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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478]5년 만의 신혼여행_좌충우돌 보라카이 여행 에세이

by bandiburi 2021. 11. 21.

장강명이란 작가를 다른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댓글부대>와 이 책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빌려 그의 글 세계를 탐험했다. 유명대학의 공대를 졸업했지만 자신의 취향을 찾아 신문기자가 되고 결국에는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아내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도 전반부에 일부 소개되는데 현실적이다.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서 결혼을 하자마자 정관수술을 하고 아이 없이 부부의 삶을 살기로 한다. 동거를 먼저하고 혼인신고를 하되 간소한 결혼식을 기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의 생활을 하며 경제적으로 실용적인 길을 찾아 부부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 부모님이 특별히 나쁜 분들은 아니다. 사실 이건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이 공통으로 갖는 문제다. 자식들의 인생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 자식이 타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자식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정신적인 폭력을 서슴지 않는 것. 그리고 나는 그 부모들을 이해한다.

그런 폭력의 원인은 대부분 사랑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식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위험에 빠지는 광경을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안락한 감옥을 만들어 자식을 그 안에 가두고 싶어 한다. 과보호. (37)

 

두 사람의 일정을 맞춰 여행지를 탐색하던 중 보라카이로 결정하고 저렴하게 갈 수 있는 여행사 패키지를 선택한다. 출발 당일부터 비행기 연착으로 시작한다.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며 공항에 갔는데 연이은 기다림으로 피곤하게 필리핀으로 떠난다.

 

 

미친 짓거리는 온 사회 구성원이 거기에 협조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점점 더 강화될 뿐이다. 사교육이나 학벌 같은 문제가 그렇다. 언제나 더 똑똑하고 더 진보적인 다음 세대가 자신들의 앞 세대보다 더 미쳐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관습과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편견과 새로운 속박을 만들어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명문대와 똥통대'라는 기준을 세웠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기에 '인서울', '수도권', '지방대'라는 기준을 추가했다. 손자 손녀들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광명상가' 어쩌고 하는 긴 디테일을 만든다. (49)

 

 

이렇게 여행 에세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두 사람이 보라카이에서 숙소, 음식, 바다, 만남, 풍경 등을 보고 대화하며 느낀 감정을 글로 녹여냈다. 한국사회에 대한 솔직한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고 생각을 적으며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인용하는데 잘 어울린다. 여행지에 책을 가져가서 여유 있게 읽는 휴식이 독자에게 전해져서 좋았다.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의 정체다. (122~123)

 

인도에 주재원으로 있으며 남유럽으로 해외 가족여행을 몇 번 다녀왔다. 당시에는 9박 10일의 일정으로 정해진 시간 내에 많은 곳을 보기 위해 빡빡한 스케쥴을 짜서 움직였던 기억이다. 비행기 일정을 제외하면 결국 8일 안에 한 나라의 유명 관광지를 돌아보는 강행군이다. 이 사이에 책을 읽는다는 것을 낭비로 여겨졌다. 그나마 당시에 사진과 기록으로 일부 남겨둬서 아이들이 클라우드에 있는 과거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동물들의 침묵>에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소련을 방문한 서구 지식인들과 기자들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이 대공황을 겪던 시기에 소련을 방문한 저널리스트나 작가들은 대개 자본주의에 부정적이었다. 기자들은 소련을 찬미하는 글을 열심히 써서 송고했다. (180)

 

어쩌면 당시 기자 몇몇은 정말로 떠돌이 고아나 굶주린 농부나 비밀경찰이나 군인들의 총을 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소련 검열 당국이 보여준 번쩍번쩍한 공장 설비와 사치품 상점, 활기차 보이는 공사 현장, 멋진 구호가 적힌 현수막들에 눈이 멀어서 말이다. 내가 이곳에서 산호 해변과 파란 바다와 아름다운 노을에 눈이 멀어 있는 것처럼.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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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보라카이를 간접 여행한 기분을 가질 수 있고, 머릿속에 상상하며 두 부부의 여정을 따라가 보는 즐거움 그리고 책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겹쳐진다. 저자의 다음 책도 읽어봐야겠다. 

 

카톨릭 사제의 삶이 왜 고귀한가? 하느님이 그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인가? 신을 믿지 않는 나는, 사제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한 것은 사제들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지키기 어려운 구속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고, 사제 서품을 통해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사제복을 입고 자신이 선언자임을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때문이다. 허구와, 허구가 만들어 내는 구속을 받아들일 때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된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2 더하기 2는 4'다. (188)

 

나는 허구에 대해서 생각했다. 때로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때로는 삶의 의미라는 구실을 내세워 다가오는 허구들. 나는 그 허구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쉴 새 없이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 허구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다. 심지어 나는 그 일로 돈을 벌려 하고 있다. 허구는 익사에 대한 공포와 수면 위로 탈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며, 바닷물이자 산소통 그 자체다. 어떤 허구에는 다른 허구로 맞서고, 어떤 허구에는 타협하며, 어떤 허구는 이용하고, 어떤 허구에는 의존할 수밖에 없다. (237)

독서습관478_5년 만에 신혼여행_장강명_2016_한겨레출판(211121)


■ 저자 : 장강명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했다. 2011년 장편소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열광금지, 에바로드>로 수림문학상을, <댓글부대>로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았다. 장편소설 <호모도미난스>, <한국이 싫어서>, 연작 소설 <뤼미에르 피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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