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신간 코너를 훑어보던 중 '독서'란 용어가 돋보여 살짝 저자 소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공부방 '책 주산실'에서 쓰고 있다는 부분과 한문학자라는 것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언젠가는 조용한 곳에 나만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삶의 단상을 기록하며 살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기에 어떤 내용의 글을 써놓았을까 궁금했습니다.
또한 한문학자는 무엇을 하며 먹고살까라는 호기심도 동했지요. 그리고 목차를 봤는데 세세한 제목들이 저자의 생각을 알기에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루틴한 삶 속에서는 접하기 힘든 세상을 알게 된 뿌듯한 포만감입니다. 읽기 어려운 고문서를 주로 다루는 분답게 고문서의 세상으로 안내하며 역사의 이곳저곳을 다녀왔습니다. 짧은 주말을 이용해 해외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랄까요.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부분들입니다.
26) 조선시대의 일기를 읽으면 오늘날의 일기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조선시대 일기에는 개인의 내면 고백이 없다. 내면 고백은 근대의 산물일 것이다. 그 최초의 예는 윤치호(1865-1945)의 <윤치호 일기>가 아닐까? 1883년부터 1906년, 1916년부터 1943년까지 쓴 방대한 이 일기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료가 됨은 물론이다. 원래 한문과 국문으로 쓰던 일기는 1889년 12월부터는 영어로 쓰인다. 영어가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39)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도 있고, 또 이미 빌려도 보았지만 꼭 가지고 싶은 책이 있다. 예컨대 E.H. 카의 <반역아 미하일 바쿠닌>(종로서적, 1989)이 그런 경우다. (중략) 연전에 <미하일 바쿠닌>(이태규 옮김, 이매진, 2012)이란 제목으로 새 번역본이 나왔다. 활자도 크고 편집도 좋아 읽기가 훨씬 편하다.
45) 금속활자의 나라 조선에는 희한하게도 책을 만들어 파는 출판사가 아예 없었고, 서점도 19세기나 되어서야 출현했다. 위의 책시란 것 역시 19세기의 것일 터이다. 사정이 이랬으니 책을 사기를 원하는 사람도 개인이고 팔기를 원하는 사람도 개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양자 사이에서 중개를 하는 사람을 책쾌라고 한다. 책거간이란 뜻이다.
50) 집 가까이 작은 구립도서관이 생겼다. 건물이 무척 예뻐 호감이 간다. 옆에는 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을 따라 산책로가 나 있다. 약수터에 갈 때 그곳을 지난다. 그 도서관을 보며 정년 이후를 꿈꾼다. 그래, 정년이 되면 저기서 시간을 보내야지. 약수터에 갔다온 뒤 아침을 먹고 저곳으로 출근해야지. 부러워하기만 하고 읽지 못한 책들, 이름만 듣고 들추어보지 못한 책들, 술렁술렁 읽어 미안한 마음이 든 책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보리라. <논어>와 <좌씨전>을, 두보의 시를, 플라톤의 <국가>와 마르크스의 <자본>을, <성서>와 <코란>을 읽어보리라. 다시 읽기도 하고, 새로 읽기도 하고, 천천히 읽기도 하고, 입으로 외며 읽기도 할 것이다. 읽다가 존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고, 당장 갚아야 할 글빚도 없으니, 시간은 온전이 나의 편일 것이다.
67) 누구라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실록>의 번역문과 원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실록>뿐인가?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도 <실록>과 함께 읽을 수 있다. 요즘에는 만화로 그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까지 있으니, <실록> 보기는 이래저래 편해진 것이다.
69) 이희재 선생이 그린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J.M. 데 바스콘셀로스의 소설 원작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제제와 뽀르뚜가의 형상은 이희재 선생의 붓끝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94년 이 책을 사서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에게 읽으라고 주었다. 며칠 뒤 아이와 함께 어딜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아이가 그 책을 꺼내 읽으며 '아빠, 이 책은 재미있는데, 읽으면 이상하게 절로 눈물이 나요"라고 했다.
70)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서 가장 묵직했던 것은 조 사코의 작품이다. 그의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은 이스라엘의 억압과 학살에 의해 일그러지고 분쇄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 좌절의 삶, 기억을 그리고 불러내고 있다. <안전지대 고라즈데>보다 보스니아 내전을 생생히 전하고 있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최근에 번역된 <저널리즘>에서 그가 전한 인도 쿠시나가르의 불평등한 신분제, 가난에 몰려 죽음 직전에 있는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은, 명상과 신비로 왜곡된 인도의 대척점에 있는 인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르포와 만화가 어우러진 <파멸의 시대 저항의 시대>처럼 미국 자본주의의 황폐함을 고발한 책도 없을 것이다.
