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철학자 강신주는 196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상상마당 등에서 철학을 강의하며,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으로 있다. 저서로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망각과 자유> 등이 있다.
■ 소감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또렷하게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상'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게 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매 장마다 두 명씩 서로 설명하는 형식도 철학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싶지만 아래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며 한 번 이상 더 읽어 봐야 그 맛을 음미할 수 있겠습니다.
■ 목차
1. 무의식의 트라우마를 찾아서 (이상 vs 짐멜)
2. 화려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보들레르 vs 벤야민)
3. 매트릭스는 우리 내면에 있다. (투르니에 vs 부르디외)
4. 건강한 노동을 선물하기 (유하 vs 보드리야르)
■ 인용하고 싶은 부분
17) 마르크스는 셰익스피어를 매우 칭찬했습니다. 이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야말로 화폐의 본질을 가장 잘 파악한 인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마르크스의 초기작 <경제학-철학 수고>(1844)를 보면 셰익스피어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길게 인용되어 있습니다.
금? 귀중하고 반짝거리는 순금? 아니, 신들이여!
헛되이 내가 그것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라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네.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비천한 것을 고귀하게 만든다네.
이것은 사제를 제단으로부터.... 유혹한다네.
반쯤 회복된 병자에게서 베개를 빼내 버린다네.
그렇다네, 이 황색의 노예는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하네.
성스러운 끈을.
저주받은 자에게 축복을 내리네.
문둥병을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고, 도둑을 영광스런 자리에 앉힌다네.
그리고 도둑에게 작위와 궤배와 권세를 부여한다네.
원로원 회의에서.
이것은 늙어 빠진 과부에게 청혼자를 데리고 온다네.
양로원에서 상처로 인해 심하게 곪고 있던 그 과부가,
메스꺼움을 떨쳐버리고, 향수를 발라 젊어져
오월의 청춘이 되어 청혼한 남자에게 간다네.
<아테네의 티몬(Timon of Athens)>(제4막 제3장)
35) <날개>라는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과 그의 아내 사이에 사실 사랑과 같은 남녀 사이의 애틋한 감정이 전혀 도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직 돈과 상품의 교환만이 두 사람 사이에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질 뿐입니다. 이 때문에 유학적 사고에 기반을 둔 기존 부부 윤리도 마치 돈으로 살 수 있는 일종의 상품처럼 다루어질 수 있었지요. <날개>를 썼던 이상의 독특함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그는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도래한 자본주의의 핵심을 '돈'의 논리를 통해 찾는 데 최초로 성공했던 작가입니다.
39) 먼저 화폐경제가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생각해봅시다. 인간과 사물 사이에 돈이 개입되자, 이제 사물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합니다. 과거 화폐경제가 발달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 썼지요. 따라서 자신이 만든 것은 자기 소유였습니다. 이 경우 개인과 소유는 직접적인 관계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화폐경제가 발달하면 개인은 남이 만든 물건을 돈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노동자로서 개인들은 특수한 세부 공정에만 몰두하게 되므로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일일이 만들어 쓸 여유가 없습니다. 이제 노동자로서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은 남이 돈을 주고 사고, 반대로 남이 만든 상품은 자신이 돈을 주고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지요. 개인은 돈의 매개를 통해서만 원하는 물건을 하나의 상품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짐멜이 '화폐경제는 개인과 소유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매개된 관계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이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기도록 만든다"라고 지적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41) 외젠 앗제, 스트라스부르가, 파리, 1912
수수한 잡화상이 말끔한 쇼윈도로 탈바꿈하는 근대 공간을 포착한 앗제의 사진에서는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먹먹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화폐경제는 우리가 타인이나 사물과 맺는 직접적 관계를 돈이 매개하는 거래 관계로 바꾸어 놓았지요.
짐멜은 일찍이 화폐가 가져온 이러한 비인격적 거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런 조건에서 비로소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이라는 영역이 확보되었음에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확보된 근대의 "고유한 자아" 공간은 화폐경제 안에서 얼마나 안전한지요.
47) 청년 마르크스는 돈이 가진 신적인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했습니다.
나는 추하다. 그렇지만 나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자를 사들일 수 있다.... 나는 절름발이다. 그렇지만 화폐는 나에게 24개의 다리를 만들어준다. 따라서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다. 나는 사악하고 비열하고 비양심적이고 똑똑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화폐는 존경받으며 따라서 화폐의 소유자 또한 존경받는다. 화폐는 지고의 선이며 따라서 그 소유자도 선하게 된다.... 인간의 속마음이 동경하는 모든 것을 화폐를 통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란 사람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갖춘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나의 화폐는 나의 모든 무능력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52) 마르크스의 이야기를 음미하기 위해서 우리는 화폐경제가 함축한 치명적인 역설 한 가지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과의 관계에 집중하면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역으로 타인과의 관계에 집중하면 우리는 돈과의 관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돈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타인과의 인간적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54) 가령 구두쇠는 왜 구두쇠가 될 수밖에 없을까요? 10만 원을 벌었을 때 구두쇠는 그것으로 상품을 사지 않습니다. 오히려 10만 원을 은행에 넣고 그에 해당되는 상품들을 살 수 있는 꿈을 꾸지요. 구두쇠에게 은행이 교회라면, 10만 원은 자본주의라는 신에게 바치는 기도인 셈입니다. (중략)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fetishism)란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64) 1910년 12월 한일합방 직후 발행된 한국은행권
모던 보이와 걸이 활보하는 경성에서, 화폐는 불과 한 세기 전 생필품 교환을 매개하던 차원을 훌쩍 넘어섭니다. 규칙적 노동을 바탕으로 의식주를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화폐의 축적 자체가 삶의 조건이 되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이 급속히 확산되지요. 하지만 낙후한 경제 조건 위에서 커져만 가는 물질에 대한 욕구는 당대의 비판처럼 "황금 부족증 히스테리"를 낳을 뿐이었습니다.
