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이 서울 생활을 접고 안성의 시골로 내려가 살았다는 얘기를 다른 곳에서 들었습니다. 최근에 최진석 교수의 노자에 대한 책을 읽은 뒤 장석주 시인이 시골에 내려가 노자를 깊이 있게 읽고 책도 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책을 주저 없이 골랐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의 내용을 원문과 해석을 각 장마다 실어두고 저자의 생각을 짤막하게 소개한 뒤에 바로 시골생활에서 느꼈던 감상들을 죽 편집해 놓은 책입니다. 도덕경의 내용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감상문 정도의 내용이 이어져 있습니다.
부모님이 현재도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기에 시골생활을 잘 아는 나로서는 도시인인 저자가 시골 생활을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해 적응해 가는 과정이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솔직하게 담아 놓은 내용은 장석주 시인에 대한 오해도 풀었습니다.
그가 이전에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큰 돈을 벌어 시골에도 별장처럼 집을 짓고 살았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글 속에는 여유롭지 않은, 때로는 금전적으로 궁핍하다는 인상마저 주었습니다. 최진석 교수의 노자를 접하고 연이어 읽는 도덕경이어서 원문에 대한 반복된 해석을 해보며 조금은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늘었습니다.
29) '집'은 거기 사는 이들의 인격을 반영합니다. 내 몸이 거친 집들을 떠올리는 것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이지요. 겉으로는 움직임이 전혀 없는 부동의 존재로 보이는 저 삶이라는 강물 속에, 쉼 없이 흐르는 물살이 숨어 있습니다. 몸이 새기고 있는 삶의 많은 기억들. 느림과 청빈, 단순함과 침묵. 시와 유구무언. 삶의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을 사랑하는 법, 작은 순간들을 다 쓰는 법에 대하여. 저와 함께 시간을 거슬러 가는 여행을 떠날까요?
45) 장 그르니에는 이렇게 씁니다. "어느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 길게 누워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하늘이 갑자기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허공 속에 삼켜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무에 대해서 처음으로 느낀 인상이었다." 나 역시 그르니에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덧없음', 혹은 공의 매혹을 얼마쯤은 알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겠지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의 밖에 내 삶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 산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빛과 그늘, 땅과 나무들의 냄새, 그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을 충만하게 끌어안는 것입니다.
53) 물은 따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낮은 곳으로 길을 내고 낮은 곳에 거처를 정합니다. 물은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스스로 침전 작용을 하며 맑아집니다. 물은 오로지 자연의 길을 따릅니다. 무사무욕의 길이지요. 물이 보여주는바 자연의 길을 따르며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무사무욕에 거하는 게 바로 도라고 합니다. 시집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는 '수졸재'의 물과 바람과 숲이 낳은 전작 시집입니다.
54) 우리는 특별히 다른 것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텔레비전이 없어서 아쉬운 적이 없었듯이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욕심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지켜갈 뿐입니다. - 엘모 스톨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 180쪽
많은 사람들이 기계문명의 삶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내면과 영성을 풍요롭게 만드는 새로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꿈꿉니다. 그들은 꿈만 꿀 뿐이이 선뜻 그걸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지요. 왜냐하면 그걸 실행에 옮기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고, 또한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57) 아미쉬 사람들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따르는 이 돈을 구심점에 두고 대규모 생산과 소비를 축으로 하는 기계문명의 환경파괴적인, 복잡하고 빠른 삶의 방식에 반기를 들고 그것과는 완전하게 다른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을 따릅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매우 건전하고 생산적인 대안적 생활양식을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94) 겨울 아침에 나는 북아메리카에 살았던 인디언의 지혜를 담은 책을 펼쳐 읽습니다. 이 책을 노자의 <도덕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과 함께 언제라도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머리맡에 둡니다. 이 책들은 옷깃을 단정하게 여미고 읽어야만 하는 책이지요. 그만큼 인식의 전환을 일으키게 만드는 궁극의 앎과 삶의 풍부한 지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책들은 나고 죽는 땅 위의 만물에 대한 일방적 지배 태도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정신을 일깨웁니다.
130) 노자는 마음이 텅 비어 갓난아기와 같은 마음이 되면, 맑고 밝아져 오묘한 도의 이치를 비추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일컬어지는 인도의 라마나 마하리쉬는 "마음이 끊임없이 그 자신을 규명해 들어가면 마음은 사라지고 진아만이 남는다. '나'라는 존재 자체만이 드러난다.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면 에고와 현상계가 되고 마음이 안으로 향하면 진아가 된다.(중략)"
152) 장 자크 루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가 약하면 약할수록 육체는 영혼에게 더 많은 명령을 한다. 그러나 육체가 강하면 강할수록 육체는 영혼에게 복종을 한다." 그러므로 육체는 엄격한 규율의 통제 아래에서 훈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편한 것에 길들여지면 몸이 태업을 합니다. 자꾸 편한 것만 찾게 되고 군살이 붙고 잦은 병치레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럴수록 몸은 약해지고 약해진 몸은 영혼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지요.