아,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말하면서 우리나라 작가 원혜진의 <아! 팔레스타인>을 말하지 않는다면 실례가 될 터이다. 이 책으로 우리도 좁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얻었다.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에스파냐의 아나키즘과 에스파냐 내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아나키스트 안토니오!
71) 체르노빌의 사고를 다룬 <체르노빌>은 어떤가. 이 책만큼 체르노빌의 비극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책이 있을까? <맛의 달인>의 작가 카리야 테츠가 쓰가 슈가 사토가 그릴 <일본인과 천황>은 일본 천황제의 역사와 허구성, 천황제가 일본인을 지배하고 있는 현재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81) 프랭클린의 <자서전>은 서문당의 문고본으로 읽었다. 1970년대 서문당의 문고본은 꽤나 좋았다. <수호지>도, <마농 레스코>도 이 문고본으로 읽었다. 값이 저렴하여 고등학생 신분으로도 구입할 수 있었다.
83) 교과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교과서를 읽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터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국가권력을 배후에 두고 있다. 곧 교과서는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강제로 주입되는 책이다. 우리는 교육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선하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교육이 곧 사회적 성공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던 사회, 또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회적 특권에 속했던 전근대 사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한글을 모르던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친 뒤 감격하는 모습을 전하며 배우는 것이야말로 '해방'과 '자유'임을 설파하기도 한다. 이것이 교육의 순수한 본래적 의의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국가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에서 본래적 의의는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교육은 개인의 대뇌를 열고 교과서를 수셔 박는 행위이고, 학교는 그 행위가 강제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늘 은폐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교과서를 말로 되풀이하는 권위적 도구가 교사이며, 교과서를 확장한 것이 참고서이며, 교과서가 개인의 대뇌에 제대로 장착되어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 시험이다. 그 시험의 과정은 초,중,고등학교 12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도 그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느냐고 덤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교과서만이 알고 있는지 강제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수능시험은 결국 교과서에 근원을 둔 지식들이 머릿속에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를 점검하여 점수를 매기는 과정이고, 사회는 그 점수로 개인의 사회적 서열을 정한다. 그 주홍색 서열이 이마에 한 번 찍히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카스트의 기호가 된다.
84)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교과서에 의해 의식화되면서 한국인으로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것이다. 범위를 넓혀보면, 한국인과 중국인, 미국인, 북한인은 그렇게 해서 각각 만들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국가의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은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개인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국가에 충성하는 개체를 만드는 것이다. 또 교과서를 가장 충실히 대뇌에 복제한 사람, 이른바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우수한 인재들 중 일부는 그 교과서를 개량하여 보다 강력한 교과서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과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책이다.
89) 신통한 답은 아니지만 아는 대로 조금 주워섬기자 이내 '다산평전' 같은 책은 없냐고 물었다. 지금 같으면 박석무 선생이 쓴 <다산 정약용 평전>을 소개했을 터인데, 그때는 이 책이 나오기 한참 전이었다.
89) 평전을 읽는 일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 읽은 평전은 철학자 피터 싱어가 쓴 헨리 스피라의 평전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인데, 동물 운동가 헨리 스피라의 생애를 통해 동물권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얻게 되어 엄청나게 고마웠다. 거슬러 올라가면 평전을 읽고 공부가 된 적이 적지 않다.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막스 갈로의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평전 3부작을 읽고 비로소 혁명의 시대를 희미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트로츠키의 숙적 스탈린 평전도 러시아 혁명과 전체주의 체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요긴했다.
92) 나와 같은 과 교수로 있는 정출헌 교수는 평전과 연보에 관심이 많다. 정 교수는 점필재연구소 소장이기도 한데, 이 연구소에서 '연보와 평전'이란 제목으로 작은 잡지를 낸다. (이완용 평전 등 몇 종의 평전을 내기도 했다). 나 역시 거기에 몇 차례 원고를 싣기도 했는데, 이 잡지가 평판이 아주 괜찮다. 광고도 없고 모조리 읽을 만한 글로 채워졌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것인가!
101) 도서관에 가보면 조용하기 짝이 없다. (중략) 책을 읽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눈동자로만 책의 언어를 흡수하는 것이다. 이건 책 읽기의 반쪽이다. 책은 원래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물론 모든 책이 소리 내어 읽기, 곧 성독의 대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랜 시간 숱한 사람들이 빼어난 것으로 인정한 글이나 책이 있다. 그런 글과 책은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글과 책은 오감을 통해 우리 몸에 천천히 스며든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 자신이 된다. 이게 책을 온전히 읽는 방법이 아닐까?
113) 그 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다 그 첫머리에 나오는 파리 시장의 치밀하기 짝이 없는 묘사를 보고, 과연 오늘날 우리가 조선시대 서울을 그토록 정밀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다시 '서울 사전'을 떠올렸지만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대신 이래저래 모은 자료에 주해를 붙여 2010년 <사라진 서울>이란 책으로 묶었다. 앞으로 내 평생에 다시 서울 사전을 펴낸다는 꿈은 꾸지 못할 것이다.
