애인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의학과 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현재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이해는 뒤에 놓인다. 장애인들이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생활환경이 우선적으로 제공돼야 한다. 그 다음이 정상성의 규범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장애인의 결정이 남는다.
둘째, 이음매란 용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비장애인에 맞춰진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보철을 해야 하고 도구를 이용해야 한다. 보철을 착용하고 벗는 과정, 자동차 등 도구를 이용하기 위한 과정에서 단계 간에 이음매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돼야 하지만 현실은 이음매가 있다. 다리가 절단된 장애인이 인공다리를 착용할 때 몸과 보철의 이음매에는 내 몸이 아니기에 고통이 있고 느낌이 다르다. 이음매를 없애는 쪽으로 기술은 발전하고 있다.
평소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두 가지 용어가 강하게 마음에 남는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생각할 점을 제시하는 좋은 책이다. 아래는 남기고 싶거나 새롭게 알게 된 문장을 인용했다.
나는 웨어러블 로봇 경기인 사이배슬론에 대해 검색하다가 우연히 국내의 한 척수장애인 카페에 들어간 적이 있다. 사이배슬론을 소개하는 기사가 카페에 공유되어 있었는데 카페 회원들의 댓글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좋아 보이지만 그림의 떡이다.” “이런 거 보면 너무 비싸서 열받고 스트레스 받는다.” 훌륭한 기술이 있더라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일부뿐이라면, 그 기술은 결코 보편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77~78)
자폐는 스펙트럼이고 개인에 따라 그 기능과 상태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치료 방법의 발전이 당사자들의 선택지를 늘리는 방향이라면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의 무게추가 어디로 기울어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장애를 가진 채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주장과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나올 치료법에 희망을 걸자는 주장 중에서 지나치게 후자에만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을 기술과 의학으로 교정하려는 정상성 규범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어 장애인의 현실을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발 붙일 곳이 없다. (84)
장애권리운동은 근대 이후 휴머니즘이 이상적으로 제시하는 바로 그 인간의 범주에 장애인도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야 한다는 전제에 기반한 것이다. 동시에 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언제나 근대 휴머니즘의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문제 삼는 운동이기도 했다. (105)
수전 웬델 Susan Wendell은 <거부당한 몸>에서 근육통성 뇌척수염으로 만성 질환을 갖게 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그는 외견상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일상적인 활동을 대체로 잘해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웬델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황, 한계와 고통을 거듭 설명해야 했다. <난치의 상상력>을 쓴 안희제 역시 크론병으로 인한 만성 통증과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계속해서 양해를 구해야 하는 고충을 이야기한다. (121~123)
보청기의 사례를 통해 확인한 것처럼 보조기술의 선택에는 그것이 장애를 얼마나 가시화하는지, 혹은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이 사회적 정상성에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사이보그들의 비가시화 요구는 장애를 드러내는 순간 차별과 혐오의 낙인을 찍는 사회적 억압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128)
슈는 <업-스탠딩 규범, 기술과 장애>라는 글에서 하지 마비 장애인들을 위한 기술적 해결책의 대부분이 장애인들에게 정상성 규범에 적응할 것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제시된다고 말한다. 만약 사회가 ‘앉아 있는 것’을 기본으로 설정하고 설계된다면, 사람들은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관계를 맺을 것이다. 공간, 건축물, 그리고 사회적 가정은 한 사람의 삶을 제한하는 방식이 된다. (132)
로라 허시는 장애인의 삶에 개입하여 그 삶을 유지해주는 기술, 그리고 장애를 교정과 제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가치관 위에 놓인 기술 양쪽 모두를 우리 앞에 제시했다. (143)
보철로 대체 가능한 신체 부위도 크게 늘었다. 이미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인공 보철을 사용하고 있다. 치아 임플란트나 깨진 치아에 덧씌우는 크라운, 인공 관절, 심장 혈관 확장을 위한 심장 스텐트stent, 성형에 이용되는 보형물 등이 모두 인공 보철이다. 휠체어나 시각장애인의 흰 지팡이, 보청기와 같이 몸의 손실된 부위를 물리적으로 대체하지 않아도 그 기능을 대신하고, 오랜 시간 사용자의 몸에 깊숙이 접속하는 기기도 인공 보철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 인간 삶의 편의를 증대하는 각종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신체와 정신에 더 넓고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인공 보철의 개념 역시 점점 확장되고 있다. (151~152)