222)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1936년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자라난 평범한 사람. 대학을 1년 만에 중퇴하고 공군에 입대해 비행사가 되고 공군 조종사가 된 지 스무 달 만에 그만두었지요. 비행 잡지의 편집자가 되었지만 잡지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그도 그만두고 3달러씩 받고 관광객을 고물 비행기에 태워주는 일을 했습니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그런 시절이 지나갔습니다. 그가 노트에 제 꿈과 상상을 버무려 글을 하나 써냈습니다. 그런데 끝이 맘에 들지 않아 무려 8년 동안이나 마무리를 미루고 팽개쳐두었습니다. 막상 원고가 완성돼 출판사에 보냈더니 반송돼 왔습니다. 출판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지요. 오기가 생겨 계속 보냈습니다. 그렇게 열여덟 군데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원고,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책은 나왔지요.
235) 때로 지식은 쓰지 않고 쌓기만 하면 나중에 덫이 되고 닻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에 매이고 갇히게 되어 함께 망하는 것이지요. 지식은 쌓기 위함이 아니요 쓰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도는 쌓아도 그런 불상사가 생겨나는 법이 없습니다. 도는 매인 것도 풀고 갇힌 것에 자유를 줍니다. 왜냐하면 도는 자꾸만 내 안의 것을 덜어내 가니까요. 결국은 텅 비게 됩니다. 텅빔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241) 위빠싸나 수행자들은 불과 몇 미터의 거리를 아주 천천히 몇 시간에 걸쳐 걸어갑니다. 그들은 걷는 행위 그 자체 그 순간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어가는 것이지요. 그들은 순간 속에 파열하듯이 피어나는 삶이라는 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삶에 몰입하는 것이지요. 위빠싸나 수행자들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몸과 마음을 몰입합니다. 초발심도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일 테지요. 나도 그렇게 몰입하는 삶을 살았다면 과거에 대한 후회나 회한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밤 따위는 없었겠지요.
252) 일본에서 있었던 일인데, 아주 오래된 가옥을 허무니, 거기 벽과 벽 사이의 좁은 틈에 못에 찔린 도마뱀이 있었더랍니다. 벽에서 솟아나온 못에 몸뚱이가 박혀 옴쭉달싹도 못하는 이 도마뱀은 기적같이 살아 있었지요. 가만히 보니까 다른 도마뱀들이 이놈에게 먹이를 번갈아가며 물어주더라는 겁니다. 누구도 혼자이지 않은 존재는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혼자 살아가지는 않는 것이지요.
322) 전반생은 어두웠으나 후반생은 영명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몸추스르고 어금니 굳게 물고 마음 다잡아야 하겠지요. 삿된 생각 덜어내고 처음 마음에 세운 뜻을 가다듬어야 하겠지요. 남자가 후반의 생을 경영하며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덕담은 그 사람은 처음도 좋더니 끝까지 좋구나!라는 것이지요. 그도 안되면 그 사람 처음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구나! 그런 차선도 좋습니다.
338) 우리에게 우환이 있는 까닭은 우리 몸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몸이 없다면 어찌 우환이 따로 있겠습니까? 노자는 자기 몸을 천하로 여기라고 일렀는데, 그렇다면 내 몸을 위해 한 끼니를 먹는 것은 천하를 먹이고 살리는 일이겠지요.
346) 근대 대학교육의 이념, 혹은 목표의 하나가 그런 교양을 두루 갖춘 지식인의 양성이었습니다. 첨단화된 전자 문명의 물적 토대 위에서 모든 영역 간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정보와 기술의 상호 교환의 세계화가 현실화된 지금 시점에서 대학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적 전문인의 양성이 주요 목표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대개의 파시즘 독재국가들은 강압적으로, 이를테면 위협, 직장 박탈, 체포, 수감, 고문 등과 같은 방법으로 입 노동자의 입을 틀어막거나, 혹은 정부 산하조직에 고용하고 각종 친정부 프로젝트 참가, 연구비 지급 등의 명목으로 '돈과 자리'라는 미끼를 사용해 어용화해버려 자발적으로 입을 틀어막게 만듭니다. 그 의식이 자유롭지 않은 지식인이란 오래된 술이요, 갇힌 새입니다. 오래된 술은 삭으면 식초가 되고 갇힌 새는 성말라 삐쩍 야위어가며 애처로운 소리를 냅니다.
355) 슈마허 등 여럿이 쓰고 골디어 밴던브뤼크가 엮은 <자발적 가난>이란 책을 며칠째 손에 들고 다닙니다. 공허한 풍요의 황폐함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자발적 가난을 살고 싶다고 하지만 일정 부분 내 몸은 이미 문명화의 편리와 단맛에 중독되어 있지요. 슈마허는 말합니다. "필요를 확장시키고 키우는 것은 지혜를 죽이는 지름길이다."
