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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489]김종필 증언록 1_1960년대부터 1979년까지의 한국 현대사

by bandiburi 2021. 11. 28.

<김종필 증언록>은 전체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500페이지의 하드커버로 되어 있어 읽기에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김종필 씨가 5.16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부터 최근의 노무현까지 직접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관련된 사진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먼저 1권을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과 사건들이 이미 익숙하고, 그 중심에 있던 김종필의 시각에서 재해석된 글이라서 교과서나 현대사 책에서 단편적으로 접했던 것과 달리 쉽게 읽혔다. 1권에서는 5.16 군사 쿠데타를 왜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황부터 박정희의 마지막 유신체제까지 담고 있다.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저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고 자신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만족감과 자부심이 드러난다
이승만부터 박정희까지 집권세력으로 군림하며 현재까지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집단의 한 사람으로서 보수적인 색채가 많이 드러난다. 특히 시대정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밑줄로 표현했다. 다만 저자의 증언록이기에 저자의 생각으로만 받아들인다

 

베트남 전쟁이 통킹만 사건으로 시작됐다는 것이 미국의 자작극임이 드러났는데도 죽을 때까지 바로잡지 않고 잘못된 대로 믿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또한 이승만,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의 동상을 광화문의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동상 뒤에다 설치하기를 바란다는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크게 화를 냈다는 부분,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 위에 국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한 합리화라고 읽혔다. 이승만의 행적에 대해서도 과오는 있지만 나라를 위해 했던 일은 인정해야 한다는 점은 저자의 생각의 한계다. 

 

또한 이후락과 김재규에 대한 설명은 특히 불편한 심정이 많이 드러났다. 이후락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키고, 김일성을 만나고 온 것에 대해 독선적이고 일을 만들어내길 잘한다고 하고, 김재규에 대해서는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10.26까지 일으켰다고 한다. 보는 입장에 따라 해석이 많이 다른 부분이다. 

 

사람이 완벽할 순 없다.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 책 <김종필 증언록 1>을 읽으며  친인척 관계에 있던 박정희와 김종필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박정희가 장기 집권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1979년까지 연장하다가 결국 총탄에 사라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하 책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을 정리했다.

 

 

정치란 결과이며, 정치가는 항상 역사의 법정에서는 피고라는 생각이 오랜 세월 정치에 몸담아온 저의 솔직한 감회입니다. 정치가는 누구나 스스로의 판단이 국가의 명운을 결정한다는 자각 아래 혼신의 힘을 다해 결단을 내리고 국가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할 고독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4.19 혁명 직후 나는 군 수뇌부의 부정부패 무능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3성 이상 장군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 운동을 주동했다. 남들은 하극상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있었다. 아랫사람이 위를 누르는 하극상이 아니라 내가 몸담은 군 조직을 온전하게 만드는 정군이었다. 군대만 제대로 서 있다면 대한민국은 버틸 수 있다. (29)

 

5.16에 가담했던 김윤근 준장은 회고록에서 "콜론 보고서가 한국군을 우습게 봤다고 분개하는 장교들이 많았다"라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소장파 장교들이 궐기에 나서는 데 이 보고서가 촉진제 역할을 했다. 단기간 내 쿠데타 가능성이 없다는 예측이 군심을 자극해 거사를 일으킨 역설이다. (57)

 

수도방위사령부는 5.16의 산물이다. 탄생의 산파역은 5.16의 기획연출자 김종필이다. 5.16 거사의 분기점은 1군사령관 이한림의 체포였다. (중략) "군사혁명정부를 보호할 수 있는 군사력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런 뒤 동원한 전투부대는 돌려보낸다. 앞으로 미군 사령관의 작전지휘권은 지켜주겠다."고 했다. 그 '군사력 편성'이 수방사 창설이었다. (102)

 

미군정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조선경비대)를 창립했다. 국군의 전신이었다. 장교 자원이 부족했다. 일본군 지원병이나 하사관 출신이 대거 장교로 임관했다. 사병 출신도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서 몇 주 교육을 받고 지휘관이 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조선경비대는 기강이나 규율 면에서 한심스러웠다. (113)

 

이것이 6.25 반년 전부터 개전 사흘 뒤까지 내가 겪은 군 내부의 실상이다. 6.25는 적이 기습 남침한 것이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적을 알고서도 준비하지 않아 남침을 자초한 것이다. 6.25는 김일성의 오판이라는 얘기도 한다. 그러나 오판한 건 우리 군 수뇌부였다. 6.25 사흘에 배운 피의 교훈은 무비유환, 준비하지 않으면 화를 당한다는 것이다. (124)

 

 

이승만 박사는 그늘도 있었다. 자유당 독재와 부정 선거, 학생 시위와 희생... 4.19는 그의 정치의 그늘이다. 하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덮어놓고 과거를 전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지난날에는 지난날의 논리가 있고, 오늘은 오늘의 논리가 있다. 지난날은 그때의 논리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것을 오늘의 잣대로 비난할 순 없다. 어제는 오늘의 어머니다. 어제의 어머니가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다. '공칠과삼功七過三'이란 말도 있잖은가. 과거의 잘못은 교훈으로 삼고 배울 것은 뽑아서 오늘을 살찌워 나가야 한다. (175)