114) 사이먼 윈체스터의 소설 <교수와 광인>은 정신병으로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갇혀 있던 윌리엄 마이너가 제임스 머리 경이 요구하는 어휘의 용례를 찾아 저 유명한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제작에 열정적으로 협력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28) 빌려주는 사람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이덕무는 "남에게 책을 빌려주어 뜻하는 사업을 성장케 하는 것은 남에게 재물을 주어 그 곤궁을 구제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책을 많이 빌려 본 사람이라 그런지 책을 빌려주어 한 사람의 지적 성장을 돕는 것은 재물을 주어 곤궁을 구제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빌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빌려주는 것이 책 가진 자의 도리가 된다.
135) 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는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음주기로 꼽힌다. 두 책을 읽으면 '낭만적 음주'의 절정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문주반생기>의 자존자대, 곧 허풍은 도리어 얼마나 진솔한가. 두 사람은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뒷날 행로는 아주 달랐다. 변영로는 시인으로, 언론인으로 살았지만, 양주동은 국어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국어학자 양주동은 여러 저작을 남겼지만 향가를 연구한 <고가연구>를 제외하면 모두 자장귀 같은 것이다.
136) 무리한 공부로 폐렴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완성한 <고가연구>는 민족적 자존심을 살려준 것은 물론이고, 향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폭발시킨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고문헌을 독파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책의 서두에는 방대한 문헌이 열거되어 있다. 이 책들은 당시로서는 희귀한 고서들이었다.
156) 젊은 날 공부하는 친구들과 벌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가 사라진 책에 미쳤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책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책은 존재했으되 존재하지 않았던 책이다. 정작 사람을 더 애달프게 하는 것은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책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수도원에만 비장되어 있는 그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 편을 둘러싸고 얼마나 흥미진진한 사건이 벌어졌던가.
218) 논문집이 늘어나는 것만큼 논문집을 소중하게 여기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공부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학회는 늘어나고 또 논문집도 늘어나니, 거기에 실리는 논문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쓰레기 같은 논문을 써서 이곳에 투고했다가 떨어지면 저곳에 투고하기도 한다. 학회 쪽에서는 논문이 모이지 않으니 투고 기한을 연장해가면서 받는다. 논문의 편수로 모든 것을 평가하니 견실하게 공부하는 분위기는 사라지고 어설픈 논문을 삼류 논문집에 여러 편 싣고 높은 평가를 받아 돈을 더 받고 이런저런 자리를 꿰차는 경우도 허다하다. 도무지 옥석을 가릴 수가 없다. 논문의 편수로 연구 업적을 평가할 수 없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문제를 다 알고 있으면서 그 누구도 나서서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학문은 자연스레 멸종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238) 어느 날 이만수(1752~1820)의 문집인 <극옹집>을 훑어보고 있는데, <음정축서>란 글이 있었다. 읽어보니 1809년 이만수 집안의 겸인들이 모여서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신 것을 기념하여 만든 시축, 곧 <음정축>에 붙인 이만수의 서문이었다. 축은 두루마리를 뜻한다. 모여서 시를 지으면 그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든 것이 축이다.
244) 요즘 말끝마다 문화 콘텐츠니 콘텐츠 사업이니 하는데, 정작 그 결과물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만, 실상 많은 사업은 그냥 돈 나눠 먹기 경연장 같다. 엉뚱한 곳에 나라 예산 퍼붓지 말고 남아 있는 고문서나 한 곳에 모아 분류하고 스캔해서 인터넷에 올려주면 좋겠다. 누구라고 볼 수 있게 말이다. 그런 작업이 선행되어야 좋은 문화 콘텐츠가 개발될 것이 아닌가.
263) 김천택(1680~?)이란 인물이 있다. <청구영언>이란 시조집을 엮은 사람이다. 원래 시조는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곧 노래 가사다.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고려 말 인물이 작가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대개 고려 말에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원래 노래인 데다가 표기 수단이 없으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그걸 1728년 김천택이란 사람이 모아서 <청구영언>이란 책, 곧 노래 가사집을 엮었다.
■ 저자 : 강명관
강명관은 공부를 직업으로 택했고 취미 또한 독서이기에 평생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주로 공부방 책주산실에서 읽고 쓰는 일을 하며, 시간이 날 때는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책을 뒤적이곤 한다. 그렇게 학자이자 애서가로서 한 권 두 권 사 모은 책은 대단한 희귀본이나 귀중본은 아니지만, 늘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는 동무가 되어주었다. 이 책에는 그들이 들려준 심심하고 소소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있다. 2008년 제8회 지훈국학상, 2010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간행물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조선의 뒷골목 풍경>, <공안파와 조선 후기 한문학>, <농암잡지평석>,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열녀의 탄생>,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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