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건강에 관심이 생기면서 요리를 즐기게 되었다. 아빠는 마침 그런 나에게 추천해 줄 책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였다. 단순히 독일에서의 경험담을 엮은 책이라고 여겼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저자의 사연은 꽤 독특하다. 첫째는 부모가 이혼을 하여 남 같은 이복동생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레즈비언이며 애인을 따라 얼떨결에 독일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가 어학원의 고물 엘리베이터에 지쳐 새롭게 거주하게 된 곳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로 불룩한 배를 가진 50대 독일 남성, ‘요나스’의 집이다.
결국 이 책은 독일의 다양한 음식을 소개함과 동시에 요나스를 추모하기 위해 쓴 걸로 보인다. 따라서 일반적인 산문집이랑은 결이 다르다. 요나스의 더러운 습관과 지나치게 경계 없는 모습은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순 없지만(곰팡이 핀 음식을 먹고, 먼지 쌓인 음식을 주워 먹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현재를 즐기고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지내려는 친근한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새 ‘정’을 느끼게 한다. 낯선 타지에서 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고 고민이 있으면 들어주려는 요나스 같은 친구가 있다면 참 좋을 것 같긴 하다.
요나스는 자주 심장발작을 일으켜 그의 아들 일리아스를 포함해 많은 이들을 걱정시켰다. 안타깝게도 그가 사망한 사인과 같은데, 이는 저자가 요나스 집에서 거처를 옮기고 다다음 세입자가 들어온 뒤의 일이었다. 책만 봐도 그의 평소 생활습관이 원인임을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발 끝이 썩어들어갈 정도로 당뇨가 심각한 상태였다. 저자도 그의 식습관을 걱정하지만 그럴 때마다 요나스는 ‘알레스 굿(Alles gut)’이라는 표현을 써 안심시킨다. 독일어로 ‘모든 것이 좋다’라는 뜻이다.
요나스는 향년 53세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우리 부모님과 나이가 똑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나스가 보낸 마냥 해맑은 내용의 편지는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한편 책에는 정말 다양한 독일 음식이 소개된다. 주로 요나스가 차려준 식사다. 가끔 궁금해지면 사진도 찾아봤는데 보는 내내 군침이 흘러서 참기 힘들었다. 꼭 만들어보고 싶은 요리도 몇 개 생겼다. 첫 장에서 등장한 베이컨을 곁들인 삶은 슈파겔(Spargel)은 옛 추억을 건드렸다. 인도에서 살던 시절, 같은 반 한인친구가 종종 도시락으로 베이컨으로 둘둘 만 아스파라거스를 싸 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하나씩 뺏어먹곤(?) 했는데, 정말 끝내줬다. 독일의 슈파겔은 하얀 아스파라거스다. 재배 면적은 독일 야외 채소 재배 전체 면적의 약 17퍼센트에 달하는 크기로 독일의 슈파겔 사랑은 대단하다. 함께 소개된 홀랜다이즈 소스랑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겠다.
독일의 식사에는 브로첸(Brötchen)이 빠지지 않는다. 빵을 의미하는 Brot과 작거나 귀엽게 여기는 뜻을 더하는 Chen이 합쳐진 말이다. 책에 소개된 브로첸이 들어간 식사 중 유독 카프레제 브로첸이 먹고 싶다. 뚜껑 없는 샌드위치 같은데 토마토와 생모짜렐라 치즈, 바질페스토, 발사믹 식초, 후추가 들어간다. 약간의 고기까지 들어가면 정말 건강한 재료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요즘 치즈가 당기는데 마침 잘 됐다!
요나스가 푹 빠진 디저트는 집 앞에 독일 마트 레베(REWE)만 있다면 순식간에 만들 수 있다. 바로 바닐라소스와 함께 먹는 요나스식 로테 그뤼체(Rote Grütze)다. 로테는 ‘붉은’이라는 뜻이고 그뤼체는 거칠게 빻은 곡류를 말하는데 로테 그뤼체는 붉은 과일과 곡물의 전분을 이용해 묽은 푸딩의 질감을 낸 음식이다. 바닐라 소스에 말아먹으면(요나스의 당뇨의 원인이지 않을까) 맛있다고 한다. 요나스는 공황에 빠져 우울해하는 성진(저자)에게 로테 그뤼체를 해준다. 우울할 때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공식은 우리 DNA에 새겨진 만고불변의 법칙일 것이다.