373) 하늘은 사사로움이 없으니 생명과 우주의 균형을 맞춥니다. 오직 사람만이 사욕을 품고 사는 까닭에 높은 것을 더 높게, 낮은 것을 더 낮게, 많은 것을 더 많게, 모자라는 것은 더 모자라게 만듭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사욕을 추구하는 까닭에 불편부당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높으면 위태로워지고 많이 쌓으면 잃기 쉽습니다.
375) 무릇 의로움이란 노동으로 생계를 세워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며, 땅 위의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을 이롭게 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지요.
376) <추억의 속도>라는 제목이 붙은 조촐한 책이 그것입니다. 그 책의 한 면에 이렇게 썼지요. "나는 욕구불만과 분노와 누추와 잔망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적빈의 날들과 깊은 잠과 고요, 그리고 평화를 얻었다. 내게는 이곳이 도원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무릉이다. 단 한 번밖에 갈 수 없는, 그리고 되물릴 수 없는 삶이 저기 있다." 내 심령은 이곳에 내려온 뒤 일급수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버들치보다 더 씩씩해졌습니다.
377) 시골에 와서 살며 가장 좋은 일은 흙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지요. 흙이 좋습니다. (중략) 흙에서 멀어지는 것은 곧 자연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을 불러오고, 환자를 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골프 스윙이나 복습하는 구질구질한 의사 얼굴을 보는 일이 잦아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378) 저는 슬로비Slobbie임을 기꺼워합니다. 속도에 저항하며, 느림의 삶을 살고 싶지요. (중략) 게으름을 피우는 그 시간이 제겐 성숙과 우화의 시간이라고 굳이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시간을 돈이라고 떠들며 전자계산기를 두드려대는 그들이 알아듣겠습니까?
379) 그럼프스Grumps는 제가 일궈야 할 청결한 도덕입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럼프 스는 "Green(녹색), Responsible(책임감 있는), Unassuming(욕망을 줄이고), Moderate(절제하며), Poverty Seeking(청빈을 추구하는)" 영어단어들의 첫 자를 따 만든 새로운 개념어입니다.
390) 참새 떼에게 독수리처럼 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어느 날 참새 떼 속에서 느닷없이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것이지요. 나는 그대들에게 독수리가 되어 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니 그대들은 내 심장의 피를 쪼아 먹고 독수리가 되어 날아야 하는 것이다. 그건 아주 장엄한 일에 속하지요.
397) 제가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건 교실에서 배우는 그것들이 행복하게 사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었지요. 물론 저는 인생이란 계단에 주단이 깔려 있지 않다라는 사실 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햇빛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명랑한 생을 살 권리가 있었지요. 하지만 아무도 제 속의 모차르트나 행복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지요.
399) 후회는 없습니다.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후반까지 빛나는 시기를 바친 출판 일은 제 삶의 폭을 한껏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인생은 늘 해본 일 때문보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더 많은 후회를 하는 법이지요.
저자 : 장석주 시인
1955년 정월에 충남 논산에서 인동 장씨인 아버지와 광산 김씨인 어머니의 오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열 살 때까지 부모와 떨어져 외조모 밑에서 자라다가 서울로 올라와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다.
한때 그림에 뜻을 두었으나 꿈을 접고 이십대 초반을 시립도서관과 음악감상실 등지에서 책읽기와 음악을 벗삼으며 떠돌다가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에 시 <심야>가 당선하면서 문단에 나온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가 당선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존재와 초월>이 입선하면서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에 나선다.
책 만드는 일이 꿈이었는데, 고려원 편집장을 거친 뒤 청하를 열고 1993년까지 편집발행인으로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함으로 그 꿈을 이룬다. 계간 현대사세계와 현대예술비평을 펴내며 기획과 편집을 주관하고 1996년에는 월간지와 단행본을 펴내는 한문화의 대표를 지낸다. 월간 현대시와 계간 시인세계의 편집위원을 맡아 하며 신문과 잡지 등에 다양한 글을 쓴다.
라디오 교양프로그램에서 책을 소개하고 비평하는 일을 이어오고, 2002년에는 조선일보 이달의 책 선정위원, 2003년에는 MBC 행복한 책읽기의 자문위원에 위촉되어 활동한다. 월간 MBC가이드, 출판저널 등에 북리뷰를 쓰고 월간 신동아와 카비전에는 지금도 북리뷰를 기고한다. 동덕여대 인문학부 문예창작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소설창작과 소설이론에 대한 강의를 시작으로, 명지전문대와 경희사이버대학에서 시창작연구와 문예편집론 등을 강의한다 (2005년 책 출판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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