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6월에 교사를 그만두고 파리로 유학길을 떠났던 고 윤이상(1917~1995) 작곡가가 한국에 있는 아내 이수자에게 4년 동안 보냈던 편지를 모은 책이다. 1967년 간첩조작 사건이었던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로 뉴스를 통해 알게 된 윤이상이었다. 그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던 나에게 이 책은 일부분을 보여줬다. 가난하고 혼란한 대한민국을 벗어나 파리와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의 열정과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편지에 그대로 드러난다.
행복이란 것, 안식이란 것, 아무 걱정 없는 인생, 생활의 무풍지대를 말하는 거야! 우리가 성북동으로 넘어오는 보성고보 뒤의 마루턱에 올라앉아 모기를 쫓고 한담할 때나 성북동 골짜기 숲 속을 거닐 때 우리에게 무슨 바람이 있었으며 무슨 근심이 있었소? 있었다면 다만 생활 걱정!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걱정 없으리라. 그러면 우리는 마음대로 인생을 즐깁시다. 우리 어린것들 손잡고. 그것들이 자라면 우리끼리. (20)
윤이상의 소박한 행복론을 볼 수 있다. 의식주에 대한 걱정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1950년대에 거할 집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고, 가족들이 건강하면 걱정이 없는 인생이었다. 70년이 지난 현재 우리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해지고 안락한 환경이다. 스마트폰으로 밀려오는 과도한 정보 속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때로는 단절하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자. 저자의 행복론으로 1950년대로 시간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여기 와 보니 우리 한국의 악단은 정말 독일의 아주 적은 인구 약 20만 정도도 못되는 작은 도시의 음악적 분량도 안 되고 그 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소. 아주 깜깜한 밤중이오. 겨우 일본서 들어오는 잡지로서 조그마한 지식과 뉴스를 터득하는데 일본의 수준 역시 구라파에 와 보니 겨우 구라파에서 조금씩 묻혀 가지고 가는 것. (95)
한국전쟁 직후에 우리에게 음악과 같은 문화에 대한 요구보다 의식주가 시급했다. 그러니 파리와 베를린과 같은 서구 선진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느끼는 감회는 적지 않았고 특히 음악에 대한 차이는 비교할 수 없었다. 70년이 지난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의 음악가들이 세계를 누비고 있다.
여기서는 일본인이라면 제정신을 잃고 환영하지만 한국이라면 아이구 불쌍해라 또는 아예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이오. 나는 이런 데서 하는 나의 임무가 조금이라도 나의 조국의 얼굴을 씻어 주는 한 방울의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자신을 신뢰하며 나의 임무를 다하겠소. 끝내 우리는 잘 살날이 있을 것이며 병들지 않는, 우리의 가슴에 있는 인간에의 애정을 내보일 때가 있을 것으로 아오. (120)
유럽인들에게 비치는 한국에 대한 인상을 잘 보여준다. 전쟁으로 인해 가난에 찌들어 있는 나라, 불쌍한 나라였다. 그런 환경에서 윤이상은 자신이 음악을 통해 조국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며 의지를 보여준다.
여보, '보고프다'는 나의 말을 아껴 두고, 아껴 두고 하여 입 밖에 내지 않다가 이제 너무 참아서 그 말도 안 나오구려. 나는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나의 가장 즐거운 시간이오. 이것으로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가 있소. 나의 하는 일에 당신은 말없이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으며 당신의 생활이 그대로 나에게는 평화요, 또 나의 행복이오. (151)
윤이상이 파리와 베를린(책에서는 백림이라고 한자어를 썼다)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비용은 아내가 한국에서 국어교사 생활을 하며 지원했다.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도 없었다. 1956년 6월 파리로 유학을 갔을 때부터 1961년에 다시 부부가 만날 때까지 보냈던 편지는 아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준다. '보고프다'란 말을 아껴 두었다는 표현은 독자의 가슴을 떨리게 한다.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저자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이어진다. 애인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여기서 이번엔 한국 학생 백남준 군과 동거하고 있으며 가끔 그의 지나친 현대음악에 대한 태도에 충고를 주기도 하오. 그는 얌전하고 퍽 진실한 사람인데 신기한 그리고 기괴한 음악에 흥미를 무척 기울이고 그것이 마치 광적인 것 같이 좋아 보이므로 나는 그것이 못마땅해서 자꾸 충고를 주곤 하오. (157)
윤이상이 유학시절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을 만났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백남준은 학창시절부터 음악에서도 새로운 분야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그를 진실하나 기괴한 음악에 심취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결국 백남준은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하고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었다.
나의 마누라. 내가 처음 구라파에 왔을 때는 자랑삼아 나는 Korea인이라 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물을 때 아니 한국인이오 하면 '아 Korea, 아이구 지긋지긋해, 나는 Korea를 잘 아오. 그 수많은 피난민은 어찌 살고 있소. 그 집 없는 소년들은' 그리고는 더 교제해 보려고도 하지 않소. (171)
이 부분도 당시에 Korea란 나라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피난민들이 가난하게 사는 나라, 도와줘야 할 나라였던 것이다. 유학생으로 자신의 국적을 언급해야 할 때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일본과 중국에 비해 왜소한 한국의 위상에 낙담하면서 한편으로 음악으로 성공해야겠다는 의지도 불탔을 것이다.
카라얀은 지금 세계에서도 음악가로서는 가장 일등 가는 행운아요. 헝가리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27세에 독일의 지방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 지금 50세밖에 안 되는 사람이 푸르트벵글러의 후계자로서 백림 필의 수석 지휘자요, 빈 오페라의 수석. 또 밀라노 스칼라의 수석 지휘자. 그는 돈이 어떻게나 많은지. 그의 왕궁 같은 별장은 유럽 도처에 있고 심지어 아프리카 모로코에까지 있소. 그는 연주에 별장 방문에 사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오. (209)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에 대한 설명이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카라얀이 비현실적이면서도 부러웠을 것이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지금 라디오 뉴스에는 하와이에서 이승만이가 의사들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한국 혁명으로 말미암아 정신적 타격을 많이 받아서 휴양을 필요로 한다고 발표했다고. 그 수많은 학생이 피를 흘리고 죽고 온 국내외가 떠들썩해도 한눈 깜짝하지 않은 위인이니 그의 정신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은 괜한 수작이오. (272~273)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엇갈린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사에서 이승만이 내린 결정과 그의 태도를 객관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앞세웠던 사람, 정적을 제거한 사람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윤이상에게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예술을 통한 인생관과 사회관에 입각한 인격을 양성해야 하며 그런 후이면 어떠한 직업에 종사해도 무방하오. 특히 우리 우경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철저한 인간교육과 국제성에 입각한 풍부한 지적 토대를 마련해 줘야 하오. 아이들을 내가 여기 부르는 이유가 거기 있소. (289)
1950년대와 60년대에 자녀교육에 대해 이렇게 열린 사고를 하는 부모가 얼마나 되었을까. 먹고 살기 힘든 마당에 예술은 언급하기도 어려웠고 극히 일부의 소유였다. 아이들의 국제성을 얘기하는 것도 한국 내의 여행도 어려운 마당에 이해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대를 앞서갔던 윤이상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독서습관578_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_윤이상_2019_남해의봄날(2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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