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목격했던 근대사는 쓸 수가 있을 것 같으므로 갑자년(1864년)에서부터 신해년(1911년)까지의 역사를 총 3편 100여 장으로 나누어 서술하여 이를 '통사(痛史)'라고 하였지만 감히 정사(正史)라고는 할 수 없다. 이제 이 글을 통해 우리 동포들이 다행히 국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라며, 절대로 이를 저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466~467)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미루고 미루다 2025년이 되어서야 완독 했다. 최근에 읽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에서 일본의 잔혹함에 충격을 받아 구한말 역사를 알고 싶어 과감하게 도전했다. 학창 시절 많이 듣기는 했지만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책이 『한국통사』였다. 어떤 책이든 필요와 호기심이 생길 때 손이 간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2732
[1011]碑銘을 찾아서 : 京城 쇼우와 62년_이토 히로부미가 살고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다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지 않고 승리해 오늘날까지 한반도를 지배했다면'이라는 가정이 현실이라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런 가정을 전제로 한 소설이 『비명을 찾아서』
bandiburi-life.tistory.com
『한국통사』에서 '통'이 한자로 通으로 생각했다. 실제는 고통을 의미하는 '痛'을 썼다. 우리나라의 마음 아픈 과거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박은식의 의도일 것이다. 박은식은 1859년에 태어나 임시정부의 두 번째 대통령이었고, 1925년에 사망했다. 저자는 구한말 조선왕조가 허물어지는 과정부터 일본에 합병되는 순간까지 온전히 삶으로 체험했다. 그가 정리한 이 책은 뼈아픈 우리의 역사를 자신의 해석을 담아 기술했다. 그래서 한국통사의 통을 '痛'으로 썼다.
책의 초반부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 시간순으로 개괄해서 설명한다. 이어서 한반도 전체의 주요 지역에 대한 특징을 설명한다. 그리고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어떻게 빼앗아갔는지 자신의 소감과 함께 자세히 역사를 기술했다.
반복적으로 저자가 한탄하는 부분은 한 나라가 부강하기 위해 군사력이 강해야 하는데 조선후기에 우리의 현실을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흥선대원군이 내치는 열심히 했지만, 외국에 대해 문을 걸어 잠그고 폐쇄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로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앞서나갔지만 우리는 도리어 퇴보하는 원인이 되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이 당파싸움으로 서로의 이권을 챙기기에 급급했고, 국력을 키우기보다는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에 빌붙어서 살아남으려 했다. 박은식은 책의 곳곳에서 이런 위정자들의 행태를 비판한다. 친일과 친청이 뒤바뀌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런 국가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국방을 튼튼히 한다는 것은 요원한 상황이었다.
일본은 주변 국가들의 상황을 봐가며 한반도의 이권을 하나하나 확보했다. 결정적으로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부터 노골적으로 고종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강요했다. 이완용, 송병준과 같은 친일파들은 일본의 국권 침탈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자신과 일족의 안위를 위해 국가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도덕과 양심은 사라지고 자신의 영달과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를 알고, 자신을 돌아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의 교육이 중요하다. 『한국통사』는 서서히 저물어가는 조선이 일본에게 망해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현재를 보게 하는 훌륭한 책이다.
책에서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해전을 치르는 부분이 독자들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자세히 묘사되었다. 배의 이름도 필요 없었고, 어디에서 일본이 이겼고, 졌다는 사실이 뭐가 중요하겠나. 일본이 이겼고 우리의 독립은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박은식이 직접 경험한 1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우리의 아쉬웠던 시대를 전체적으로 둘러보며 역사여행을 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아래는 책에서 인용하고 싶은 문장을 인용했다.