68) 오! 차라투스트라여, 여기는 대도시이다. 여기에는 당신이 찾을 곳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모두가 길을 잃을 것들뿐이다. 그대는 왜 이 진흙탕을 걸어가려고 하는가? 그대의 발을 동정하라! 차라리 이 성문에 침을 뱉고 돌아서라! 은둔자가 사색하기에는 지옥이다. 여기서는 위대한 사상들이 산 채로 삶아져 잘게 요리된다. 당신은 이미 정신의 도살장과 요릿집 냄새를 맡지 않는가? 이 도시는 도살된 정신의 냄새로 자욱하지 않은가?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81) 인간은 자극과 반응의 존재라는 짐멜의 통찰을 염두에 둔다면, 시골에서 우리는 아주 작은 자극에도 충분히 반응할 여유가 생깁니다. 너무 많거나 혹은 지나친 자극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시골 사람들은 이웃에서 돼지나 송아지 새끼를 낳거나, 옆집에서 밤사이에 일어난 부부싸움 같은 매우 사소한 일에도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도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요? 무수히 많은 그리고 자극적인 인상들에 하나하나 반응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미쳐버리겠지요. 복잡한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 우리가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에 대해 일일이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시골이나 소도시 사람은 정서적인 반면 대도시 사람은 지적일 수밖에 없다는 짐멜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82) 윌렘 드 쿠닝, <고담뉴스>, 1955
드 쿠닝이 화폭에 담은, 고담이라고도 불리는 도시 뉴욕의 이미지입니다. 그의 그림은 종종 양면적으로 해석되는데, <고담 뉴스>에도 넘쳐나는 기운 안에서 아찔한 자극에 경탄하는 예술가의 영감 그리고 거대한 도시 공간 속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소시민의 고단함이 뒤엉켜 있는 듯합니다.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의 심리 상태가 "신경과민"일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근대와 현대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지요.
93) '이동의 자유라든가 편견이나 고루함의 제거'라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는 결국 타인과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행동 원칙만을 부여해줄 뿐이지요. 그런데 이 같은 소극적 자유에는 우리가 타인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적극적 표현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짐멜은 "자유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특수성과 비교 불가능성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표출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강조했지요.
95) 니체에게 모든 개인은 타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단독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본성'이나 '본능'이란 표현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니체가 말한 '본성'이나 '본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진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마다 가진 고유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볼 때 이런 개인의 고유한 본성과 욕망을 부정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 자체를 범죄적으로 매도하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가 칸트의 양적 개인주의에 대해 본성을 거역하는 도덕, 즉 반자연적 도덕이라고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97) 짐멜의 논의를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 그러니까 대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은 '공동체주의'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산업자본주의와 대도시가 점차 발달하자 사람들은 비로소 '양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상호 불간섭으로 규정되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고, 이에 따라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단독성(singularity)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이전 시대보다 더욱 강해집니다. 짐멜은 이것이 바로 '질적 개인주의'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특이성 혹은 질적 고유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은 사실 도시적 삶이 가져다주는 고독을 극복하려는 데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99) 현대 도시인들은 다양한 방식의 소비 행위들, 예를 들어 값비싼 오페라를 감상한다든가, 명품 의류를 입고 다닌다거나, 아니면 골프장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식의 화려한 소비로 자신들의 고유성을 드러냅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부르디외나 보드리야르의 논의를 통해 살펴보겠지만, 전자본주의 시대든 자본주의 시대든 인간에게는 특이한 허영심, 즉 '구별짓기(distinction)'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짐멜이 대도시의 삶에서 보았던 '질적 개인주의'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 지으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그것을 이용한 산업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논리가 결합된 현상인 셈입니다.
101) 게오르그 그로스의 <카페 풍경> 1914
112)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 문학은 특정한 귀족들이라는 제한된 독자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글을 업으로 삼는 작가들은 자신을 후원하고 지지하는 소수의 귀족층 독자들이 어떤 글을 좋아할지 어렵지 않게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대도시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귀족들의 후원은 이제 더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르주아들로 대표되는 도시인들이 귀족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던 것입니다. 이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신문에 실린 글이나 출판사를 통해서 출판된 책을 구매해주지 않는다면, 문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상이 살았던 경성이란 소비도시에서도 문학은 이제 하나의 상품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119) 그런데 산업자본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삶에 필요한 상품만을 구매하면, 잉여가치를 얻겠다는 산업자본의 끝없는 욕망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산업자본은 필요 이상으로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만 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 '새로운 상품'이 아케이드에 들어오면, 기존 상품들은 '낡은 상품'이 되어버리고 결국 아케이드에서 추방되고 말지요. 바로 여기서 '유행(fashion)'이 가능해졌습니다.
127) 지금 벤야민은 다시 묻습니다. 과연 20세기 자본주의와 21세기 자본주의는 19세기의 자본주의와 얼마나 다를까요?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오늘날에도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135) 벤야민이 백화점을 종교적 도취에 바쳐진 사원이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보들레르의 '대도시의 종교적 도취'에 대해 백화점이란 이러한 도취에 바쳐진 사원이다" 참으로 멋진 표현이지요. 종교적 도취에 비견되는 대도시의 욕망 속에서 백화점이야말로 소비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확장시킨 공간이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유함과 허영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가의 상품들을 구입합니다.
