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는 신혼부부의 싸움을 통해서 일찍부터 아내나 어머니인 여성들이 형편없이 무기력한 존재이며, 어머니들이 옷과 음식을 받는 대신 가족을 돌보아야 하며 결혼이라는 계약의 조건에 복종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은 마리 정치의식의 핵심을 구성한다. 마리가 결혼 관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지배와 복종은 계급 관계에서나 사회당의 정치에서나 서구 제국주의나 일본 제국주의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존엄한 인간성을 지닌 인격체로서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자각과 실천이었다. (416)
책은 독자에게 경험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책 <대지의 딸 Daughter of Earth>이다. 저자인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자전적 소설로 주인공 '마리'는 바로 저자 자신이다. 가난과 결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어머니와 주변 여인들을 보며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남자와 여자가 대등하게 살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구속돼야 하지 않으며, 결혼과 임신이 피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견고하게 저자의 마음에 자리 잡는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살았던 스메들리의 삶 자체가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가난한 가족의 삶은 한국전쟁 직후에 이 나라에서도 실존했었기에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어머니와 이모와 다른 삶을 갈구하고 실현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이들과의 인연으로 주어진 도전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개인으로서 따라가기 쉽지 않은 여정이다. 경제가 어렵고, 취업이 쉽지 않고,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지만 스메들리가 살던 시대보다는 살만한 사회이기에 미지근한 태도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특색을 살려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에 기여하는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저자도 그랬고, 우리도 그렇다.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삶은 미국이란 나라에 머물지 않고 인도와 중국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여성에 대한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기에 평범하지 않은 선택과 좌절하지 않는 태도로 자신을 찾아갔던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신선한 도전을 준다.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을 인용했다.
그래서 나는 팔이 다 나은 후에도, 부러진 팔이 여전히 아프다고 오랫동안 불평했다. 덕분에 내가 병들거나 다치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고, 낫고 나면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또한 고통만이 사랑을 찾게 해 준다는 모순은 내 존재의 깊숙한 곳에 뿌리박혔다. 그리하여 내 유년기는 잦은 병치레와 골골한 상태로 채워졌다. (40)
나는 웃지 않았다. 내 마음을 좀먹는 무엇인가가 그 말에 있었다. 혼자서 되뇌기조차 힘겨울 만큼. 내가 사는 동안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번 뿐이었다. 단 한 번, 내가 왜 결혼을 증오하게 되었는지, 결혼한 여자들을 왜 싫어하게 되었는지, 그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찾으려 노력할 때였다. 그 두 문장("그럼, 내가 네게 사 준 옷들 다 내놔!" " 제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잖아요!"를 가리킨다. 옮긴이)은 결혼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진정한 지위를 분명하게 보져 주는 것이었다. (76)
언니는 열다섯 살이었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고 있었다. 우리 세계의 기준으로 보자면 돈을 버는 여성은 자유로운 여성이었다. 오직 기혼 여성만이 명령을 받고 살았다. (80)
남자들은 웃을 수도 있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다섯 시 종이 울리면 남자들은 일어나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나갔으며 토요일에는 오후 한 시까지밖에 일하지 않았다. 그 남자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렇게 과감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우리 고용주는 남자들을 존중했지만 뒷방의 우리들까지 대우해 주지는 않았다. 강하고 굳이 존중받을 필요 없는 사람들은 대우받고, 존중해 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존중받지 못한다는 게 참 이상했다. (90)
덜라과와 마찬가지로 터쇼에서도 불만과 증오심이 터질 것처럼 끓어올랐다. 터쇼 역시 사장은 권위적이었고, 노동시간은 길었으며 임금은 형편없었다. 갱이 무너질 때를 대비해 세운 버팀목과 안전장치 역시 엉망이었다. 작업 환경은 열악했고, 매점에서 파는 물건은 턱없이 비쌌으며, 매점 주인은 정직하지 않았다. 미국 달러 대신 회사 돈으로 임금을 주는 것 또한 똑같았다. (119)
우리에게 ‘공부’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막연한 사치를, 책이나 읽고 실제로 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엇을 의미했다. 오로지 부잣집 소녀들과 몸이 허약해서 책 읽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녀들만이 그런 사치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 다른 소녀들은 시간을 낭비한다고 ‘따귀나 맞기’ 십상이었다. (147)
나는 결혼을 증오했으며 기혼 여성이 되느니 차라리 창녀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자신을 보호하고, 먹이고, 존중할 수 있으며,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창녀들은 자식을 갖지 않으며, 남자들도 감히 창녀를 때리려고 덤벼들지 않으니까. 남자 말에 복종할 필요가 없었다. 기혼 여성의 ‘체면’은 노예 상태와 열등감을 받아들임으로써 지켜지는 것 같았다. (190~191)
