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과정이었던 대학교 시절까지도 한국 현대사에 대해 진지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직업을 얻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나를 둘러싼 세상을 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의 실상을 보게 되고 왜 그런지 고민한다. 평온해 보이는 한국 사회에 눈에 보이지 않는 편 가르기가 있고, 차별이 있고, 돈과 권력에 취해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6월 항쟁 이후의 한국의 민주화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불평등에 유달리 민감했던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물 먹인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49)
이 모든 것들의 근본을 찾다 보면 한국 현대사로 귀결된다. 해방 이후 남쪽에서 미국의 관할 하에 진행된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기틀을 만드는 과정은 한반도 국민들의 이익이 아닌 미국의 입장에서 진행되었다. 반공과 반탁의 프레임 하에서 친일청산과 토지의 재분배가 없이 친일세력이 그대로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그들의 후손들이 언론, 교육, 사법, 정부 등에 포진하고 있다. 그래서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힘들게 한다.
모스크바 3상결정이 공식 발표된 이후에도 남쪽 대부분의 우익 언론들은 한국인의 임시정부 수립 이야기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신탁통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다.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우익인사들이 즉각 반탁운동에 나섰다. 신탁 통치가 "소련의 음모"라는 선입견 속에서 반탁운동은 반소 반공운동으로 이어졌다.(265)
그러나 미국은 일본 점령 통치 과정에서는 농지개혁, 재벌해체, 군국주의자 숙정 등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지만, 한국의 미군정은 이러한 개혁조치를 취하지 않았다.(278)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온전한 독립을 위해 내외적인 조건을 포괄적으로 고려하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신중히 논의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찬탁과 반탁 논란을 통해 상대방을 '민족 반역자' '반동분자'로 몰아가며 혈투를 벌이는 방향으로 갔다.(285)
권력을 쥔 사람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삶의 조건과 행동을 통제할 뿐만이 아니라 사회 여론, 사고와 관습까지도 쉽게 장악한다.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저항을 하거나, 권력의 치부가 드러나는 사건이 생겨 권력의 단단한 보호막에 작은 균열이 생겨도, 권력은 자신이 가진 다양한 힘을 활용해 쉽게 균열을 봉합해 간다.(43 페이지)
나라를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했던 사람들은 억압받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감수했다. 남아있는 가족들은 차별을 받고 상실의 고통을 마음속으로 삭이며 가난을 마주했다.
그러나 이때는 영호남 사이에 지역감정이나 지역대결 정치구도 같은 것은 없었다. 영남 사람이 전라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지역대결 정치구도는 군사정권 이후에나 등장한 것이다.(197)
사회 정의는 온데간데 없고, 돈 자랑, 권력 자랑이 앞섰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지배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안달하다 총탄에 사라졌다.
빈민들은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잘 보이지도 않고, 대변되지도 않았지만, 가장 밑바닥에서 엄청난 잠재적 폭발력을 보여준 집단이었다. 전두환 정부가 이들을 두려워할 만했다. 즉 삼청교육대 사업은 잠재적 저항세력을 길들이고, 이들을 장기적으로 격리시키고 고립시키며, 나아가 무력화하는 작업이기도 했던 것이다.(74)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빈민들에 대한 인권침해와 그들의 저항은 여전히 우리 현대사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민주항쟁의 두 중요 축이었던 학생과 빈민 사이에 존재하는 실재적, 인식적 격차가 민주화 이후에도 크게 좁혀지지 못했음을 잘 보여준다.(80)
군인이 지배자로 군림하던 시절에 호위 호식하던 자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후회보다는 일신의 편안함을 누리고 있다. 시골에서 함께 자랐던 언니와 누나, 그리고 여동생은 하나 둘 도시에서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돈벌이를 위해 떠났다. 그들의 노동환경은 생각하지 못하고 취업을 했느냐의 여부를 언급했다. 그런 여성 노동자들은 남자 형제들의 입신을 위해 희생했다.
