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클래식에 대한 이야기로 나의 경험을 소환하다
손열음의 책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는 피아니스트의 입장에서 경험하고 바라보는 세계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동시에 내가 경험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중학교 때 이론적으로 배우는 음악수업은 질색이었다. 어느 날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곡이 마음에 들어 찾아보니 '세미클래식'이란 테이프로 판매되고 있었다. 바로 구매해서 세미클래식 테이프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 지금도 세미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면 방 안에서 반복해서 듣던 모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음악 선생님도 소환되었다. 대학입시라는 목표만을 바라보며 음악수업은 자습시간처럼 보내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해 주고 눈감고 편안하게 감상하라고 하셨다. 국영수에 편중되어 음악교사로서 힘이 빠질 법한 시기였다. 학생들이 이 정도만이라도 최소한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셨을 것이다. 지금도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들을 때면, 고등학교 음악교실을 연상한다.
대학에 입학한 3월 어느날 캠퍼스를 이곳저곳을 알기 위해 기웃거리던 중 '고전음악감상실'이란 곳으로 들어갔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 듣는 작곡가에, 처음 듣는 연주 소리는 세미클래식과는 달랐다. 의자에 깊숙이 앉아 음악 소리를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사이 깜박 잠이 들었던 기억이다. 하지만 그때 들었던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기억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1990년 3월 캠퍼스 고전음악감상실의 어두침침했던 분위기와 의자가 떠오른다.
중년이 된 지금은 '세상의 모든 음악'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을 즐겨 듣고 있다. 여기서 소개되는 클래식을 포함한 다양한 음악을 듣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여러 작곡가와 연주가의 음악을 소개한다.
우석훈의 책을 통해 알게 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칼럼니스트인 손열음은 나를 클래식의 세계로 안내했다. 중학교 시절 담을 쌓았던 음악이지만 연주자의 입장에서 소개하는 용어들은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잘 전달되었다. 작곡이나 연주와 같은 분야는 생소했는데, 연주자의 입장에서 쓴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는 닫혀있던 클래식의 세계를 보여준다. 책에서 소개된 작곡가들, 연주자들에 대해 유튜브에서 바로바로 찾아서 들어가면서 읽었다. 즐길 수 있는 곡들이 아주 많았다. 숨겨진 보석을 캐낸 느낌처럼 만족스럽다.
손열음은 피아노 연습 중에 시간이 나면 책을 읽었다고 한다. 저자가 피아노 연습에만 치중했다면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와 같은 책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연주회와 콩쿠르를 다니며 경험한 것들과 과정에서 만난 국내외의 사람들이 그녀의 글감이 되었다.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쓰는 고충에 대해 저자가 기술한 부분을 읽으며 나의 블로그 포스팅 수준을 돌아본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강의를 들었던 내용을 소감과 함께 포스팅하고 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하루하루 경험했던 일련의 정보를 정리하다 보니 시간에 쫓기는 편이다. 한 번 쓴 글을 교정을 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재정리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 하지 못한 채 포스팅한다. 손열림의 글쓰기의 고충을 블로그 글을 쓸 때마다 느끼지만 하나의 글에 대한 되새김은 많이 부족하다.
가볍게 읽을 생각으로 펼쳤던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우고 몰랐던 클래식 세계를 다녀왔다. 책에서 남기고 싶은 부분을 발췌했다.
청춘을 송두리채 흔든 사랑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버린 것에,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으로 화답했다. 바로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 Op.16, Prokofiev Piano Concerto No.2 in G minor, Op.16>이다.
'카덴차'란 독주자나 독창자가 주로 악장이 끝나기 직전 잠깐 동안 혼자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이 카덴차가 제시부가 끝나자마자 등장한다. 피아노에만 아예 발전부와 재현부를 모두 맡겨버린 것이다. 피아노란 악기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기술들과 당시로선 생소하기 그지없던 온갖 불협화음이 혼재된 장장 5분이 넘는 이 카덴차는, 젊은 작곡가에게 닥친 절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44)
리하르트 바그너는 어쩔 수 없이 망명길에 오른 스위스에서 자신을 전폭적으로 후원해 준 비단상 베젠동크의 아내와 불타는 사랑에 빠졌다. 그러곤 그때까지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니벨룽의 반지> 사이클도 제쳐두고 갑자기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의 작업에 착수했다.