효종은 그들에게 설욕하려는 차원에서 무비(武備)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현종 자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보좌하는 신하들은 그를 보필할 만한 재목들이 못 된 데다, 강희제의 융성기를 맞이하여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이후부터 나라에 외환이 없어지게 되자 나태에 빠져 허례허식만 숭상하고, 군정을 폐지하기에 이르렀으므로 국력은 더욱 쇠약하게 되었다. 한편 숙종 · 경종 때부터 현종 · 철종대에 이르기까지 당쟁은 더욱 심해져서 국민들의 사기가 꺾인 데다 외척들이 전권을 잡아 정치를 하니 뇌물이 성행했고, 국고가 텅 비고 국민의 생산이 퇴폐하게 되었으며, 세상 풍습이 더럽혀져 인심이 헤어나질 못하여 국가 정세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다. 이때 광무제(고종)가 즉위했으나, 세계정세가 변화무쌍하고 강대국들이 서로 다투어 사변이 자주 일어나게 되니 환란은 더욱 심해져 갔던 것이다. (72)
단지 고금을 통할 수 있고 국내외를 관찰할 수 있는 학식이 부족하여 개인의 지혜를 내치에 치중하니 과격한 경우가 많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배척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쇄국정책을 편 탓에 스스로 소경이 되었고, 마침내는 화가 아주 가까운 주변으로부터 미쳐왔으니, 나라가 중흥할 수 있는 시기를 잃게 된 것은 참으로 원통하고 애석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한스런 역사가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76)
무릇 프랑스인이 온 까닭은 포교 때문인데 이들을 죽인 것은 학살이며, 미국인이 온 까닭은 통상인데 이를 거부하고 싸운 것은 완고한 것이었다. 만일 그때 국교를 체결하고 정치 · 예술 · 교육 · 산업의 장점을 받아들여 백성들을 계몽하고 실력을 배양했다면 자립할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90)
즉 붉은 종이에 임명될 자의 관직과 성명을 친필로 쓰시어 이부로 보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임금이 날이 갈수록 정치에 관심을 가져 대원군은 물러났지만,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자의 충성 다툼과 관리의 기강 문란이 역서부터 생겨났고, 뇌물과 아첨이 끊이질 않아 망국에 이르게 하니 대원군을 무너뜨리려던 민규호의 계획이 나라의 운명을 해치게 된 것은 통탄할 일이다. 이로써 귀족 가운데 대원군에게 미움을 받았던 자들이 민씨 문하에 몰려들어 심복이 되는 자가 급격히 늘고, 대원군과 관계있는 자는 전부 몰아내니 정치 판도가 일변했다. (93~94)
우리나라는 유학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상공에 종사하는 자들을 천하게 여겨, 허문(虛文)만을 숭상케 하고 실업을 게을리한 지가 이미 오래됨으로, 당장 저들과 상업적 경쟁을 벌인다면 그들을 물리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게 되어 그들에게 탈취당하게 될 것이니, 그들에게 뒤진다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106)
그날 저녁 대원군이 답례차 청군 숙소를 찾아갔는데, 마건충이 말하기를, 왕비의 생사도 모르고 국장령을 발표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며, 반란군이 저지른 죄를 면제하는 것은 국법을 무너뜨리는 것이므로 대원군 자신이 북경으로 가서 변명을 하라고 했다. 밤이 깊자 수행원을 구금한 뒤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남문을 빠져나왔고, 밤이 새기 전에 양화진을 거쳐 인천에서 기선으로 천진까지 보내고, 계속해서 보정부에 억류시켰다. (112~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가네코 남작이 다년간 미국에 머물면서 조선의 개발 책임은 일본이 전담하는 것이 좋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다니자, 전직 대통령 태프트(Taft)가 루즈벨트와 상의한 후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117)
이리하여 개명 진보할 수 있는 길은 점점 막히고 완고한 세력이 득세했으며, 임오군란으로 운현궁과 가까웠던 자들은 다 배척되고 갑신년의 변란으로 개화당에 속했던 자들도 모두 제거되니 요직에 올라 정권을 장악하고 국권을 흔드는 자들은 아첨과 사치를 일삼는 외척들 뿐이었다. (123)
독립이라는 것도 자력으로 쟁취해야 기초가 튼튼하고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남의 힘으로 얻게 된다면 독립이라는 것도 이름뿐이고 그나마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이런 점을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125)
이로 말미암아 사대부들은 친구간이라도 말조심을 하게 되었고, 바둑판 주변에 모여 앉아 도박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며 우스갯소리로 소일하게 되었다. 말하는 바가 국가의 일에 해당되면 세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어떤식으로든 해꼬지를 해올 것이므로 마음을 죽여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134)
그러나 동학당이 정치를 개혁하고 민생을 보호한다는 원래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배우지 못하고 미천한 오합지졸들이었다. 그러므로 지방에서 분풀이와 폭정에 대한 응징은 행했지만 담력과 학식이 부족했던 탓에 중앙 정부의 개혁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138)
