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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377]소비의 사회_현대사회에 대한 신화와 구조 비판

by bandiburi 2021. 4. 15.

'소비'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이해하고 싶어 <소비의 사회 그 신화와 구조>를 읽었다. 현대는 생산 중심이 아니라 소비가 중심이 되는 사회다. 그래서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라고 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소비라는 것의 실체를 체계적으로 들여다보는 책이다.

하지만 상당히 어렵다. 도중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드는 책이다. 중간중간 이해가 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번역 과정에서 어려워진 것일까? 아니면 사색을 많이 하고 논리적인 사고가 습관화된 프랑스인들의 언어 습관일까? 글이 어려운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된다. 똑같은 말을 사용하더라도 문장 전체가 생소한 용어들이 연이어 나열되어 있다. 표현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겠거니 하며 넘어갔다. 후반으로 가도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어려운 책에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밑줄 긋고싶은 부분을 남긴다.

한번 시험 삼아
지상의 온갖 행복을
인간의 머리 위에다가 한꺼번에 퍼부어
행복 속에 풍덩 가라앉아버리게 하여,
그 행복의 표면에 물거품 같은 것이
꾸럭꾸럭 떠오르도록 해보라.
아니면, 인간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경제적 만족을 주어
실컷 잠이나 자고 꿀떡이나 먹고
세계사의 영속이나 걱정하는 따위의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처지에 놓아보라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중에서

자동차 사고 뉴스와 경쟁할 만한 것은 일기예보 뉴스뿐인데, 이 양자는 신화적인 한 쌍이기 때문이다.-태양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긴 이야기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34페이지)

개인 또는 집단의 '역기능적인' 소비가 '기능적인' 소비보다 더 빨리 증대되고 있기 때문에 체계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43)

현존하는 체계가 번영하고 있는 것은 그 은폐된 결함,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균형, 공해 등 합리적 체계에서 보면 악한 것 그 자체에 의한 것이다.(46)

당신이 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봐요.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겠습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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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우리 사회의 막대한 낭비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 희소성에 도전하고 풍요로움을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이 낭비이다.(52)

사실 '풍요로운 사회'도 '궁핍한 사회'도 여태까지 없었으며 또 현재도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사회라도 또 생산된 재화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부의 양이 어떻든지 간에 모든 사회는 구조적 과잉과 구조적 궁핍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66)

'불평등한' 사회질서, 즉 특권계급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가 자신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전략적인 요소로서 성장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67)

풍요로운 사회의 슬로건 및 민주주의의 선전포스터로 내세워지는 이 새로운 사회적 권리들의 출현은, 따라서 이 권리들과 연관된 요소들이 계급(또는 카스트)의 차이 표시 기호 및 특권의 지위로 이행하였다는 징후다.(76)

마찬가지로 지식과 교양은 그것을 여는 열쇠(정당하고 합리적이며 효과적인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암호)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보다 더 가혹하고 보다 교활한 문화적 격리의 계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지식과 교양을 단지 학습 및 지적 교육으로서가 아니라 보충적인 마나(mana)(초자연적인 힘), 즉 주술적인 힘의 저장 창고와 같은 것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78)

"소득의 증가 경향은 새로운 재화의 유통뿐만 아니라 동일한 재화의 질적 향상도 가져온다." "소득의 향상은 질의 점진적 개선을 이끈다." 항상 똑같은 명제가 은연중에 나타난다: "많이 벌면 벌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또 더 좋은 것을 원한다." - 이 명제는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개인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으로 타당하며, 누구나 안락한 생활의 합리적인 최적 조건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83)

욕구와 그 충족은 기호에 의한 거리와 차이화의 유지라는 절대적 원칙, 일종의 사회적 지상명령에 의해 아래쪽으로 흘러들어간다(trickling down). 바로 이 법칙이 사회적 차별을 만드는 욕구로서의 사물의 모든 혁신을 좌우한다(84)

직업상의 또는 문화적인 갈망보다 훨씬 더 큰 유연성을 나타내는 (물질적 또는 문화적인) 순수한 소비 갈망은 사실 어떤 계급에게는 사회 이동의 면에서 중대한 실패를 보상하는 것일 수 있다.(86)