135) 산업자본은 패션을 통해서 여성들이 가진 이러한 모든 욕망을 길들이고 동시에 이러한 욕망들을 조금씩 채워줍니다.
138) 감추려고 하지만 감추기 힘든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가장 예리하게 통찰했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파스칼(1623~1662)입니다. 파스칼의 유고집 <팡세> 전반부를 읽어보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직시했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39) 예링은 패션을 개인적 욕망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학적 차원에서 사유합니다. 벤야민이 인용한 패션에 대한 예링의 주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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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상류사회로부터 기원합니다. 상류사회는 스스로 하류사회와 구분하기 위해서 새로운 패션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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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중간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자마자 곧바로 소멸됩니다. 중간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게 되면, 특정한 패션은 상류사회를 중간계급으로부터 구별할 힘을 상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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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급에게 패션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폭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스스로 상류계급을 지향하는 중간계급으로서는 상류계급이 택한 패션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156) 도박장이 문을 열기를 초조해하면서 기다리는 남자의 혼 속에 어떤 열광과 어떤 힘이 잠들어 있는지 아는가? 아침의 도박꾼과 저녁의 도박꾼 사이에는 천하태평인 남편과 사랑하는 미녀의 창문 아래서 정신을 잃은 애인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차이가 있다. 아침만 되면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정열과 욕구가 소름이 오싹 끼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때 진정한 도박꾼의 모습, 도박에서의 불운의 채찍에 너무나 심하게 맞은 나머지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생활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잊어버린 도박꾼의 모습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발자크 <도톨 가죽>
162) 오노레 도미에, <증권거래소>, 1856
시사풍자만화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도미에의 연작 석판화 <파리지앵 크로키> 가운데 여섯 번째 증권거래소 풍경입니다. 보들레르가 묘사한 죽음과 쇠락의 냄새가 나는 퇴폐적인 도박장 모습과 그다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박은 불법인 데 반해 주식은 어째서 합법인 걸까요?
166)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상품이 교환됩니다. 그러나 그 교환의 이면에는 상품에 대해 돈이 갖는 존재론적 우월성이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다른 것보다 절대적 우월성을 갖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요.
167) 그렇다면 돈을 어떻게 수중에 넣을 수 있을까요? 가령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든가 아니면 자신을 팔아서 돈을 구해야겠지요. 여기서 자신을 판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취업과 같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파는 모든 행위를 의미할 뿐입니다. 대부분 자신이 가진 가치, 예를 들어 학점, 토익 점수, 대화술, 미모, 지식 등을 팔아서 취업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지적하기도 했지요.
172)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시카고 증권거래소>, 1999
구르스키는 스펙터클한 화면에 현대사회의 단면을 담아내는 사진가로 유명합니다. 그가 멀리서 잡아낸 증권거래소 풍경은 도미에의 그림처럼 객장의 악다구니가 생생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거리 두기를 통해 낯설게 보기가 가능해집니다. 일확천금 인생역전의 전설을 유포하며 개미 투자자들의 판돈을 끌어 모으는 보편적 도박장으로서의 자본주의가 한눈에 들어오는 느낌이랄까요.
175)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간혹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종교 자체를 거부한 무신론자였다는 식으로 단순화해버리지요. 그러나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무척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이때 종교는 그들에게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는 아편처럼 기능합니다. 만약 종교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현실의 고통에 무방비 상태로 내몰렸겠지요. 따라서 사람들에게 종교를 부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그들에게 마취제 없이 고통을 감내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중략)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말은 현실의 고통이 사라진다면 종교적 공상 도한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이 가진 모순과 고통을 치료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불쌍한 이웃들이 종교를 맹목적으로 믿을 이유도 곧 사라질 것이라고 본 것이지요.
178) 산업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대도시의 삶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마치 룰렛 위의 구슬이 돌고 멈추듯이 진행됩니다. 심지어 입사원서를 제출해도 우리는 룰렛에 판돈을 건 사람처럼 기대와 불안의 심정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영어 회화에 능숙해도 자신이 원하는 곳에 백퍼 세트 취업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성적 관리나 회화 연습마저도 룰렛에 굴러가는 구슬을 보며 기원하는 종교적 기대 행위로 해석될 수 있지요. 각 대학교 중앙도서관의 풍경은 여러모로 성당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밤새 불을 밝히는 도서관 열람실의 학생들 모습은 소원 성취를 위해 철야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의 모습과 상당 부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벤야민은 대도시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행동이 돈이라는 신에게 바치는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자본주의의 종교적 성격은 도박과 매춘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92)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다른 남자에게 계속 몸을 허락하는 일은 더 큰 괴로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요. 이런 비극은 벤야민이 지적했듯 뒤마(1824-1895)의 소설 <춘희>의 모티브가 됩니다. (중략)
자본주의에서의 사랑에는 항상 비극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포함한 모든 것 위에 돈이라는 신이 군림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현대 여성들은 그 누구라도 제2의 춘희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지금은 배우자의 조건 중 경제 능력이 가장 중요한 시대입니다.