켈트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던 기사 트리스탄의 이야기는 13세기에 독일인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트리스탄>이라는 장편 서사시로 정리하며 재탄생했는데, 바그너는 이 작품의 줄거리만을 따 실상 그리스 신화식의 사랑 이야기로 극을 바꿔놓았다. 이미 정혼자가 있는 여자 이졸데와 사랑에 빠진 트리스탄은, 여러모로 성에 차지 않던 부인 미나를 사랑의 장애물로 여긴 스스로의 분신이기도 했다. '하루를 못 보면 병들고, 사흘을 못 보면 죽게 되는' 사랑의 묘약을 마신 남녀가 사회적 규범과 잣대로 고통받다 결국 죽음이라는 숭고한 승리를 이뤄내는 이야기. (45)
이미 바그너의 반음계주의 화성을 기초로 조성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이때 오스트리아의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는 정식으로 12음 기법 Dodecaphony을 선보였다. 리듬, 선율, 화성을 3대 요소로 하는 클래식 음악에서 이렇다 할 선율도, 화성도 없는 이 작법은 당대에는 실로 혁명이었다. (60~61)
피아노의 왼쪽 페달인 우나 코르다 una corda는 밟았을 때 건반에 딸린 악기의 액션부를 한쪽으로 조금 치우치게 해 액션부가 때리는 현의 면적을 줄여줌으로써, 소리를 작게 만든다. (70)
피아노도 왼쪽 페달보다는 오른쪽 페달이 더 중요하다. 현이나 관악기와는 달리 한 번 누른 소리를 지속시킬 수 없는 피아노의 최대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이 '서스테인 페달'이야말로 피아노의 핵심 중 핵심, 꽃 중의 꽃이다. 원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현을 누르고 있는 댐퍼들을 일체 공중에 띄움으로써 현의 울림을 극대화시키는 것. 그러다 보니 음의 길이만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 자체가 듣기 좋은, 공명 있는 소리로 바뀌기도 하고, 그래서 꼭 음 길이를 지속시킬 때가 아니더라도 수시로 밟아줘야 하는 것이다. 단 너무 많이 쓰면 소리들이 섞여 듣기 싫게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71~72)
바흐(1685~1750) 시대의 키워드가 종교, 베토벤(1770~1827) 시대의 키워드가 자유, 슈만(1810~1856) 시대의 키워드가 사랑이었다면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살았던 20세기 초반의 키워드는 이념이었다. 끔찍한 전쟁을 양산한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 처음으로 음악까지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소비에트 연방을 막 출범시켰을 당시 청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번 Op.10, Shostakovitch symphony No 1 Op 10> 등을 발표하며 국내외에서 명성을 높여가고 있었다. (100)
강한 내러티브를 배경으로 하는 리스트의 '이유 있는' 광기에 비교하자면 알캉(Charles-Valentin Alkan: 1813~1888)의 광기는 영 앞뒤가 없어 훨씬 더 공포스러우면서도, 뭔지 모를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 선생님을 매료시키는 것은 '재미'라고 했다. (141)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인생은 이렇게, 딱 반으로 나뉜다. 1873년생인 그가 작품번호 1번인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작곡한 것이 1890년이니, 그로부터 이때까지 러시아인으로서의 산 삶이 1막, 미국 망명 후 1943년에 숨을 거두기까지의 삶이 2막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아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대부분 1막의 모습이다. 그의 일생의 히트작, <피아노 협주곡 2번>과 <피아노 협주곡 3번>뿐 아니라 현대 오케스트라의 주요 레퍼토리인 <교향곡 2번>, 첼리스트들의 최고의 대곡인 <첼로 소나타>, 이외에도 대표곡인 <피아노 소나타 2번>, <전주곡집>, <회화적 연습곡집>, '보칼리즈'가 담긴 가곡집까지, 모두 러시아인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이다. (144)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가 그날의 그 자리,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을 그렸다. 음악이 시작되고 음산한 시작 부분이 지나자 비로소 막이 열린다. 무대 위에 선 무용수들의 춤이 시작되고, 기괴한 춤사위에 관객석이 어수선해진다. 점점 강도가 짙어지는 불협화음들에, 음악이 계속될수록 몸부림에 가까워지는 춤. 관객들은 야유를 쏟아내고 몇몇 우아한 신사숙녀들은 공연장을 나가버린다. 어느새 관객석의 소음이 음악을 모두 덮을 정도로 커지자 무대감독이 기지를 발휘했다. 관객석의 조명을 모두 켜버린 것. 잠시 동요하나 싶던 관객들, 다시 조심스레 불을 끄자 이내 폭도들로 되돌아온다. 끝내 경찰까지 출동! 이날의 사태를 조금 더 상세히 그린 작품으로는 BBC의 특집 단막극 <제전의 폭동 Riot at the Rite>이 있다. (155~156)