그러나 18세기 들어 유럽인은 그들 내부에서 페티시즘을 발견한다. 마르크스는 페티시즘을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과 소비와 관련해서, 프로이트는 성적인 맥락에서 각각 포착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생산하는 인간들의 복잡한 관계와 그 과정의 실제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상품 그 자체만 욕망의 대상으로 물신화된다. 억압된 성적 충동은 본래의 목적과 맥락을 잃은 채 그 성을 대리하는 대체물에 대한 집착으로 되돌아온다. 상품 그 자체, 성적 욕망을 대체한 신체의 특정 부위와 사물들은 본래의 기원과 맥락을 상실하고, 그것 자체가 욕망의 대상이 된다. (166)
바로 이 점이 앞서 살펴본 에이미 멀린스의 이미지가 논란의 대상이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치타 의족에 미적으로 매끈하게 통합된 멀린스의 사진은 몸의 형태와 움직임, 현실적인 삶에 존재하는 장애인의 다종 다양한 신체를 거의 소거하는 듯 보인다. (168)
그런 까닭에 장애인의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장애학과 장애를 치료하고 교정하려는 관점이 우세했던 과학 기술 의학이 서로 불균질하고 잘 어우러지지 않는, 어딘가 모순된 관게처럼 보여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과학, 기술, 의학과 장애의 관계를 억압적 혹은 대립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182)
메리의 집에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그가 자신의 집을 스스로 생활하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구성해두었기에 시각장애가 집 바깥에서만큼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메리의 집은 메리의 집은 메리의 시각 손상을 장애화하지 않는 것이다. (193)
그럼에도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 비장애인 혹은 노약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편적 설계의 가치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 스펙트럼의 양쪽 극단을 모두 고려한 접근성 설계는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보편적 설계를 지향하되 장애 정의와 접근성 실현을 설계의 중심에서 제외하지 않고, 장애인이 지식 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05)
많은 장애인들이 기술과 연관되어 있고, 그중 일부는 장애인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모든 장애인이 기술의 중심이 될 수는 없으며 모두가 사이보그가 될 수도 없다. 결국 기술과 장애의 관계를 살피는 일은 기술 자체에 대한 접근성을 살피는 일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223)
내가 보기에 장애를 고치지 않겠다고 외치는 인권운동가들은 ‘치료’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증강’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장애인의 손상 입은 몸을 그 자체로 인간이라는 종의 ‘비정상적 일탈 상태’로 보지 않는다. 앞서 장애의 개념을 다루며 언급한 것처럼, 장애는 단지 기능의 결여가 아니라 그 몸(자신)이 표준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정상이라는 부당한 낙인을 받은 사회적 신분(지위)에 가깝다. (231~232)
흔히 생각하는 ‘사이보그적 존재’의 이상적 상태는 기계와 인간 신체가 이음새 없이 하나가 된 심리스-스타일의 궁극적인 구현이다. (238)
하대청은 인공지능의 ‘자율성’ 밑바닥에 놓인 인간 노동자의 구체적인 돌봄 노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율성은 ‘심리스-테크놀로지’의 핵심이다. (243)
인간과 다른 지각 세계를 가진 동물들을 이야기할 때 움벨트 umwelt라는 말을 쓴다.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물체가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세계, 그 개체가 살아온 또한 지각하는 환경을 일컫는 말이다. (255)
기술을 장애의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하는 테크노에이블리즘처럼, SF 속의 ‘손쉬운’ 장애 해결책은 “이런 미래가 되어서야 네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미래는 까마득한 데다가 여전히 장애는 해결해야 할 문제로 규정된다. 게다가 이런 이야기는 주로 장애인 캐릭터의 탁월한 성취와 능력만 주목하며 능력차별주의를 서사의 중심에 둔다. (267)
스티브 실버만이나 올리버 색스 Oliver Sacks 같은 작가들이 자폐인들을 만나며 공통적으로 알게 되는 사실은 많은 자폐인들이 SF와 판타지 속 세계에 매우 열광한다는 점이다. <뉴로트라이브>의 한 챕터는 자폐 커뮤니티와 SF 팬덤 간의 오랜 친연성의 역사를 추적한다. 자폐인 중 많은 수가 정량화된 데이터와 조직화된 시스템, 복잡한 기계에 매료되며, 그 관심은 쉽게 과학으로 향한다. (274)
‘사이보그 중립’에는 몸의 위계를 줄 세우고 적합한 몸만을 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상성 규범에 저항하는 일이 전제된다. (281)
독서습관590_사이보그가 되다_김초엽&김원영_2021_사계절출판사(220703)
■ 저자 1: 김초엽
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원통 안의 소녀> 등을 출간했고, 2019년 오늘의 작가상, 2020년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
■ 저자 2: 김원영
대학에서 사회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로스쿨 졸업 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했다. 지금은 작가이자 배우,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희망 대신 욕망>이 있다. 연극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인정투쟁 – 예술가 편> 등에 출연했다. 휠체어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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