198) 에른스트 키르히너, <베를린 거리>, 1913
키르히너는 어두운 밤거리, 그곳을 거니는 매춘부들, 그녀들 뒤를 쫓는 남자들을 즐겨 그렸습니다. 군중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기도 했다지요. 보들레르처럼 소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의 에로티시즘에 육박하고 싶었던 걸까요? 하지만 시대의 불안과 공포, 그 긴장감을 견뎌내지 못한 키르히너는 나치에 의해 퇴폐작가로 낙인찍힌 뒤 안타깝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208) 투르니에는 자신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소설가의 길로 나섰지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바로 이러한 그의 열정을 담은 첫 번째 소설입니다.
투르니에의 소설은 다니엘 디포(1660-1731)가 지은 <로빈슨 크루소(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투르니에가 시도한 패러디의 핵심은 기존 소설의 주인공 로빈손 크루서가 아니라 '프라이데이(Friday)', 즉 '방드르디(Vendredi)'라고 불린 인물을 캐스팅했다는 데 있습니다. 방드르디는 프랑스어로 '금요일'을 뜻합니다. 투르니에의 소설 속 로빈슨은 무인도에 표류한 뒤 어느 금요일에 그곳 원주민 한 명을 만납니다. 금요일 날 우연히 만났다고 하여 로빈슨은 그 원주민에게 금요일을 뜻하는 프랑스어 '방드르디'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중략) 비록 형식적 주인공은 여전히 로빈슨인 양 전개되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실질적 주인공은 로빈슨이 만난 '방드르디'라는 타자입니다.
216)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라는 부르디외의 저서가 매우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를 전혀 모르던 알제리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철저히 적응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고 대담한 이론으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전자본주의 시대에 살던 알제리 사람의 내면세계와 자본주의 시대에 살게 된 알제리 사람의 내면세계 사이의 간극은 마치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듯 보이지만,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알제리 사람들은 이제 과거 자신의 조상과는 현격히 다른 삶의 양식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는 알제리 사람들의 의식 변화를 해명하는 데만 그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의 관계는 일본과 조선 사이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일본 식민 지배가 가져온 산업자본의 논리는 당시 우리 조상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을까요? 이런 의문이 생긴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라는 책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219) 페터 브뤼겔, <게으른 자의 천국>1567
브뤼겔이 살았던 중세 말기는 아직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지배적으로 자리 잡기 전입니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력의 산물이 무엇이든 간에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노동'이면 존귀하게 여겼으며 다만 '사회적 의무를 결여한 무위도식하는 (혹은 나태한) 사람'을 경계했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그리고 '수익성이 있는 노동'과 '수익성이 없는 노동'으로 구별하는 이분법과는 사뭇 다른 기준입니다.
221) 부르디외에게 '미래'에는 두 종류가 있는 셈입니다. 우선 미래란 자본주의적 인간의 내면에서는 '가능성의 장'으로서 이해됩니다. 이에 반해 미래는 전자본주의적 인간의 경우에는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 표상됩니다.
'가능성의 장'으로서의 미래란 다양한 경우의 수들 가운데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중략) 반면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의 미래는 이전에도 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올 것입니다.
240) 제럴드 스펜서 프라이스 <실업> 1910
스펜서 프라이스는 다큐멘터리로서 그리고 예술적으로도 완성도 있는 포스터를 제작하기 위해, 전쟁 현장에서 석판을 갖고 다니며 참호 생활 등을 석판화로 담아냈다고 하네요. 실업의 비참함을 표현한 이 포스터를 보면 '미래의 현실주의적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라는 부르디외의 날카로운 지적이 더없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244)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신화적으로 은폐할 수밖에 없었던 전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과 자본주의 체계 사이의 관계를 부분적으로나마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실업자나 노숙자들은 여전히 '잠재적으로 올 것'의 영역에 매몰된 듯이 보입니다. 최소 생활을 영위할 여력마저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과거 전자본주의 시대의 농민들처럼 전체 체계를 자신의 시야를 통해 합리적으로 성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249) 페르낭 레제, <여가-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1948
레제의 이 작품은 당시 좌파가 요구했던 '노동자들을 위한 유급휴가'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피크닉 같은 여가의 즐거움을 담아낸 명쾌한 화풍에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묻어나지요. 제대로 놀 수 있어야 미래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는 법이니.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놀이의 아비투스가 아닐까요.
249)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는 실업자, 해고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은 매우 절망적입니다. 이런 사태 속에서 이웃들은 미래를 주체적 '가능성의 장'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잠재성'의 영역으로 간주하게 되고 동시에 삶의 수준 역시 퇴보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일본의 현대 철학자 가라타니 고지(1941~)이 우리 시대의 '생산-소비 협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우리 이웃이 자신의 삶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직면할 수 있도록 안정적 여유를 확보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변혁을 위한 필수 조건이겠지요.
259) 움베르토 에코(1932~)가 지은 <장미의 이름>을 보면 중세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 대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지요. (중략) 그렇다면 호르헤라는 독실한 수도사가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긴 채 동료 수도사들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수도원 도서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필사본 형태로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태도는, 시인을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국가로부터 추방하고자 했던 플라톤의 엄숙주의와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그런데 호르헤는 바로 이 책을 읽고 '웃음'의 가치를 알게 된 수도사들을 하나하나 살해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시대는 흔히 암흑의 시대(Dark Age)라고 불립니다. 이 세대는 신과 그가 약속한 천국이 최상의 가치로 간주되었지요. 중세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과 욕망을 긍정할 수 없었습니다. 신은 인간의 삶을 마치 CCTV로 녹화하듯 감시해서 그 녹화한 자료로 심판한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그 시절 사람들의 삶은 금욕적이고 경건하게 영위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웃음'이란 허락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심판받는 인간이 어떻게 웃겠습니까?