당시 나(박은식)는 서울에 있다가 원병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길가는 사람에게 "동학도는 오합지졸이라 관군들이 힘써 소탕하면 진정시킬 수가 있을텐데 어찌 중국에 원병을 청했다는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구구하게 일어나는 내란을 스스로 진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급함을 구해달라고 하는 것은 국가의 치욕이 아닌가? 또한 천진조약에 명시된 바에 따라 만약 청국에서 파병하게 되면 일본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양국 군대를 불러들이게 되면 우리나라는 어찌 무사히 보존될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니, 그는 대답을 못했다. (142)
주역에서 말하기를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보태며 물건을 고르게 베풀라" 하였는데,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아주 중요한 비결이다.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신체 한쪽만 위하고 전체 몸을 돌보지 않는다면 병신이 되는 것이니, 국가도 학문을 장려하되 한 학문만 편중하면 다른 학문은 피폐되고 나라가 병들게 되는 것이다. (162)
정조 초년부터 '세도(世道)' 혹은 '세도(勢道)'라는 것이 생겼는데 이는 정권을 장악한 자를 뜻하는 말이며,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그 권력은 임금에 다음 가니 재상 이하가 이들의 명령을 들으며 생사여탈이 자유자재이니 말 한마디에 전국이 진동하였다. 그러니 전국의 금은옥백이 실려져 밀어닥치고 창고마다 가득차게 되었다. (...) 그러기에 세도의 다툼은 당쟁보다 더했고 이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천하의 대악을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하려 들었다. (188)
서양 철학자가 말하기를 "정치는 국민 심리의 반영이라" 했는데 우리나라 정계의 형세가 이러할 때는 국민의 심리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의사가 병자를 보면 그 증세를 진단한 다음에 약을 먹이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의 심리상 병의 근원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검토해 보면 양반 사회의 관직욕이 그 원천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우리나라의 관직은 양반이 아니면 얻을 수 없고 양반은 가문의 음덕을 빙자하여 교만하고 무위도식하는 자가 많으며, 다른 나라의 관직은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리지만 우리나라의 관직은 이처럼 무위도식하는 무리를 구제하려는 자리이다. 한번 관리가 되면 명예와 수입이 남보다 우월하여 일생을 편히 지낼 뿐만 아니라 자손까지 그 영향이 미치니 관직은 제일 유리한 직업이다. (189)
양반 사회의 당쟁이 관직 쟁탈에서 나온 것이며, 평민 사회도 이런 악습이 전염되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편하게 살 궁리만을 계획하며, 노동을 천시하여 기피하고 권세에 아부하여 사회를 조종하는 것을 유일한 능사로 생각하고, 서로 양보하는 정신이 소멸하고 사소한 싸움만 일삼아 온 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가장 큰 병이다. (190)
우리나라 민중 단체 가운데 유력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갑오년(1894년)의 동학당, 정유년(1897년)의 독립협회, 갑진년(1904년)의 일진회(一進會)가 그것이다. 동학당의 폭력과 일진회의 매국은 거론할 필요도 없지만, 단지 독립협회는 유식한 신사의 조직이며 그 정신도 본받을 만한 것으로서 그 실패는 우리 민족이 통탄해 마지 않는 바이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지식의 기초도 역시 유치하고 조잡함을 면치 못하여 허영에 급하고 성급하게 날뛰었으니 어찌 성공을 바라겠는가. (217)
무력이 강한 자는 작아도 큰 것을 이기고, 야만도 늠름함을 자랑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민이 2천만 이상이지만 병력은 불과 만여 명이므로 만일 세르비아나 불가리아처럼 아주 작은 나라와 인접했다 하더라도 그 침략을 방어하기 어려운데 우리의 현실은 강대국과 인접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옛날 삼국시대에는 무력이 융성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사방에서 군사들이 모여들었는데 오늘날 이토록 유약해진 까닭은 정치가 옳지 못한 탓이다. (273)
<일진회>라는 것은 우리 민족 가운데 어리석은 자들이 송병준, 이용구 일당의 꼬임에 빠져 헛된 부귀를 꿈꾸며 모여든 장님 집단이다. 일본이 갑오년에 우리 독립을 부르짖고 갑진년에 독립을 보증하여 천하를 속이고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니 방해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도 한국 병합을 실행할 때 거짓말로 조약을 어겼다는 사람들의 비판이 두렵고 우리 민족 전체의 저항을 염려하여 일진회를 민간단체라 부르고 이를 이용한 것이다. 즉 민간 단체의 찬성과 동의가 있었다면서 천하의 입을 막고 우리 민족의 저항을 줄여 보려고 금전으로 비호하고 세력과 부귀로서 유혹하여 이들을 장악한 것이다. (319)
