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철학자 강신주의『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읽은 이후 다시 그의 '장자'에 대한 책을 만났다.
처음 그의 책을 접했을 때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소감은 짧게 적고 인용한 문장만 가득 포스팅했다.
블로그를 시작한 초기라서 지금보다 부족한 부분도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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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상처받지 않을 권리_자본주의 시대 욕망 극복과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책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명확하게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상'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매 장마다 두 명씩 서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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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은 책의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
각 장마다 원본에 대한 해석을 앞에 두고 한자로 된 원문을 바로 뒤에 배치했다.
그래서 한글에 비해 짧은 한자 원문을 보며 어떻게 해석했는지 비교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의 원문에 대한 해석을 두었다.
이 책에서 배운 점을 세 가지로 나눠서 포스팅한다.
첫째,『장자』라는 책이 등장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 전국시대 후기 상나라 유민으로 구성된 송나라 사람이었던 장자와 그 외 여러 사람에 의해 300여 년에 걸쳐 지어졌다.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정착민적 삶을 살아가는 지배자들이 원하는 철학을 담은 유가와는 달리 유목민적 철학을 담은 책이다.
지식인층이 대인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소인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인의 입장을 담았다.
아래는 관련된 문장을 인용했다.
『논어』 『단자론』그리고 『국부론』은 아무리 잘 읽어도 책이 되기는 힘듭니다.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받아들이거나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니까요. 그렇지만 『장자』 『에티카』그리고 『자본론』은 조금만 제대로 읽어도 교재가 되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힘, 새로운 삶과 공동체를 모색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 스피노자와 마르크스가 아닌 장자에 집중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피노자와 마르크스가 정착민적 삶을 전제로 한다면, 장자의 사유는 정착민적 삶과 더불어 유목민적 삶도 아우르는 인류학적 안목과 사유의 폭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16)
인간의 사유는, 국가나 자본을 위한 사유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인간이 스스로 수행하는 사유여야만 합니다. 당연히 국가나 자본은 어용사유가 아닌 인간의 사유에 무용하다는 딱지를 붙일 겁니다. 그러니 장자는 자신의 사유가 무용하다는 비난을 긍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31)
『장자』는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대략 300여 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장자 본인과 그의 제자들, 나아가 장자를 너무나 사랑하고 따랐던 사람들의 사유가 합류해 만들어진 책입니다. 물론 강물의 수원지는 장자이지만, 무수한 지류들이 합류되어 섞이면서 『장자』라는 하나의 거대한 강물이 된 것입니다. (146)
『장자』에는 송나라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간혹 나옵니다. 그럴 때마다 장자 본인이 만든 이야기를 만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장자는 송나라 출신이거든요. 송나라는 상나라의 유민들이 세운 전국시대의 작은 제후국입니다. 그래서인지 송나라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전통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보자면 현실감각을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로 유명했습니다. (161)
장자도 송나라 출신입니다. 사건들에 민감하고 생각이 많지만, 뭔가 결정하면 곧바로 실천하는 사람이었죠. 통념이나 상식을 생각 없이 따르기보다는 주어진 사건에 촉을 세우고 그로부터 기존 통념과 상식을 넘어서고자 사유를 거듭하는 철학자, 그가 바로 '송나라적인, 너무나도 송나라적인' 장자였습니다. (163)
유가가 대인(大人)을 정당화하는 사유를 전개했다면, 묵가는 소인(小人)을 위한 사유를 표방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묵가보다는 유가가 더 권위가 있었나 봅니다. 아무래도 소인의 육체노동을 긍정하던 묵가의 입장은 고급 관료를 꿈꾸던 대부분 지식인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니까요. 총력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도모하던 당시 시대 분위기도 묵가의 쇠퇴를 촉진하게 됩니다. (319)
(...) 인간의 본성 자체가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이런 대립적인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겁니다. (...) 흥미로운 것은 성선론이 국가의 개입에 반대하며 개인의 자율성을 긍정한다면 성악론은 국가의 공권력이나 사회의 훈육을 긍정하며 개인의 자율성을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334)
둘째, 삶의 자유를 강조한다.