262) 프로테스탄티즘과 산업자본주의를 로빈슨의 아비투스를 규정하는 양대 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티즘이 조금 조롱받았다고 할지라도, 로빈슨은 자신의 아비투스를 결코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로빈슨은 "나의 비참한 고독은 나에게도 부족하지 않게 남아 있는 돈의 혜택을 박탈해간다"라고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 로빈슨의 탄식은 곧 자신이 수중에 가진 돈을 보니까 더욱 고독해진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지요. (중략) 난파선에서 남은 돈을 가지고 왔지만 그것은 오히려 로빈슨의 고독만 깊게 했을 뿐입니다. 돈은 교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데, 로빈슨에게는 돈과 상품을 교환할 사람이 전혀 없었지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 방드르디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기독교에 대해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로빈슨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방드르디에게 자본주의의 원리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274) Jenny Holzer, <진부한 문구> 연작 중에서 하나,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 호텔, LED, 1977~1986
홀저는 도시 속 전광판에 짤막한 문장이 깜박이는 작품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을 꾀했습니다. 처음엔 포스터 형식으로 만들어 익명으로 뿌리다가 도심 광장, 대형 건물, 야구장 같은 공공장소로 무대를 넓혔다지요. 'MONEY CREATE TASTE(돈이 취향을 창조한다)"외에도 "PROTECT ME FROM WHAT I WANT" 등, 이 텍스트와 우연히 마주치는 누군가에게 잠깐이라도 생각할 계기가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284)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 등을 의미합니다.
- 학력자본(Capital scolaire)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라고 하더라도, 돈 만으로 이 세 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세 가지 자본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 그래서 벼락부자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세 가지 자본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에 온 힘을 쏟고 나아가 가장 수준 놈은 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유학을 보내지요.
286) 그렇다면 하류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선하게 살며, 얼마나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까요?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프랑스의 심오한 철학자 파스칼의 말이 떠오릅니다. 비록 39세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지만, 파스칼만큼 인간의 허영과 가식을 깊이 통찰했던 철학자도 없지요
289) 자살한 상위권 학생 혹은 건강하게 학교를 잘 다니는 하위권 학생의 심리 구조는 결국 성적 지상주의를 조장하는 사회구조에 기인합니다. 성적 지상주의는 성적을 잘 받은 학생들에게 모든 칭찬이 쏠리는 것을 의미하지요. 심지어 상위권 학생들은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상위권 여학생의 자살은 그 학생의 잘못된 선택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겠지요. 허영과 착각에 빠져서 자살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허영심이란 모든 인간이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적=칭찬'의 도식만을 강요한 사회구조에 여학생 개인보다 더 큰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통감해야 할 것입니다.
295)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무제(갈색 위에 짙은 빨간색)>(시그램 벽화 스케치), 1958
"나는 색체와 형태의 관계 따위는 관심이 없다. 오직 비극, 황홀경, 운명 같은 인간의 근원적 감정을 표현할 뿐이다" 로스코의 이 말은 추상화에 대한 변으로도 들리지만, 상류계급의 허위의식을 경멸했던 그가 뉴욕 최고급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 작업을 맡았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레스토랑에 들어선 부자들이 인간 고통의 심연에 직면하여 정신적 각성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화가의 기획은 비록 좌절되었지만, 그 처절한 도전의 결과물은 지금도 당신의 진정한 취향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듯합니다.
300) 흥미로운 점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 같은 시간의식은 기독교의 시간의식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현재의 고통의 순간,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괴로운 순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 따르면 미래의 어느 순간 우리는 반드시 죽게 되고, 바로 그 순간 신의 심판이 곧 시작되겠지요. 신은 살아 있을 때 행실을 토대로 우리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의 심판 논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미래의 그날을 위한 하나의 수단쯤으로 간주하겠지요. 현재의 삶은 단지 천국으로 가느냐 아니면 지옥으로 가느냐를 결정하는 시금석이 될 뿐입니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의 구조적 유사성에 주목한 이유도 양자 간의 이러한 근친성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나 기독교는 모두 현재의 순간보다는 미래를 더욱 긍정합니다.
301) 결국 호이징가(Johan Huizinga, 1872~1945)가 <호모 루덴스>에서 이야기했듯이, 방드르디는 '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일종의 '놀이하는 인간'이었던 셈입니다. 놀이란 어떤 행위가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일 때 가능한 행동이라는 호이징가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방드르디의 삶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된 마치 놀이와도 같은 현재의 행위들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과거에 로빈슨이 자본주의적이면서 청교도적인 아비투스를 가지고 있었다면, 방드르디는 바로 놀이의 아비투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303) 다이엘 디포의 소설의 주인공 로빈슨은 기꺼이 화이트버드를 타고 영국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이제 영국을 버리고 스페란차에 남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새로운 아비투스, 즉 놀이의 아비투스를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화이트버드의 선장과 선원들을 보면서 이제야 그는 과거 자신의 삶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습니다. 한때 로빈슨도 그들처럼 현재의 삶과 순간을 초월한 어떤 목적성(finality)의 노예에 불과했으니까요.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미래의 좋은 삶, 장밋빛 삶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고된 노동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각자의 삶을 경건하게 검열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본주의나 기독교가 제공하는 달콤한 미끼를 덥석 무는 순간, 우리의 현재와 삶은 깊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현재의 순간이란 있을 수 없게 되지요.