나는 일에 반대했지만 베아트리체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우리 각자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물었다. “누구의 조국을 위해서 일한다는 거지?” 우리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평생을 고통스럽게 일하게 하는 조국? 아니면 베아트리체에게 그런 것처럼 굶주리게 하는 조국? 그도 아니면 이모에게 한 것처럼 창녀가 되게 하는 조국? 아니면 조지에게 그런 것처럼 아이를 쥐처럼 죽게 하는 그런 조국을 위해서? (251)
나는 뉴욕을 증오했고 노동자들의 몸뚱어리 위에 세워진 부를 증오했다. 5번가의 42번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나는 굴러가는 자동차들을, 내가 일생 벌 수 있는 돈보다 더 비싼 승용차들을 보았다. 단 하루도 일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결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에 나가 싸우지도 않을 사람들이 승용차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254)
살인적인 열기 속에서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을, 그저 자기들 육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받고 일하는 흑인들의 모습은 나의 내면에서 사나움을 일깨웠다. 어찌나 분노했던지, 교수를 죽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누구든,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남보다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증오심과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사실에 맞닥뜨리고서야 인간들이 늑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261)
저는 우리나라를 몇몇 부자나 권력자의 수중에 넣어주려고 일하지는 않을 거예요. 부자나 권력자는 우리더러 자신들을 위해 일하라고 시키면서 우리를 가난에 빠뜨리지요. 그러면서도 ‘우리’ 나라라고 말하죠. 오늘날 미국은 ‘우리’ 나라가 아니라 ‘그들’ 나라예요. 우리는 부자와 권력자에게 복종할 때만 사는 게 허용될 뿐이지요. (275)
여러 달이 지났다. 그동안 란지뜨 씽이라는 아시아에서 온 남자, 유색인종 남자는 여태껏 내가 배운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많은 것들에 대해 미숙하고 무지했지만 선생님은 나와 함께 일했다. (277)
스메들리와 어니스트는 1912년에 결혼했는데, 각자 생활비를 내며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는 전통적인 부부 관계가 아닌 평등한 삶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스메들리에게 결혼은 임신과 양육이 여성의 일에 얼마나 치명적인 부담이 되며 여성의 삶을 어떻게 굴종적인 것으로 만드는지를 처절하게 깨닫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스메들리가 낙태 결정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니스트와의 갈등으로 둘은 1916년에 이혼하고 말았다. (408)
백인 부르주아 남성 작가들의 더 큰 문제는 당대 문단의 지배적 흐름이었던, 현실을 자연주의적으로 파악하는 태도 때문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의식이 다분히 기계주의적인 데다, 세계관에서는 낭만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원시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데 있었다. 백인 남성 작가들은 당대 미국 사회의 중상층 인물의 추악한 심리나 타락한 정신 상태를 작품의 핵심 주제로 삼아 그것을 세세하고 냉정하게 드러내는 데는 탁월했다. 그렇지만 그러한 상태를 야기한 열악하고 잘못된 현실의 모순을 뚫고 또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끈질긴 투지나 성, 계급, 인종(민족)적 차별 없이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열망을 생동하는 언어로 제시할 수는 없었다. (413)
독서습관587_대지의 딸 Daughter of Earth_아그네스 스메들리_2011_이후(220628)
■ 저자: 아그네스 스메들리 Agnes Smedley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1892년 2월 23일 미국 미주리 주 가난한 소작농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도 못할 만큼 가난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남의 집 빨래를 하거나 입주 가정부로 살아야 했다. 어머니와 이모를 통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보고 듣고 자라면서 주체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키워 나갔다.
스무 살의 첫 결혼은 짧게 끝나고 저널리스트 활동을 거쳐 인도 독립운동과 중국 혁명운동에 가담하는 스메들리의 삶은 ‘미국 속의 제3세계인들’과 아시아인들 사이의 유대와 연대를 실천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스메들리의 사회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미국에서 바이마르 체제하의 독일, 항일전쟁 중인 중국, 다시 미국, 영국, 마침내 혁명을 성취한 중국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한 삶의 궤적에는 마거릿 생어, 엠마 골드만, 노먼 베쑨, 에드가 스노, 라지파트 라이, 자와할랄 네루, 비렌드라나트 차또파디아야, 루쉰, 케테 콜비츠, 리하르트 조르게, 오자키 호쓰미, 저우언라이, 주더, 조지프 스틸웰 등 현대사와 중요한 인물들과의 교류가 아로세겨져 있다.
1950년 5월 6일 런던에서 사망한 스메들리의 유해는 1951년 5월 6일 중국 북경 혁명가 묘소에 안장되며, 비문에는 주더의 친필로 “미국의 혁명적 작가이자 중국 인민의 벗,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추모하며”라고 씌어 있다.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남긴 책으로는 자전적 소설 <대지의 딸>(1925년), 가난한 농부 출신의 주더가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이 되기까지의 자기 변혁과 성장 이야기를 담은 <위대한 길>(1955년, 일본에서 최초 출간), 중국 혁명을 주제로 쓴 <중국 홍군은 전진한다>(1934년), <중국 혁명의 노래>(194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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