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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독서습관166_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_동아일보사_1987(190830)

by bandiburi 2019. 8. 31.
지난 19년 6월 초에 책에 대한 소감을 올린 후 한 분기만에 다시 글을 올린다. 시골 고향집 리모델링 공사를 한다고 방문하고 신경을 쓰다 보니 주말에 조용히 책에 대한 되새김질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2권 정도가 서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사를 하면서 한 권은 처분을 하고 한 권만 남았다. 그래도 손길이 가지 않았는데 ebook으로만 보다 책으로 보고 싶어 읽게 되었다. 
 김성수란 사람이 고려대학교의 창립자이며 친일파라고 알고 있었지만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다만 동아일보를 설립한 사람에 대한 동아일보사의 평가이기에 긍정적인 부분만을 비췄을 거라서 다음에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쓴 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1891년에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55년 사망할 때까지 이 나라의 암울한 시기를 모두 거쳐간 인물 김성수다. 그의 인생의 절정기는 일제시대였기에 그 당시를 국내에서 방직회사를 만들고, 교육기관을 만들고, 언론사를 만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책에 의하면 민족의 중흥을 위한 김성수 나름의 활동이었다. 특히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음으로 양으로 주위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여유 있는 삶을 살았지만 자기 자신과 자녀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검소한 삶을 강조했다. 한 예가 춘원 이광수에 대한 일본 유학 비용 지원이다. 춘원이 나중에 친일로 돌아섰을 때 크게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 이승만이 미국에 의해 대통령으로 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정을 행할 때 이를 개탄하며 부통령이 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만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부통령을 해야 한다는 권유로 부통령 활동을 하다 결국 뇌출혈로 자리에 누워 55년에 사망하게 된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다스리고 한 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어야 한다는 신조, 그리고 공선사후라는 공을 우선시하는 삶의 태도 등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은 충분하다. 자신의 삶을 살기에 급급하지는 않은지, 자신의 정신적인 충만함을 위해 생각할 시간은 내고 있는지(스마트폰에 몰입해 지루해할 시간이 없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하 책에서 인용했다. 
 
 
117)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걸 들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도 경쟁이니 두각을 내려는 것은 인지본능이며 두각을 쉽게 내는 방법을 알켜 줄까? 남들이 모두 몰리는 유행학과를 전공허지 말아야 돼. 진리탐구를 하는 학문은 어떤 학문이든 똑 같은 셈이여. 지금의 유행 학과가 후엔 무실해지고 지금 유행하지 않는 학과가 인기를 얻을 지 모르는 일이거든? 학문에는 우열이 없으니께 남이 않는 것을 해보라 이말이여."
 
344) 선친께서는 아주 엄한 분이었다. 밖에 나가셔서는 농담도 잘 하시고 그러신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그저 호랑이 같은 분이었다. 자식들이 잘한 일이 있어도 대놓고 칭찬하시는 일 없고 의타심을 가지면 안 되고 '공선사후'란 말을 명심하라고 이르셨다. 학교를 나와 은행에 취직한 것도 모두 남의 월급을 받고 남의 회사에서 일해 봐야 독립심이 생긴다고 해서 갔던 것이고, 영국 유학을 떠날 때는 낭비하지 말고 검소하게 공부해야 한다고 신신 당부하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씀은, 
 "궁학생이 되어라"
하신 말이었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하는 학생을 고학생이라 하지만 스스로 학비를 벌지 않더라도 보내 주는 적은 학자금으로 고학생처럼 어렵게 지내라는 말씀이었으니 그게 '궁학생'이란 것이었다. 나의 영국 유학생활은 선친의 말씀대로 한 번도 넉넉하게 써보지 못한 '궁학생'의 생활이었다. - 아들 김상만
 
345) 어버님은 검소, 검약이 생활에 배어 있는 분이었다. 변소에 갔다가 불이라도 켜고 그냥 나오면 손수 가셔서 꼭 끄셨고, 해마다 정초가 되면 형님과 아우들을 모아 놓고 '금전 출납부'를 나누어 주셨다. 수입지출을 꼭 적어 용돈을 아끼라는 것이었다. 
 
379) (탄허스님은) ~ 돌연히 '메모지가 있느냐'고 하더니 단숨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주셨다. 옆에는 경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펜으로 종이 두 장에 10분도 안 되는 사이에 첫 장에는 큼직하게 '거민진시화중인'이라고 한자로 쓰더니, 다음 종이에는 이것을 풀이하는 자료로 장자의 '인간세'에 담긴 글을 써주신 것이다. 
 
381)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솔직하고 소박하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만나자 '값싼 호텔을 하나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뉴욕의 최고급 호텔에 묵더라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련만, 그는 값싼 호텔을 찾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는 조금도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웠다. 남의 이목이 두렵거나 또는 자신의 서민적 기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기색은 그에게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390) 오늘 날 사람은 너무나 사욕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앉으면 돈 모으기 혈안이고 권력유지에 온갖 방법을 다 사요하고 있다. '명지'가 없으니 사람을 신용할 수가 없고, 또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자기의 참 뜻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이 많다. 말하자면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표리가 부동한 사람이 많으니 진정한 붕우가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비해서 인촌은 담백하고 뜻이 밝고 분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인촌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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