308) 혼잡한 통로를 따라가면서 캐리는 좌우에 진열된 장신구, 의류, 구두, 문방구, 보석 등등의 황홀한 광경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카운터 하나하나가 그녀의 어쩔 줄 몰라하는 시선을 매혹시키는 진열장이었다. 장신구 하나하나가 자기 자신을 뽐내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또 그녀가 갖고 싶었던 귀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그녀가 가지고 싶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드라이저, <시스터 캐리>
413) 바로 이때 소비문화에 대해 매우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본 한 명의 시인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한편으로 시인은 소비문화의 치명적 유혹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머리로는 그것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길들여진 감각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이성의 갈등! 유하(1963~)가 바로 그런 시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980년대를 관통했던 소비문화에 대해 자신이 몸소 겪었던 갈등 양상을 1991년 한 권의 시집으로 출간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집입니다.
318) Barbara Kruger,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1987
크루거는 이미지와 언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광고 형식을 차용해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맹점들을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빨간색 테는 작품을 상품과 같이 보이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속에서의 예술의 상황을 은유한다고 하네요. 이 작품은 차가운 이성이 작동하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광고에 휘둘리는 우리의 소비 현실을 촌철살인으로 보여줍니다.
319) 시인이 바라본 것은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소망교회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망교회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만을 위한 교회,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에서 왕들의 교회입니다. 자신의 부모가 과연 무엇을 해서 권력과 부를 얻어 썼는지 알 턱이 없는 아이들은 '뽀얀' 얼굴로 천사처럼 촛불을 들로 거리를 행진합니다. 보무도 당당한 아이들 모습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시위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만만한 아이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따위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촛불은 신이 만드신 거대한 수정 샹들리에가 보호해주겠지요. '빽이 든든'해서 걱정할 거리가 없는 아이들의 촛불 행렬은 이제 화려한 소비도시의 불빛들과 교차하며 환상적인 '불의 뷔페'를 만들어냅니다.
322) 불행히도 고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직업은 근면하다고 해서 결코 생활이 안정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고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직을 얻으려면 많은 시간과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농사일을 돕다가 자연스럽게 농부의 길을 걷는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고소득의 전문직을 얻기 위해서는 학위가 필요하듯이 당시 프랑스에서도 대학 이상의 학위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한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325) 사람들을 대변하고 혹은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타인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요. 이런 이유로 프랑스 지식인들은 당시 소련의 공산당 독재가 함축하는 폭압적 지배와 배신의 논리를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형식이란 억압받는 자들이 정권을 잡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억압적 국가 체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마르크스의 판단에 대해 너무도 낭만적이라고 비판했던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역시 억압적 국가 체제에 불과하다고 경고했던 바쿠닌(1814~1876)입니다. 68 혁명의 실패로 바쿠닌의 정치철학적 성찰이 다시 빛을 발한 셈이지요.
326) 68 혁명 이후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제 두 가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인간을 경쟁으로 내몰며 삶과 노동을 소외시키는 산업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두 번째 문제는 누구에게도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 직접 민주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였습니다. 물론 이 두 문제는 서로 분리된 문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중략)
68 혁명이 실패로 끝난 3년 뒤, 1970년에 보드리야르는 그의 출세작 <소비의 사회>를 출간합니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는 산업자본주의의 핵심에서 바로 '소비의 논리'를 발견했습니다.
331) 그럼에도 왜 최신 세탁기의 출시를 알리는 광고는 계속 만들어질까요? 그것은 소비자가 사용하는 기존 상품을 '낡은' 것으로 만들려는 목적입니다. 현재 산업자본은 광고를 통해서 우리가 가진 '낡은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구매하도록 유혹합니다. 만약 세탁기의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광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지요.
333)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점이 벤야민이나 부르디외의 통찰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구별짓기 욕망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부당하게도 자신의 현재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피해 의식 말입니다. 또한 이런 피해 의식의 이면에는 모든 인간에게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비관도 함께 깔려 있지요. 그래서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것입니다.
337) 기독교 전통이 그렇듯 모든 기독교에게 현세의 삶은 심판의 대상으로서만 의미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을 가늠하는 사후의 심판 그리고 심판 이후의 영원한 삶이라고 보았으니까요. 당연히 기독교들은 자신들의 삶을 <성경>에 맞게 검열했습니다. 사후의 삶은 정신의 삶이기 때문에, 생전의 삶에서도 중요한 것은 인간의 육신이 아니라 정신이겠지요. 이 때문에 육체적 욕망과 쾌락을 저주하고 그것을 사탄의 유혹으로 치부했습니다. 이로부터 일종의 금욕주의가 나온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티즘 역시 이런 전통적 기독교의 금욕주의를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베버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직업을 일종의 소명, 즉 의무로 간주했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도 'vocation'이라는 단어에는 '직업'이라는 의미와 '소명', 즉 '신의 부르심'이란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프로테스탄티즘에게 직업이란 종교적 천직을 의미합니다.
339) 좀바르트는 1913년에 두 권의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사에 대한 연구>를 출간합니다. 1권은 <사치와 자본주의>, 2권은 <전쟁과 자본주의>였지요. 이 중 특히 <사치와 자본주의>가 유명합니다. 좀바르트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진정한 이유는 '사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베버가 '생산' 부분에서 드러난 금욕주의적 태도에서 자본주의 발달의 계기를 찾았다면, 좀바르트는 '소비' 부분에서 나타난 인간의 '사치'와 '허영'에서 자본주의 발달의 신비를 발견했습니다.