저자는 『장자』에서 24개의 꼭지를 발췌해서 해석을 하는데 많이 반복되는 내용이 지배자에게 종속되지 않는 삶이다.
현실이, 세계가 요구하는 유용함, 쓸모에 맞춰서 살기보다 자신이 쓸모있는 영역을 찾으라고 촉구한다.
지배자가 억압자가 당근을 주며 요구하는 삶을 테두리를 벗어나라고 한다.
동물을 가축화 하듯이 사람을 가축화하는 전국시대에 쓸모를 위해 스스로 생존 본능에 굴복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현대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도 대인과 소인의 관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와 유사하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는 것도 스스로를 쓸모의 영역으로 넣기 위한 과정이다.
아래는 관련된 내용을 담은 문장을 인용했다.
목재와 인재의 공통성을 생사 여부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수동성과 부자유에서 찾아야 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만이 그 타인에게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강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는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노예든 현재의 임금노동자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나 돈을 주는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97)
자신을 쓸모없게 만드는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절망하는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의 문맥주의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복수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이죠. 문맥에 따라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는" 법입니다. 자신이 쓸모 있어지는 다른 문맥을 찾을 수 없다면, 자신이 쓸모 있어지는 문맥을 만들어도 됩니다. 그만큼 장자의 문맥주의는 강력합니다. (127)
체제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삶을 사는 것,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 동료들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어른의 길입니다. 문제는 어른이 되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하다는, 아니 정확히 말해 나약하도록 훈련되었다는 점입니다. (...) 당장 억압사회를 떠나거나 극복할 수 없어도 잠시 숨이라도 쉬려면, 우리는 삶의 경쾌함과 시원함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미약하나마 자기 삶과 자기 욕망이 조금씩 자라나게 될 겁니다. (196~197)
상과 벌에 의한 인간 가축화는 당근과 채찍으로 이루어지는 동물 가축화의 모든 논리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생계와 자유의 박탈이라는 원초적 폭력 과정이 먼저 이루어지니까요. 이런 조건에서 주인은 상과 벌을 내겁니다. (...) 자유를 빼앗긴 이 불행한 사람이 생존을 위해 주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순간, 상벌을 휘두르는 사람과 상벌을 따르는 사람,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탄생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 살 수 있고, 그러지 않으면 생명까지 위태로워집니다. (221)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노동자와 노동력을 구매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자본가 사이의 교환은 자유, 평등, 소유의 이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특히 몸뚱이만 갖고 있는 것도 소유라고 이야기하니 말문이 막힐 일입니다. (...) 피지배자의 이기심, 즉 노동자의 이기심은 탐욕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것이기에 서글픕니다. 강자에게 굽신거리는 것은 불쾌하지만,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되면 기꺼이 감당합니다. (227)
나는 나야. 나는 형체도 아니고 햇빛도 아니야. 나는 형체나 햇빛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존재야! (243)
장자는 인간 가축화의 논리가 확대되고 심화하는 과정을 안타깝고 씁쓸하게 목도했던 철학자였습니다. 전국시대의 부국강병은 인간 가축을 누가 더 많이 확보하고 효율적으로 기르느냐 혹은 다른 국가의 인간 가축을 얼마나 빼앗느냐로 결정되는 게임이었습니다. (...) 가축화되기 이전에 무용은 축복이지만, 가축화 이후 무용은 비극의 씨앗이기 때문이죠. 결국 쓸모가 있으려는 의지와 경쟁은 완전히 가축화된 인간의 서글픈 생존 본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47~248)
누군가의 쓸모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쓸모를 사용하는 삶! 바로 이것이 지리소의 삶입니다. 체제에 쓰이지 않으면 못 사는 삶이 아니라, 체제가 없어도 자신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도 돌볼 수 있는 힘! 지리소의 힘입니다. (252)
아내나 하인 혹은 노예에게 육체노동을 시키는 대인이 어떻게 열자의 마음을, 메추라기가 어떻게 대붕의 속내를 알겠습니까. 타인을 지배하지도 않고 타인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자유에의 의지, 혹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타인을 업겠다는 사랑에의 의지는 "흐트러지지 않은" 열자의 원칙입니다. (355)
셋째,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잠시 곱씹어볼 문장을 던진다.
