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도서관에 예약도서를 찾으러 갔을 때 주황색 표지색의 <버터>라는 제목의 책과 만났다. 소설 같은데 왜 제목이 '버터'일까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소설이 2009년에 기지마 가나에라는 30대 여성이 남자들 대상으로 돈을 갈취하고 살해한 사건을 바탕으로 창작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아름답지 않고 비만이 있는 여인에게 왜 남자들이 돈을 썼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미혼, 이혼, 사별 등으로 홀로 된 남성들에게 요리를 잘해주는 여자에 대한 환상과 가족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원인이었을 거라고 보고 저자는 이 소설을 만들었다.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어 먹는 버터간장밥을 시작으로 겉에 주기적으로 버터를 바르며 만드는 10인용 칠면조 요리까지 소설은 다양한 버터 요리를 보여준다. 구치소의 가지이 마나코와 그녀에 대한 주간지 기사를 쓰려는 주인공 리카의 면회를 간다. 마나코가 소개하는 요리를 직접 체험하는 리카가 점차 마나코를 이해하게 되고 남자들의 마음도 추측한다.
1~2인 가족이 많아지며 가족이 빠르게 분해되는 대한민국 사회다. 인구는 많지만 서로간에 소통이 없어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특히 40대 이상의 외로운 남성들에게 기지마 가나에의 꽃뱀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 쉬운 환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고 돈은 있는 남성들은 가족과 같은 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리카가 남자친구와 헤어지며 '더 이상 타인에 의해 소비되고 싶지 않다'라고 한 부분이 강하게 마음에 와닿았다. 남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비교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행복은 멀어져 간다.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 에너지를 먼저 소비해야 한다. 자신이 행복해야 주변에 행복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버터는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해 마가린과 함께 피하고 싶은 음식 중 하나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니 버터가 들어간 프랑스 요리를 하나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들이다.
"역시 레이코가 말한 대로네. 요리 좋아하는 사람을 다루는 마법의 말이구나. '그 요리, 어떻게 만들었어?'" (175)
그거 현대병 아냐? 최근에는 노력해서 낸 결과보다 날마다 얼마나 노력하는가가 그 사람의 가치가 된 것 같지 않아? 그러다 노력과 고통이 혼동되기 시작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훌륭한 세상이 돼버리고, 가지이 마나코가 그토록 규탄받는 이유는 그녀가 너무도 고통스럽지 않은 범죄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184)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이용해서, 독신 시절부터 모아온 돈을 다 썼지. 어린이집에 빈자리가 날 때까지는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고 말이야. 주위에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어. 그렇지만 난 초인이 아니었어. 그게 나쁜 것도 아닌데, 초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195~196)
무엇에도 쫓기지 않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초조해지도록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 같아. 전에 다이어트를 강요하는 식으로 말해서 미안해. 왠지 말이야, 부드럽고 풍요롭고 여유로워져 가는 리카를 보니 불안해졌어. (238)
계속 젖이 돌게 하기 위해서 1년에 한 번은 출산을 해야 한답니다. 그래서 인공수정으로 항상 임신한 상태로 있어요. 소를 한 번 만져보세요. (257)
제대로 아버지한테 사랑을 받지 못한 당신들처럼 뒤틀린 욕구 따위 들이대지 않아.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받았지. 여자한테 모성을 찾고, 보살핌이나 다정함을 기대하는 남자를 당신들은 경멸하는데, 그거하고 대체 뭐가 달라. (336)
지금 속내를 털어놓으면 시노이 씨는 어떻게 생각할까. 어쩌면 호랑이는 아니, 남자들은 가지이가 말한 대로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요코타 씨도 경찰이 '당신도 살해됐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해도 전혀 와닿지 않은 게 아닐까요. 살아 있다는 건 뭘까요 피해자뿐만이 아니에요. 우리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떠난 가족과 함께하던 집을 처분하지 못하는 시노이 씨도, 아직 아버지에게 묶여 있는 나 자신도. (410)