341) 그런데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치가 진정한 의미의 사치가 되기 위해서는 감각적 향락, 다시 말해 에로티즘과 관련된 관능적 활기를 수반해야 한다는 좀바르트의 주장입니다. 사랑을 구걸하는 사람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제적 여유를 초과할 정도로 소비를 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그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홀리기 위한 전략이지요. <사치와 자본주의>에서 좀바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부가 축적되고 성생활이 자연스럽게 또 자유스럽게 혹은 대담하게 표현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사치도 함께 유행한다."
345) 자본가가 생산한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결코 잉여가치를 남길 수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산업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입니다. 보드리야르가 생산이 아닌 소비의 논리에 집중했던 이유도 여기 있지요. 이것이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남길 수 있는 결정적 지점이 유통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353) 소비사회는 필요 이상으로 상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환각의 체계입니다. 이러한 환각 작용은 과도한 소비로 이어지고, 쓰지도 않는 물품은 쌓여만 갑니다. (중략) 만약 소비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게"된다면, 산업자본은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업자본의 속은 타들어가겠지요. 위와 같은 소비자들 간의 연대는 잉여가치를 얻으려는 산업자본의 욕망에 치명적 상처를 남길뿐입니다.
360) 그런데 바로 여기서 기형적 인간형이 탄생합니다. 의대 졸업생, 경영대 졸업생, 공대 졸업생, 법대 졸업생 등은 자신의 전공분야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이것을 선택과 집중이라는 미명 하에 정당화하는 것이 요즘 추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전문직에 종사하여 충분한 임금이 보장될 때까지는 별다른 걱정이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임금으로 필요한 노동이나 상품들을 구입하면 될 뿐입니다. 농사를 지을 줄 몰라도 상점에 가서 쌀을 구매하면 되고 컴퓨터가 고장 나도 컴맹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이 전문가에게 돈을 주고 수리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만약 자신이 일하던 전문분야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되어 임금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유사 업종의 경기가 좋지 않아 자신의 전문 지식을 무기로 재입사할 곳이 별로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상황은 180도 달라지겠죠.
361) 분업과 전문화를 통해 산업자본은 우리가 가진 야성과 잠재 능력을 완전히 무력화합니다. 산업자본의 필요에 따라 우리 능력을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전문화하고 규격화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대사로 일정 기간 고소득을 보장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우리가 배운 전문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면, 산업자본은 냉정하게 하루아침에 우리를 해고해버립니다. 서울 중심가를 걷다가 발견하는 수많은 노숙자도 바로 그런 경우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산업자본이 폐기 처분해버린 이웃이라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들이 단순한 육체 노동자였거나 아니면 배운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간단히 치부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한대는 분명 이 사회에 필요한 기술 혹은 지식을 가졌고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불행히도 그들이 아는 지식이나 기술은 하찮고 낡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기술을 낡고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산업자본의 끊임없는 변신 때문입니다.
363) 자본가로부터 주어지는 임금은 더 큰 자본의 형태로 다시 회수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제공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는 것은 마치 유하가 적절히 표현했듯이, 횟집의 주인이 산낙지에게 공기를 재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산낙지에게 산소를 공급하는 이유는, 수족관 속의 산낙지를 위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는 이유는 노동자들의 윤택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노동자가 다시금 소비자가 되어서 자본가의 상품을 구매해주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잉여가치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는 반드시 이러한 메커니즘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을 주기 전에는 자본가가 존재론적으로 우월하지만, 임금을 받는 순간부터는 노동자가 우월하다는 사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자가 임금을 받아 소비자로 탄생하는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만들어낸 상품을 소비자들이 구매하게 하기 위해, 소비사회가 자유로운 사회라는 전설을 유포해왔습니다.
364) 산업자본은 욕망의 불을 부채질하는 강력한 바람으로 군림해왔습니다. 유하가 "불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이야기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366) 선물이 존재하려면,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의식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만약 타인이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내게 다시 돌려주거나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거나, 또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한다면, 나와 타인 사이에는 어떤 선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반환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상당히 긴 유예 조건들을 계산하여 이루어지든 간에 관계없이 말이다. 특히 타인이 내게 동일한 것을 직접 되돌려주는 경우에 이 점은 훨씬 더 분명해진다
- 자크 데리다 <주어진 시간>
376) 뱅크시, <오늘 세일 끝>, 2006
뱅크시는 영국의 게릴라 아티스트입니다. 이름도 얼굴도 숨긴 채 수많은 거리의 낙서화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윤을 내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선택한 무기가 '벽'이라고 말합니다. 신상품을 신처럼 받드는 우리들 모습도 어쩌면 그 속에 포함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잉여가치를 위해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가 우세하도록 부추기는 환각의 체계, 그 견고한 벽에 뱅크시들의 그림이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386)보드리야르는 '상징'으로서 사물이 가진 측면이 사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산업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구원해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습니다. '도구', '상품' 그리고 '기호'로서의 사물의 측면들은 인간을 무한경쟁의 각축장으로 내몰지만, 사물의 '상징적' 측면은 공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주의적 만남의 장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보드리야르에게 증여 논리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에로티즘'으로 유명한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1897-1962)였습니다.