아래에 인용한 문장에 대한 소감을 포스팅했다.
오늘 하루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만난 사람은 거의 없는 셈이죠.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택시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식당에서 물리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의 감정도 슬픔의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심지어 귀가해 남편을, 아내를, 딸을, 아들을 봐도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아내를, 남편을, 딸을, 아들을 만난 것 같지만 만나지 않은 겁니다. 내 감정에 기쁨과 슬픔이 일어야 내가 만난 타자를 타자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48)
수도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지만 타인일 뿐이다.
심지어 가족과의 만남 조차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타자와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은 인생이 아닌가
부대끼는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될 때마다 친절한 미소나 말 한마디라도 던질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합목적성에 지배되는 행동'이 바로 '유위'이고, 대조적으로 '합목적성에 지배되지 않는 행동'이 바로 '무위'인 것입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저자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라면 유위를 노동이라고, 무위를 놀이라고 했을 겁니다. (59)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하위징아의 '놀이'처럼, 장자의 '무위'처럼 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
무언가에 지배되지 않는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행동이 될 수 있다면 가능하겠다.
곤은 바람을 통해 더 큰 세계를 꿈꾸었고, 붕은 바람을 타고 더 큰 세계로 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큼에 어울리는 세계를 선택하려는 겁니다. 반면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면 메추라기는 자기 둥지로 돌아갈 겁니다. 물론 자기를 더 작게 만들면 둥지도 그리 작게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74)
물고기 '곤'에서 큰 세계로 날아가는 '붕'과 같은 큰 꿈이 필요하다.
현실은 메추라기와 꼭 같은 삶이라서 씁쓸하다.
아버지의 비법이 담긴 책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아들이 수레바퀴를 잘 만드는 장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그냥 참고 자료일 뿐이죠. 어차피 아들은 자기만의 시행착오를 거쳐 목재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노하우를 얻어야 하니까요. (86)
인간은 비교 우위에 서려는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헤겔, 나아가 현대 독일 철학자 호네트(Axel Honneth, 1949~)가 강조했던 '인정 투쟁'은 모두 인간은 허영의 존재라는 파스칼의 통찰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는 것이 말이죠. (...) 파스칼은 신에게 헌신하면 허영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다소 황당한 답을 제공합니다. 그는 허영이란 기독교에서 말한 원죄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파스칼의『팡세』후반부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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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팡세_과학자이자 신학자를 통해 17세기를 경험하는 책
파스칼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의견이 많이 언급됩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 원리가 밝혀져 명백한 사실들에 대해서도 17세기에는 신의 섭리로 받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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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날아오는 공이 슬로모션처럼 느려 보인다는 것은 나의 몸이 빠르다고 느낀 것입니다. (...) 포정도 유사한 경지에 이른 것이죠.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소의 결, 근육과 뼈, 근육과 인대 사이의 너무나 미세한 결이 그야말로 고속도로처럼 넓게 보였으니까요. (138)
야구선수들이 연습을 통해 어느 수준에 이르면 빠르게 날아오는 공도 느리고 크게 보인다고 한다.
어느 분야든 반복적인 연습과 훈련은 인간을 탁월함에 이르게 한다.
독서도,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덕(德)'이라는 한자를 나누어보세요. '얻다'를 뜻하는 '득(得)'이라는 한자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라는 한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덕'이란 '마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 중요한 것은, 지리소 이야기에서 마음은 가축화의 의지를 가진 국가나 지배자의 마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가축으로 만들고 싶은 개체의 측면이 바로 '덕'입니다. (255)
국가나 지배자의 의도에 따라 가축화하기 위해 적합한 말이 '덕'이었다니 약간 충격적이다.