그러나 우리 사회처럼 산업 집중과 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두드러지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사람들이 혼잡하게 생활하는 사회에서 차이화에 대한 요구는 물적 생산력보다 더 빨리 증대한다.(88)

산업집중이 항상 재화 생산 증대를 초래하는 바와 같이 도시로의 인구집중도 욕구의 무한한 융기를 가져온다. (89)

우리는 풍요의 기호만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생산기구를 통해, 빈곤과 희소성의 기호를 쫓아낸다. 그러나 살린스도 말한 바와 같이 빈곤은 재화의 양이 적은 데 있지 않으며, 또 단순히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도 있지 않다: 빈곤은 무엇보다도 인간들 간의 관계이다. (93)

이러한 욕구는 외관상 '자유재량적 소득' 및 선택의 자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생리적' 욕구와 다르며, 그러므로 마음대로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101)

사물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원망(바람)에는 목적이 없다.(111)

소비자, 즉 현대사회의 시민에게는 행복과 향유의 이 강제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강제는 새로운 윤리에서는 노동 및 생산의 전통적인 강제와 똑같은 것이다. 현대인은 노동을 통해 생산에 바치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지만, 자기 자신의 욕구와 안악의 끊임없는 생산 및 혁신에 바치는 시간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115)

소비사회, 그것은 또한 소비를 학습하는 사회, 소비에 대해 사회적 훈련을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생산력의 출현과 고도의 생산성을 갖는 경제체계의 독점적 재편성에 어울리는 사회화의 새롭고 특수한 양식이다.(117)

현재 행해지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소비에 대한 훈련은 사실 19세기 내내 행해진 농촌인구의 산업노동에의 대대적인 훈련의 20세기에서의 등가물이며 그 연장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118)

소비자는(오늘날에는 아마도 '생산' 수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수준에서도 역시 노동자로 필요되고 또 동원되고 있다.(123)

민중은 비조직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노동자이며, 대중과 여론은 소비에 만족하는 한 소비자이다.(126)

그러므로 자기를 타자와 구별하는 것은 바로 어느 한 모델과 일체가 되는 것, 어느 한 추상적 모델 및 어느 한 양식의 결합형태에 근거해서 자기를 특징짓는 것이며 따라서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실제적인 모든 차이와 특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특이성은 타자 및 세계와의 구체적인 대립관계에서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129)

옛날에는 별개였던 이 모든 것들이 오늘날에는 동일한 양식에 따라서 생산되며 또 동일한 방식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131)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자기도취는 독자성의 향유가 아니라 집단적 특성의 굴절된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최소한계차이를 통해 항상 자기 자신에의 자기도취적 열중의 형태로 나타난다.(141)

직업상의 지식, 사회적 자격, 개인의 경력에 관한 현대사회의 특징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는 재교육(recyclage)이다. 이 개념은 어느 누구도 좌천된다든지 밀려난다든지 쫓겨나지 않으려면 자신의 지식과 학식, 즉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실용적 지식'을 '시대 흐름에 맞도록 재충전해야 할' 필요성을 뜻한다. (153)

다시 말하지만 고상한 문화와 매스미디어 문화를 그 가치면에서 대립 대결시키는 것은 쓸데없고 어리석은 짓이다. 전자는 복잡한 통사론을 가지고 있는데, 후자는 항상 자극과 반응, 질문과 대답 등의 항으로 분해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의 조합이다.(162)

라디오의 뉴스 프로그램은 무질서한 잡탕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뉴스와 광고를 계획적으로 교대하면서 청취자에게 수신의 유일한 도식, 즉 소비의 도식을 강요한다.(195)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기술적인 동시에 '전설적인' 코드에 따라서 세분화되고 여과된 그리고 재해석된 세계의 실체다.(198)

"선전이 더 이상 '소박한 알림'이 아니라 '꾸며낸 뉴스'가 되었을 때, 현대광고가 탄생하였다."(그러므로 광고는 그 역시 '신화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 뉴스와 동질적인 것이 된다.(중략))(204)


독서습관377_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_소비의 사회_장 보드리야르_2016_문예출판사(2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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