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타로, 나는 뇌를 다쳤다. 이젠 틀렸어." 그것이 료마의 마지막 말이었다. 말을 마치자 마지막 숨을 내쉬고 쓰러졌다. 아무 미련도 없는 듯이 그 영혼은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갔다. 하늘에는 뜻이 있다. 이 젊은이의 경우,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도리가 없다. 하늘은 이 나라의 어지러운 역사를 수습하기 위해 이 젊은이를 지상에 내려 보냈다가 그 사명이 끝나자 아낌없이 하늘로 도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날 밤 교토의 하늘은 비를 머금고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는 돌고 돈다. 젊은이는 자신의 손으로 역사의 문을 밀어 미래를 향해 활짝 열어젖혔다. (300)
일본이 계급사회였던 막부시대를 종식하고 서구 열강의 영향력 하에서 빠르게 메이지 유신을 통해 현대화할 수 있었던 변화의 중심에 료마가 있었다. 료마라는 한 인물로 인해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연합체를 형성해 내란을 막았고, 이로 인해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이 침탈해 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제 요시노부와 료마는 일본 역사의 이 시점에서 단 둘만의 동지였다. 요시노부는 사카모토 료마라는 초야의 지사를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으리라. 료마 역시 요시노부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단 둘만의 힘으로 역사를 회전시킨 것이다. 료마가 기획하고 요시노부가 단을 내렸다. (239)
"일이란 그 전부를 해서는 안 되는 거다. 8할까지면 족하다. 거기까지가 어려운 고비니가. 나머지 2할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2할은 남이 맡아하도록 하여 완성의 공은 양보하는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큰일을 해 낼 수 없다."(246)
또한 막부세력과 근왕 세력이 대립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은 서구 열강에게는 유리했지만 일본의 미래에는 불리하다는 것을 료마는 간파했다. 그래서 단순히 사쓰마 조슈 도사 번의 연합체가 무력으로 막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전복하는 것을 망설이다 묘안을 떠올린다. 영향력이 줄어드는 막부를 설득해서 유혈사태 없이 막부시대를 종식시키고 그들에게 문을 열어두는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들 놀랐지만 료마의 생각에 공감하고 요시노부의 승인을 받아 막부시대가 종식된다.
료마는 말했다. "이 전례 없는 시대에 가마쿠라시대나 전국시대의 무사도에 입각해서 사물을 생각한다면 큰일입니다.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유해한 것은 충성이며, 가장 소중한 것은 애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
당시에 료마라는 걸출한 인물이 없었다면 번간의 무력충돌과 막부 지지층과 반대세력과의 유혈충돌은 불가피하고 어쩌면 청나라와 같이 서구 열강에 의해 분할되었고 현재의 일본은 없었을 수도 있다. 료마를 통해 일본근대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일본의 문화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진행되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기 위한 안까지 만들어 공유한다. 새로운 일본을 만들기 위한 조직에 여러 번의 인물들을 추천했으나 정작 자신의 이름을 뺐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어려운 8할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수행하고 나머지 2할은 남겨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살해당하며 지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마무리하고 떠났다.
8권까지 열심히 달려왔는데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갑자기 끝나버린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마음속에 가득 만족감이 드는 책 <료마가 간다>였다.
흥미로운 점은 미쓰비시를 세운 야타로란 인물이 무인도를 점령하겠다고 떠난 곳이 울릉도였다는 사실이다. 당시에 이미 조선인들이 울릉도를 오가며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 책에서도 등장한다. 여전히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자료도 이미 우리가 점유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겠다. 작가 시바 료타로가 다양한 사료를 고증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보면 그 증거가 있는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한 세트로 보자.
"무인도를 점령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그 소문을 듣고 교토에 있던 료마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목표는 동해에 떠 있는 어떤 외딴섬이었다. 조선에서는 울릉도라고 하는 섬이다. 야타로가 나름대로 진지했던 증거로, '대일본 도사 번의 명을 받들어 이와사키 야타로가 이 섬을 발견하다'라는 팻말까지 싣고 떠났다는 것이 있다. (중략) 그들 가운데 제일 연장자인 듯싶은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대한 울릉도야'라고 써서 돌려준다. 모두 조선인인 듯했다. 야타로는 필담을 계속하는 동안 더욱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들이 이곳에 자리잡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바다짐승들을 잡기 위해 늘 오는 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48~149)
"동양인을 상대할 때는 논리보다는 고함과 채찍과 대포에 의한 위협이 훨씬 잘 통한다." 그렇게 믿어 온 사나이였다. 실제로 그는 청국에서 그런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광동 주재 영사로 있을 때, 제2차 아편전쟁에 불을 지른 역할을 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 뒤 그는 상하이 주재 영사를 거쳐 일본 주재 공사로 영전했다. 부임했을 무렵에는 일본인에 대해서도 미개인을 다루듯이 했다. "이 나라에선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젊으면서도 거의 천재적인 정세 분석력을 지니고 있는 통역관 어네스트 사토가 그때그때 이 저돌적인 상사를 교육시켜 왔다. (117) - 퍼크스에 대해
일본인들은 짐승의 고기를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인 줄만 알고 3백 년 동안 그것을 밥상에 올려놓지 않아 왔다. 도쿠가와 막부가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이기는 했다. (중략) 야타로의 말에 의하면, 일본인에게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 불교 사상도 아무것도 아니며, 도쿠가와 막부의 국민 왜소화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고기를 먹으면 기력과 체력이 충만해지고, 그 힘을 정치로 돌리는 것이 막부로서는 두려웠다는 것이다. (146)
어쨌든 대정봉환에 따르는 신정부 수립 안을 사이고는 모두 받아들이고 본격적으로 나설 기세를 보여주었다. (259)
료마는 예의 새 관제안을 이와쿠라에게 제출하고, 이어서 신정부의 기본 방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그 자리에서 썼다. 8개 조목으로 되어 있었다.
제1의 천하의 인재를 초빙하여 고문으로 삼는다.
제2의 유능한 제후를 골라 써서 조정의 관작을 내리도록 하며 현재의 유명무실한 관위를 버린다.
제3의 양이론을 버리고 외국과의 교류를 의결한다.
제4의 법령을 정비하고, 새로이 무궁대전(헌법)을 제정한다.
제5의 상하의정소
제6의 육해군국
제7의 친병
제8의 일본의 오늘날 금은 물가를 외국의 평균에 맞춘다.
"과연, 이거야말로 귀한 말들인걸." 이와쿠라는 탄복해 마지않는 듯이 말하고, 이 두 통의 서류를 문갑에 간직했다. 뒷날 이 료마의 안은 거의 그대로 신정부 수립을 위한 기본 방침이 되었다. (263~264)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가 습격을 받은 날은 게이오 3년(1867년) 11월 15일 밤이었다. (292)
독서습관486_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그리고 료마의 사망_료마가 간다⑧_시바 료타로_2011_동서문화사(2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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