독일은 직업을 가지는 일에 대해 매우 엄격하다. 요나스의 아들 일리아스는 한 때 마약 딜러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은 월급증명서처럼 직장을 증명할 서류가 없으면 건강보험, 집, 연금에 관한 그 어떤 계약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게 일리아스가 매일 아침 6시 마트로 출근하는 이유다. 자신을 증명할 수 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바로 독일인 것이다. 이건 소수의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합법적이지 못한 일에서 손을 떼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인 것 같다.
독일이 과거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그럼 오늘날에 동독 출신과 서독 출신은 잘 섞여서 어울려 살고 있을까? 이건 분명 관심 있게 볼 문제다. 한반도가 통일된 이후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독일어로 동쪽은 오스트(Ost)이고, 서쪽은 베스트(West)이다. 그래서 동쪽 출신은 오시(Ossi), 서쪽 출신은 베시(Wessi)라고 한다. 오레니얼스는 오스트(Ost)와 밀레니얼 세대를 뜻하는 밀레니얼스(Millennials)가 합쳐진 말이다. 오레니얼스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통일된 독일에서 나고 자란 첫 번째 세대다. 오레니얼스는 분단 시절을 겪지 않았음에도 동독 출신의 정체성을 내면화하고 있어 서독 밀레니엄 세대와 차이가 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통일되면 적어도 한 세대 정도는 데면데면할 거라고 예상해 본다.
독일은 주로 집을 소유하기보단 임차해 사는 경우가 많다. 우리 가족도 임차해 살고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집을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점에서 독일과 다르다. 책을 보면 주임차인은 평생 집을 빌릴 수 있는 영구적인 계약서를 갖고 있지만 부임차인은 주임차인과 일정 기간 계약을 맺고 방을 빌리는 걸로 보인다.
유럽은 이민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독일은 튀르키예 이민자가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1950년대 ‘손님 노동자’ 제도를 통해 독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독일이 실업률이 높은 주변 나라와 맺은 노동협약이다.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위한 손님노동자의 유입으로 독일 사회는 빠르게 경기를 회복했다.
독일인의 실업률이 치솟기 시작하자 1973년에 제도가 중지되었고, 정부는 이민자를 줄이기 위해 외국인 고용 기간을 낮추고 채용비를 올렸다. 사회 곳곳에서 외국인 때문에 현지인의 일자리가 줄었다는 볼멘소리가 쏟아졌다. 그들의 노고는 잊힌 지 오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동안 ‘되너 살인(Döner-Morde)’이라고 불렸던 연쇄살인도 있었다. ‘민족-사회주의 지하동맹’이라는 네오나치 테러리스트 집단이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독일 전역에서 튀르키예계 이민자 여덟 명, 그리스계 이민자 한 명, 그리고 독일계 경찰 한 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외국인 혐오가 동기였다.
저자는 자신을 인종차별하는 독일인을 튀르키예인 취급하며 차별에 맞대응하지만 이내 후회한다. 자신도 결국 똑같은 인종차별을 한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되너 살인, 케밥 살인이라고 살인 사건이 알려진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되너(Döner)는 돌아간다는 의미의 튀르키예어 돈멕(dönmek)에서 왔고, 케밥(Kebab)은 튀르키예어로 구운 고기를 뜻한다. 피해자들 중 실제로 되너 가게와 관련된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이민자 문제로 튀르키예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다. 차별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이 살인사건의 이름은 어쩌면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짧지만 굵은 책이었다. 그동안 관심을 가질 일 없었던 독일의 사회, 문화, 언어, 지역을 전체적으로 훑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미시적으론 성진과 요나스,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이 보여준 케미가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책에 등장한 음식의 이름은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가족에게 요리해 주고 싶다. 부모님 모두 이 책을 읽어 보셨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되새기며 맛있게 드실 것 같다. 비록 독일 음식은 아니지만 아빠가 카레우동을 드셔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걸 가장 먼저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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