 

워커힐이란 이름은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을 기린 것이다. 워커라는 성에 언덕을 뜻하는 힐hill을 붙여 '워커의 언덕'이란 뜻으로 내가 작명했다. (196)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같은 전후세대의 지도자들이 그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는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는 나를 만나면 "일본이 한국을 괴롭혔다. 일본인으로서 사과드린다. 지난날은 안 좋았지만 이제 한일 간에 손을 잡고 한국이 부흥하기 바란다"는 말을 하곤 했다.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1980년대까지 외무대신을 지냈는데 나와 퍽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사람이 좋고 모나는 소리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262)

 

두 회장의 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들의 동상을 광화문 광장에 세우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에 경제 공로자 두 분의 동상이 세워졌으면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우리 후손들이 그 두 동상 앞에 서서 고마움을 표시하는 모습을 나는 상상한다. 더불어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과 조국근대화를 이룬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이 세종대왕 동상 뒤쪽에 세워지는 그런 세상이 속히 오기를 희원한다(293)

 

1964년 8월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군의 어뢰정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져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이때부터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에 월남전 지원을 호소했다. (318)

 

하지만 막상 신문을 해보니 CIA로선 써먹을 만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이미 CIA가 다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큰소리치던 김형욱이 실제로는 정보가치가 별로 없는 인물임을 CIA도 알게 됐다. 김형욱은 90만 달러를 돌려받았지만 그때부터 CIA는 그를 낮게 평가했다. 다만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늘 감시는 하고 있었다. 그가 미국에 온 한국 기업인들에게 돈을 뜯어 내는 장면들도 모두 CIA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357)

 

회의에 참석한 이후락 부장이 난데없이 "북한이 우리와 대화를 하겠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국가보안법을 없애야겠습니다."라는 의견을 내놨다. 국무총리인 내가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라고 들고일어났다. 나는 그를 향해 고함치듯 말했다. (399)

 

김종필 전 총리는 1972년 국회에서 "유엔은 외세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각 원칙에 대한 남북 간 해석의 격차는 40년이 넘도록 좁혀지지 않고 있다. 북한과 일부 국내 종북 세력은 지금도 3원칙을 통일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 (401)

 

유신은 많은 비판과 저항을 불렀다. 유신헌법 자체가 국가의 생존을 위해 국민을 누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태어났다. 국가와 국민을 다 만족시킬 수 없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국부와 자유를 누리는 것은 유신 때 희생을 감수한 국민들 덕분이다. 그분들에게 송구하고 고마울 뿐이다(405)

 

유신 반대 운동이 다시 점화돼 1975년 5월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유신헌법에 대해 부정, 반대, 개폐를 주장하거나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는 대통령 명령이다. 나는 그해 말 총리를 관뒀다. 그 뒤 엉뚱하게 김재규 같은 권력 내부 인사가 유신을 종식시켰다. (407)

 

 

하나회 소속 장교들 상당수가 수사 대상에 올랐고, 하나회 회장이었던 전두환(준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한 전두환을 구하기 위해 구명에 나선 건 박종규 경호실장이었다. 박종규는 5.16 혁명 직후 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으로 있으면서 전두환 민원비서관과 가까워졌다. 아마 박종규는 본인의 권력을 키워나가기 위해 군부 내에 자기 사람을 키우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일종의 동류상린同類相隣이었다.(413)

 

미군 철수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1971년 3월 27일 한국에서도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그해 가을 유엔총회는 대만을 축출하고 중공의 가입을 허용했다. 1972년 2월 닉슨과 마오쩌둥의 베이징 회담은 냉전질서를 해체, 데탕트의 서곡으로 간주됐지만 우리에겐 적과 아군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혼돈의 시작을 상징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엔 일본이 발 빠르게 중공과 국교를 텄다. 한국의 오랜 외교지침이었던 할슈타인 원칙(북한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단교하거나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은 수정이 필요했다. (417)

 

미국이 그토록 집요하게 우리의 핵무기를 막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한국을 손바닥 안에 놓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다. 미국은 한국이 핵무기를 만들어 자기들 손바닥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이 조금이라도 앞서 나가겠다고 하면 갖은 수단과 협박을 동원해 막았다. 약하면 불쌍한 것이다. (425)

 

이후락은 정보부에서 파견 나간 김재권 주일공사에게 도쿄에 머무르고 있는 김대중 납치를 지휘하라고 지시했다. 아예 김대중의 손과 발에 쇠뭉치를 달아서 바다에 집어던지라고 했다는 말도 있었다. 배 위의 현장에서는 공작원들이 차마 김대중을 죽일 수 없어서인지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해탄을 건널 때는 중앙정보부의 대북 공작선 용금호가 동원됐다. 김대중 씨는 자기를 태운 배가 바다를 건너는데 미군 비행기가 빙빙 돌면서 보호해 주는 바람에 살아나게 됐다고 회상했는데 신빙성이 떨어지는 말이다. 깜깜한 한밤중 현해탄에 갑자기 비행기 한 대가 1,000t짜리 배 한 척을 찾아내 그 위에서 빙빙 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41)

독서습관489_김종필 증언록Ⅰ_김종필_2016_미래엔(2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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