난 게으른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 다만, 온종일 당신이나 세상을 기쁘게 할 만한 노력을 할 자신은 없어. 이제 젊지도 않고, 더는 타인에게 소비되고 싶지 않아. 일하는 법이나 사람 사귀는 법을 내 중심에 놓고 생각하고 있어. (434)
레이코는 대면형 주방 너머로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졸업 논문에서 해방된 유우는 기타무라와 나란히 게임에 열중하고 있고, 시노이 씨는 탁자에서 신문을 스크랩하고 있었다. 발밑에는 멜라니가 누워 있다. (446)
우유는 원래는 소의 피죠. 내게 유제품은 생명이고, 피입니다. 버터를 듬뿍 넣은 과자나 요리, 특히 버터를 듬뿍 사용하는 프랑스 요리를 너무 좋아하는 데 이 추억 때문입니다. (...) 임신할 수 있는 정자만 받으면 이성 따위 상관 없이 여자끼리 잘 지내면서 싸우지도 않고 생명의 시스템을 잘 돌리는 암소가 무섭기도 했어요. (455)
남자를 용서하고, 감싸고, 긍정하고, 안심시키고, 절대 능가하지 않는 것. 단지 이것만 있으면 돼요. 어째서 결혼 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세월이 흘러도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457)
그녀가 요리교실을 다니기 시작한 뒤로 남자들이 잇따라 죽은 셈이다.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게 됐다." 요컨대 그들에게 쏟던 막대한 에너지를 자신에게 쏟은 탓에, 그녀의 보살핌을 갈망하던 남자들이 자포자기 생활을 하다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486)
만약 신이 있다면 우리가 주어진 시련에 괴로워하는 모습에 만족하거나 기뻐할 리 없잖아. 그러니까 뭐든 다 자기 힘으로 극복해야 하는 건 아닌지도 몰라. 계속 성장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게 훨씬 더 중요해. (554~555)
가족의 형태가 이렇게 다양화된 오늘날엔 아무 실체도 없는 거잖아요. 형태 없는 이미지에 휘둘려서 남자도 여자도 압박을 느끼고 괴로워해요. 사실 이 사건의 본질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561)
기자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기사 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회사에 끈질기게 버티고 앉아 억지를 부려 일을 따내고,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내일 먹을 것을 생각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가지이 마사코 수준으로 염치없는 미치광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남 일처럼 생각하며 리카는 후후후 웃었다. (594)
■ 저자: 유즈키 아사코
1981년 도쿄 세타가야에서 태어나 릿쿄대학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했다. 드라마 시나리오 라이터로 일하다 2008년 여고생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 '포겟 미, 낫 블루'(<종점의 그 아이> 수록작)로 제88회 올요미모노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로 2개월 만에 10만 부를 돌파, 서점 대상 7위에 올랐고, 후속작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를 출간했으며 두 작품은 드라마화되었다.
출간하는 소설마다 독자들의 사람을 받으며 나오키상 후보에 오르는 유즈키 아사코는 2009년 일본을 경악시킨 한 사건에 주목한다. '수도권 연속 의문사 사건'으로 일명 꽃뱀 살인사건이라고 불린 이 사건의 범인은 기지마 가나에라는 30대 여성으로 결혼을 미끼로 만난 남자들에게 10억 원이 넘는 돈을 갈취하고 교묘히 살해한 것이다. 범인의 사진이 매체에 실렸을 때, 일본 사람들은 크게 놀랐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꽃뱀'의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즈키 아사코는 살인범 기지마 가나에가 유명 요리교실을 다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요리 잘하는 가정적인 여자에 대한 환상과 가족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본 작가는 소설 <버터>를 집필했고, 이 책으로 157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실제 사건의 범인인 기지마 가나에는 <버터>를 읽고 난 뒤 자신의 블로그에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그녀는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블로그를 운영하며 사기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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