402) 보드리야르에게 상징적 교환의 논리는 소비사회라는 폭풍우를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등대입니다. 그는 선물로 대표되는 상징적 교환의 논리를 이제 '불가능한 교환'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했고, 이를 통해 산업자본주의가 던져놓은 욕망의 집어등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2001년에 출간된 <불가능한 교환>이라는 저서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상징적 교환의 논리를 인식론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더욱 심화된 '불가능한 교환'의 논리로 정리했습니다. 더불어 2000년에 출간된 <암호>는 바로 '불가능한 교환'을 지탱하는 핵심 개념들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두 권의 책을 함께 그리고 천천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들은 산업자본주의의 속내를 가장 깊이 들여다본 노철학자가 남긴 마지막 유언에 해당합니다.
406) Joseph Beuys,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작품을 설명할 것인가?>, 1965
얼굴에 꿀과 금박 분을 바르고 펠트 천과 비곗덩어리 등이 놓인 화랑에 앉은 이가 바로 보이스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죽음의 목전에서 원주민들이 그런 것들로 치료해준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지요. 그는 인간 이성의 합리성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원시적인 영감과 제의를 통해 탐욕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을 구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현대의 무당을 자처하며 이러한 퍼포먼스를 펼쳐 보이곤 했습니다.
411) 니체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기독교를 허무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기독교적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던 니체는 이 순간의 삶과 현재를 절대적인 것으로 긍정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 대목에서 영원회귀라는 니체의 주장이 출현했습니다. 바로 지금 그리고 이곳의 삶, 그리고 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선택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논리에 따라 만약 현재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 행복하지 않은 삶이 어떤 주기를 가지고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심사숙고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412) 니체가 제안한 영원회귀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기독교의 염세주의적 세계관만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적 형태의 염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또한 심각하나 타격을 받습니다. 자본주의 논리를 신봉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현재의 고된 노동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 그 대가로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리지요. 유명 사립초등학교에 보내려고 철도 나지 않은 아이들을 사교육의 현장으로 내모는 이유는, 어린아이들을 명문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아이들은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고 싶겠지요. 그렇지만 세상의 진리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부모는 아이에게 말합니다. 지금 조금만 고생하면 나중에 정말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찾아온다고 말입니다.
아이로서는 참기 힘든 금욕 생활 끝에 아이가 선망하는 중학교에 들어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지만 이 학생의 금욕 생활은 다시 시작됩니다. 외국어고등학교나 민족사관고등학교 같은 대학 진학률이 높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부모님의 설교 또한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인생에서 금욕 생활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국내외 명문대학에 진학해야 하고, 나아가 대학원에도 진학해야 합니다. 그리고 글로벌 기업에 들어가거나 명문대학의 교수직을 위해서 또다시 금욕 생활을 이어가야 하겠지요. 물론 이쯤에서 지금까지 한갓 수단에 불과했던 자신의 삶의 모습이 갑작스럽게 뒤바뀔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글로벌 대기업에 들어가서나 교수직을 얻어도 마찬가지로 치열한 생존경쟁을 위해서 금욕 생활을 지속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부모의 사랑스런 이 아이는 과연 언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언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긍정하면서 현재의 삶 그 자체로 영위할 수 있을까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 아이는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영원회귀에 관한 니체의 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아이는 영원히 자신의 현재와 현재의 기쁨을 부정하는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겠지요.
423)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로 이 책을 마무리하려는 이유를 짐작하시겠나요 우리가 마치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와 같은 상황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사슴과 나무꾼은 자본주의 체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동화책에 나오는 선녀와 달리 날개옷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는 듯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424) 그녀는 나무꾼을 만난 것, 그 행운에 대해서도 감사했겠지요. 심지어 그녀는 이제 나무꾼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날개옷을 다시 되찾을 때까지 이렇게 그녀는 점점 나무꾼에게 길들어갔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빼앗긴 줄도 모르면서 점점 더 나무꾼에게 의존해가는 선녀. 그리고 나무꾼과의 삶을 최상의 행복이라고까지 생각한 선녀. 이런 선녀는 자본주의에 길들어버린 우리 모습과 너무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한 선녀로부터 자유를 되찾은 선녀가 되려면 반드시 날개옷이 필요했듯이, 자본주의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회복하려면 여기에서 다룬 인문학자 여덟 명의 사유 또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날개옷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그들의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왔으며, 또한 진정한 자유를 얼마나 오랫동안 잃고 살아왔는지 자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425) "선생님,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 말씀대로 취업은 자본주의에 포획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취업을 해서는 안 되는 건가요? 취업을 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나요?" 이것은 무척 심각하고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 좋은 성적, 좋은 영어 점수. 지금까지 그들의 삶은 모두 자본주의가 내세운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에 입각한 이 같은 삶의 원칙을 직접 심어준 것은 바로 그들의 부모입니다. 이 점에서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정신분석학의 교훈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다른 동물들보다 인간은 훨씬 더 사랑과 관심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미성숙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중략) 유아 시절부터 인간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 이 가운데 특히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올 때 어머니가 기뻐한다면, 아이들은 가능한 한 성적을 올리려고 애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들이 공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인 셈입니다.
429)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업도 하지 않고 소비도 하지 않으면서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고진은 지금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라는 또 다른 삶의 양식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반자본주의를 선언한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일종의 생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했던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란 과연 어떻게 유지되는 공동체일까요?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라는 공동체는 우선 화폐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성격을 띱니다. 화폐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지 않고 돈으로 다른 것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결단을 의미하지요. 결코 돈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므로 이 공동체에서는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잉여가치를 남기는 자본가가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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