지금은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은 지배자의 의도를 간파하고 통치자의 어리석음을 징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과거 전국시대에는 장자의 사상이 실천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불행을 불행한 마주침의 결과가 아니라 신적인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국가체제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겁니다. 수탈과 억압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그것을 바로잡거나 사회를 개조할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유사 이래 국가가 항상 종교를 비호하거나 묵인해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265)
피지배층이 자신의 상황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국가나 지배자는 종교를 활용했다.
종교의 시대인 중세 시대에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교나 유사종교 단체에서는 개개인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정착민적 마음, 즉 성심은 내 집, 내 땅, 나아가 내 것이라는 강력한 소유욕과 함께합니다. 반면 유목민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들에게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중심이고 그 바깥은 주변이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모든 곳이 중심이자 동시에 모든 곳이 주변입니다. 그래서 유목민은 정착민보다 부유합니다. (...) 동시에 유목민은 정착민보다 가난합니다. 어떤 곳도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죠. 내외, 빈부, 생사 등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마음, 바로 이것이 유목민의 마음입니다. (286)
개인적으로 유목민의 삶을 살고자 노력중이다.
소유욕을 부추기는 언론 등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장자의 의도를 파헤친다.
시한이 정해진 인생에서 물욕을 추구하며 아둥바둥하기에는 행복을 향해 갈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모든 인식, 모든 판단 그리고 심지어 모든 말에는 단독적인 나, 특정한 일인칭이 전제되어 있다는 이야기죠. 세계는 나의 세계일 뿐, 모든 존재가 동의하는 객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혜시의 근본 입장입니다. (310~311)
어쨌든 공자의 말로 장자가 권고한 심재(心齋)는 마음의 특정 진동수를 비워내는 겁니다. 그래서 장자는 "비움이 바로 심재"라고 했던 겁니다. (...) 타자의 소리를 잡기 위해 저절로 채널이 움직일 수 있는 근사한 라디오와 같은 상태입니다. (327)
'심재'라는 말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단어다.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고 눈을 보고, 귀를 기울이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고, 쇼츠를 보느라 귀는 반쯤 닫혀 있는 관계다.
주파수를 통해 상대방과 공명하는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면 좋겠다.
논쟁이 흥미로워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기 편을 확보해 논쟁에서 이기려는 논쟁 주도자들의 여론전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확증 불가능한 논쟁에서 이기려고 지식인들은 수적 우위라는 반지성적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여기에 휘말리는 일반인들이 측은할 뿐입니다. (339)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언론과 지식인들의 편가르기식 행동이 도를 넘고 있다.
언론이나 유튜브에서는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통해 수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개개인이 논쟁의 논지를 파악하고 진실을 알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단순히 가짜 지식인들의 말장난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살펴서 안다"고 번역한 "상지(相知)"라는 말입니다. (...) 그래서 상은 원래 '살피다' '감시하다' 혹은 '시찰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보는 자는 지배자이고 보이는 자는 피지배자라는 시선의 정치경제학을 떠올려보면, 뙤약볕에서 노동하는 노에를 시원한 나무 그늘 옆에서 감시하는 노예 감독관을 떠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 이런 정치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상이라는 글자가 '살피다'나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관상(觀相)이나 수상(手相)이라는 말도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마세요. (340~341)
상(相)이라는 한자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이해했다.
관상에서 사용되는 '상'이 살피다, 감시하다는 의미를 가졌다니 말이 된다.
독서습관1054_강신주의 장자수업 1_강신주_2023_EBS(250511)
■ 저자: 강신주
철학과 삶을 연결하며 대중과 가슴으로 소통해온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 동서양 철학을 종횡으로 아우르며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인문학적 통찰로 우리 삶과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들에 다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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