"좋아하는 연주자는 누구예요?" 보통은 내 입에서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나올 것을 기대하지만 내가 한결같이 대답으로 내놓는 이 사람은, 바이올리니스트다. 게다가 이름을 대면 열 중 둘은 "정말로요?"하고, 나머지 여덟 정도가 "... 그게 누구예요?" 하는 사람.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이 연주자의 이름은 마이클 래빈(Michael Rabin: 1936~1972)이다. (168)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이 내면 연기에 통달한 사람이 있다.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Alexis Weissenberg: 1929~2012)다. 그는 1929년 불가리아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그의 나이 열 살 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941년 어머니와 함께 터키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곧 잡혀 수용소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평소 그가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던 슈베르트를 즐겨 듣던 독일인 장교가 그와 그의 어머니를 끌고 기차역에다 데려다줬다. 장교는 아코디언을 창문 너머로 던져주며 말했다. "행운을 빌어!" 다음 날 그들은 이스탄불에 도착했고, 그는 그렇게 청소년기를 이스라엘에서 보냈다. (176)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44개나 되는 괴테의 시를 가곡으로 옮겨 놓은, 괴테의 광팬이었다. 그렇다면 괴테는? 음악 역사상 가장 천부적인 재능으로 손꼽히는 슈베르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몇 번에 걸쳐 자신의 시에 붙인 음악을 보내오는 이 청년에게 괴테는 끝끝내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233)
그렇다면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왜 이렇게 죽도록 연습을 할까? 제일 간단하게는, 피아노처럼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건반을 누르는 게 아니라 한 음 한 음을 일일이 잡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 같다. 바이올리니스트인 내 친구들은 모두 이 감각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항상 불안해한다. 전설 하이페츠도 사흘만 연습을 안 하면 온 청중이 다 안다고 했다니. 내 눈에도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하는 바이올린 테크닉은, 원리와 구조를 더 먼저 파악해야 하는 피아노 테크닉과는 좀 달라 보인다. (272~273)
독서습관579_글쓰는 피아니스트의 클래식과 삶의 이야기_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_손열음_2018_중앙북스(220611)
■ 저자: 손열음(1986~)
피아니스트, 음악 칼럼니스트.
강렬한 타건, 화려한 테크닉, 충만한 감성을 담은 열정적인 연주로 순식간에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피아니스트. '젊은 거장', 혹은 '천재'로 불리지만 본인은 음악에 대해 식지 않은 열정을 간직한, 한결같은 연주자의 길을 걷는 '현재 진행형의 음악가'이길 바란다.
1986년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다섯 살에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열한 살에 출전한 차이콥스키 청소년 콩쿠르에서 2위, 2002년 이탈리아 비오티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1위,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2위 및 모차르트 협주곡 특별상과 지정 현대곡 특별상을 차지하는 등 한국 피아노계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뉴욕 필하모닉, 체코 필하모닉, 이스라엘 필하모닉, 로테르담 필하모닉, NHK 심포니, 아카데미 오르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하고 발레리 게르기예프, 로릴 마젤, 드미트리 키타엔코, 로렌스 포스터, 유리 바슈메트, 제임스 콘론, 카렐 마크 시숑, 히사이시 조, 정명훈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호흡을 맞췄다. 또한 라인가우 페스티벌, 바트 키싱엔 페스티벌, 베토벤 부활절 페스티벌, 발틱해 페스티벌, 류블랴나 페스티벌, 포틀랜드 피아노 인터내셔널 등 세계를 무대로 열정적인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현재 하노버 국립 음대에서 아리에 바르디에게 배우고 있으며, 고향인 강원도 원주시와 예술의 전당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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