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장점은 시간과 공간과 넘어 타인의 삶의 흔적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는 대한민국에서 남성 중년으로 살고 있는 내게 젊은 여성의 입장이 되어보는 경험이었다.
저자의 의도 대로 불편했다. 나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대한 것이 늘 옳은 것이 아니었겠구나 깨닫게 되었다. 함께 사는 아내와 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남성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고민의 연장에서 질문하는 공간 인문학카페36.5˚를 열었다. 매일 쓰는 입간판, 소모임과 강연회, 독립출판물로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기본 값의 세계에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불편함을 해명해야 했던 내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묻게 된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맨스플레인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젊은 여자가 '감히'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지는 건 그 자체로 작은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13)
* 맨스플레인mansplain은 남자man과 설명하다explain을 결합한 단어로, 대체로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체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나는 세상의 어떤 도덕이나 규율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믿어요."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나는 당신을 믿는다. 당신의 존재를 믿는다. (33)
저자가 경험했던 부모의 이혼과 남자친구가 많았던 엄마의 삶의 단면,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성폭력과 성희롱 경험들, 남자 친구들과 동거하며 그들의 태도에서 느낀 감정,
임신을 통해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불편함과 불법 낙태수술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 낙태를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 결혼보다는 자유로운 비혼을 선호하는 삶의 태도 등을 보여준다.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단지 중고등학교 시절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타자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마주할 수 있는 계기였다. 고민을 담아 2013년에 인문학카페를 오픈했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며, 오히려 학교 밖에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는 걸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육의 위기'는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학교의 위기'일 뿐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70)
그는 몰랐다. 그가 손가락질하며 "저렇게 산다"고 비난했던 사람이 알코올중독자이었던 우리 엄마일 수 있다는 걸, 엄마가 만났던 일용직 노동자인 아저씨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일 수 있다는 걸 그는 몰랐다. 땀흘려 정직하게 일하고, 고된 노동 강도 때문에 술을 먹으며 아픈 몸을 푸는 어떤 세계를 그는 몰랐다. 세상에는 같은 노력으로도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103)
페미니즘이 뭔지 정의할 실력이 되지는 않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통해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연습이 모든 남성에게 필요하다. 아들과 딸에게 모두 권해줘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택시기사에게 카드를 내밀었을 때 여성의 경우 기사의 불평을 듣는 경우가 남자들에 비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연히 손님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부 기사들은 여자의 경우 현금을 내지 않으면 불평을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남녀가 모두 놀랐다고 하니 팩트로 판단된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겪은 부분에 한해서만 잘 느끼고 알 수 있을 뿐이고, 다른 상황은 분명 모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마땅히 그렇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다. (123)
외설적이고 자극적인 사건 속에서 '나쁜 놈'은 추악한 괴물로 그려지지만, 현실 속 그들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가장 빈번한 폭력과 착취는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게일 루빈의 지적은 정확하다. (126)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인상 깊었던 개념은 '노여움'이었다. 노여움은 주로 권력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인데, 남성이 자신의 뜻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여성에게 기본적으로 갖는 감정이 이와 같다고 했다. 네가 감히 나를 거부해, 나에게 토 달아, 나를 미워해, 나한테 뭐라고 해?(132~133)
어느 사회든 소수자의 입장, 권력을 갖지 못한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기회를 갖는 습관이 되어 있다면 선진국이다. 또한 돈이나 권력을 누릴 입장이 아니어도 사회적 관습이나 법에 의해 피해를 보고 있는 자들의 입장에서 이를 바로잡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선진시민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책을 읽고 페미니즘을 알고 성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태도를 보이길 바란다.
불법의 주체는 바로 여성의 몸이다. 함께 잠자리를 가진 남성의 몸은 불법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남성의 동의가 있어야 수술을 할 수 있다. 어떤 남자들은 그런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낙태하려는 여자를 협박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를 위한다니! '강간을 예방하기 위해, 도덕적인 섹스를 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을 위해' 낙태는 불법이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는 그 말들 속에 정작 나는 없다. (156)
임신중절수술을 진료 목적 외에 마약을 처방하거나 환자에게 성폭력을 행한 것과 같은 의료 범죄와 등치시켜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분류해 처벌하겠다는 정부를 보며, 누구를 위한 도덕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생력이 없고 아직 생명으로 볼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존재를 고려하는 도덕은 이처럼 공공연하게 얘기되지만, 원치 않은 임신으로 신체적 사회적 단절과 위험을 끌어안아야 하는 여성을 위한 도덕은 없다. (158)
택시를 탈 때 남녀가 느끼는 온도 차에 관한 글이 온라인상에서 화재가 됐다. 택시에서 카드로 요금을 지불할 때 택시기사에게 욕을 듣는 경우가 많아서 카드를 내밀 때마다 눈치 봐야 했다는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그런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에 남녀 모두가 놀랐다. (162)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면서 카페에 페미니즘 스터디를 하는 청년들이 종종 찾아온다. 그 가운데는 하나하나 사례의 답을 찾아가며 '진정한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사람도 많다.
입시 위주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정답이 있는 공부법이 몸에 배었기 때문일까? 페미니즘에 진정한 하나의 답은 없다. 나에게 페미니즘은 하나의 논리이기 전에, 살면서 겪어왔던 공포, 상처, 내 삶 전체와 밀접하게 닿아 있는 언어, 사상, 일상이다. 많은 여성, 사회적 소수자에게도 그럴 것이다. (164)
한 여성의 시간과 몸의 서사에 세상 곳곳의 폭력과 차별이 배어 있고, 그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불러낼 거라고.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사람들의 망설임이 눈에 보인다. 나 역시 그렇다. (181)
피해자를 수식하는 말이 무엇이든, 어떤 존재도 폭력을 당해선 안 된다. 그것만이 절대적 원칙이다. 또한 피해자에게 합리적 대처를 요구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기계적 잣대라는 걸 나는 안다. 데이트폭력은 낯선 남자에게 폭력을 당한 일이 아닌,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은밀하고 친밀한 폭력이다. (187)
독서습관488-①_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_홍승은_2018_동녘(211130)
■ 저자: 홍승은
내 경험을 말했을 뿐인데, 세상이 딸국질했다. 어느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노래하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 여성혐오 사회에서 나고 자라며 몸에 깊이 밴 자기부정을 극복하기 위해 숨지 않고 말하는 법을 연습하는 중이다. 인문학카페36.5˚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 살 방법을 궁리한다. 예술을 통해 각자의 언어를 찾는 일과 동물가족, 채식, 비혼 예술공동체에 관심 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여성신문>에 글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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