나이 어린 미성년자이고, 단기간 고용되어 있고, 게다가 여자인,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사람들이었다. 경제개발에 나선 한국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이들의 값싼 노동력과 희생이 수출의 원동력이자 경제개발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87)
동일방직의 노동자들은 똥물 사건 이후 관련 기관을 방문하고, 관련 인사들에게 편지를 띄워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편지에서 노동자들은 "백억불 수출을 했어도 노동자의 생활은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똥을 먹어야 하고, 노동자만이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강요당하는 사회는" 부당하다고 개탄했다.(97)
그리고 부실한 노동환경하에서 차별을 받았다. 소개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인권을 향해 나아갈 때 남성 노동자들 마저도 차별을 조장하는 데 동참했을 정도로 인권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국가권력은 세밀하게 촉수를 뻗치고 있었고, 대단히 신경질적으로 동일방직 사태에 개입했다. 박정희 정부는 자율적인 민주노조가 공장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정권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라 생각했다.(100)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경제개발, 수출전선에 나선 한국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고 천대받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못 배웠고, 어렸으며, 가난했고, 촌뜨기였고, 게다가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갑자기 제대로 선거하는 법을 배워 노조를 장악했다. 국가권력, 회사, 섬유노조, 남성 노동자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이들을 탄압했다.(115)
현대사에 관한 책을 읽을 때면 미국이란 나라의 실체에 대해 조금 더 다가가게 된다. 푸에블로 사건은 처음 알게 된 사건이었지만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접근하는 북한과 미국의 방식과 의도를 이해하는 기회였다.
CIA가 주로 첩보 요원 등 인적 정보망을 활용해 정보를 수집한다면 NSA는 통신장비, 항공사진, 위성 등의 장치를 활용해 기술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이다.(121)
지금도 한국과 미국의 강경파들은 북한 체제의 급격한 붕괴 사태 같은 것을 기대하며 북한을 압박하는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주장한다. 북한을 굴복시키고 승리를 얻어내려고 한다. (151)
역사는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자들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다. 한국 현대사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그늘진 과정을 겪으면서 권력의 입맛에 맛게 국민들을 선동하고 학습시켜 왔다.
어떤 일이 벌어진 후에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경과하여 작성된 기록들은 이른바 원천적인 기록, 즉 사건 발생 후 아주 가까운 시점에서 작성된 기록을 바탕으로 그것을 선별하여 작성된다. 이러한 선택에 당연히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주변부 인물들의 기록은 어렵게 기록되어 있어도 선별되지 않는다.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중략) 그 결과를 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거나, 그러했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사실을 기록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활동은 부차화, 주변화시킨다.(202)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운동도 그런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이 된 군부정권이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전두환을 경험했다.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해야 했다. 왜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가난하고 극도로 불만스러운, 게다가 진급의 길이 꽉 막힌 젊은 영관급 장교들의 존재는 당시 한국 군대에 심각한 불안 요소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4월 혁명이라는 격변이 일어났으니 정군 운동이 발생하며 군대가 들썩이는 것은 당연했다.(159)
운 좋게 우리를 비껴간 역사의 우울한 사건들에 대해 다시 봐야 한다. 억울하게 피해를 보고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지내온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에게 국가는 사과와 위로를 줘야 한다. 우리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다수가 희생해야 하는 사회를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사회 경제적 평등의식을 높이고 격차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 가야겠다.
결국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변의 잠재력 역량이, 결코 엘리트에 비해 뒤지지 않는 다수의 역량이, 이 사회에서 발휘되지 못하거나, 발휘된다 하더라도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220)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라는 시대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근대는 엄청나게 빠른 물질적 진보를 과시한다. 19세기 이후 인류의 삶은 그 이전과 큰 차이가 난다. (223)
권력의 은폐와 무관심, 망각에 의해 파묻힌 과거의 처참한 비극의 진실을 자각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가족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성찰하고 연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우리는 그 죽음들을 방치하거나 묻어둘 수만은 없다. (249)
이 책 <민주주의 잔혹사>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내막을 자세히 모르는 사건들이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우리 역사의 장면들 8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과거를 되새기며 현재를 바로 보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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