잘 잊어버리는 악습이 있었기에 경종을 울려 그 위험을 알렸건만 이제는 돌침을 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 팔뚝이 여러 번 부서져 치료방법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잊어버린다고 하는 중독증에 예전부터 걸려 자신의 몸도 잊고 나라도 잊으니 잊는 것이 어찌 그리 많다는 말인가. 40년간 존귀했던 임금이 이제 오늘에는 갇힌 꼴이 됐으니 바로 이는 자주 잊어버리는 독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원수와 같은 것이다. (365)
동양척식회사라는 것은 한국 토지를 개척하여 일본 농민을 정착시키려고 조직한 것이며, 일본인의 한국 이주 작업에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 내막은 제대 군인을 우리나라에 이주시켜 한편으로는 농경에 종사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병력을 증강하는 이른바 둔전병제(屯田兵制)를 실시하려는 것이다. (378)
(...) 위에서 말한 자는 물론이거니와 이용원 · 김윤식 · 김학진 · 이용식 등도 모두 귀족의 자손이며, 높은 원로의 자손이며, 배운 사람들인데도, 어려서 배울 때 충효를 벗어나지 않았고, 날마다 의와 이가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법을 배웠을 텐데도, 합방하는 날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지 아니하고 금전과 봉작을 달게 받았으니, 일본이 합병하는 보수로 주는 훈공을 받고도 태연하게 세간의 염치라는 것을 모르고 호화롭게 잘 입고 잘 사는 것만 일삼으니, 아무리 현인이 없기로서니 어찌 여기에까지 이르렀는가? (393)
본래 일본인이 우리 한국인에게 말하기를, 양국은 순치 관계요 뿌리가 같고 문자가 같은 형제국이며 한국인은 우리 스승의 후손이라 했고, 천황은 한국의 독립을 옹호한다고 했으며, 일본 정부는 한국인을 지도하고 영토를 보전한다는 말을 명백하고도 정중하게 선언했다. (...) 그러나 승리를 얻은 일본은 의기양양한 나머지 침략의 야욕이 더욱 커져 중국 합병론을 말하는 자도 있었고, 세계 통일론을 말하는 자까지 나왔다. (401)
그러나 통감부 설치 이래 학계에도 청천벽력이 떨어져 자라나는 새싹을 꺾게 되었다. 즉 대성, 오산, 안흥 학교는 폐교를 당하게 되고 나머지 학교도 엄격한 감독을 받았으며, 교과서에도 국가와 민족에 관한 내용은 일체 금지하고 교사의 언행과 학생의 행동을 주야로 감시했다. 재력가로서 교육비를 기증하면 배일파로 지목했으므로 이로 인해 사기가 떨어지고 학풍이 시들었으며 모든 교육기관이 쇠퇴했다. (406)
일본인 요시다는 문학박사로서 조선의 역사를 없앨 것을 창안한 사람이다. "조선 역사가 존재하면 일본이 조선문화를 받았다는 것이 남아 있게 되어, 조선 역사를 없애버려 그 흔적까지 없애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운운하였다. (408)
한편 황실의 존엄을 유지해 주겠다고 하며 갑자기 폐위를 시켰고, 화폐를 개량한다고 해놓고 재산을 다 빼앗았으며, 병제를 대신해 주겠다고 해놓고는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교육을 지도해 주겠다고 해놓고는 학교를 폐쇄시키고 서적을 불태웠으며, 한국을 부강하도록 해놓겠다고 하고는 부의 원천을 모두 빼앗아가 조금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행복을 증대시켜 주겠다고 하면서 산업을 유린하여 먹고사는데 힘들어 허욱적거리게 했으니 이러한 것도 모두 그들이 속여서 이익을 얻은 대표적인 것들이다. (436~437)
독서습관1014_한국통사_박은식_2011_범우사(250225)
■ 저자: 박은식
황해도에서 가난한 농촌 서당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호는 겸곡 · 백암. 필명으로 무치생 · 태백광노라 함으로써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박은식의 생애는 제1기(1859~1897): 주자학을 수학하고 그 가치관에 의해 위정척사 사상을 지녔던 시기, 제2기(1898~1909): 언론활동 등을 통해 민중계몽과 개화자강 사상을 지녔던 시기, 제3기(1910~1925): 망명 이후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업적을 남긴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박은식은 언론인으로서, 구국계몽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활약하였고,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사(1900), 오성학교와 섭구협성학교 교장(1909)을 역임하는 등 교육가로서도 활동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겸곡문고》(1901) 등 수편을 저술하고, 수십 편의 논설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번역서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
(...) 그러던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지병인 기관지염의 악화로 1925년 11월 1일, 독립쟁취를 호소하는 유촉을 남긴 채 서거하였다. 그의 유해는 상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68년 만인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됨으로써, 고국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독서습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15]아시모프의 코스모스_태양 별 행성 은하의 관계를 숫자로 이해하는 책 (0) | 2025.03.01 |
---|---|
[1012]그리고 아무도 없었다_황정은의 한국 추리 단편소설 네 편 (0) | 2025.02.28 |
[1013]빵과 장미_1912년 미국 방직 노동자 파업과 아이들을 돌본 배러 사람들 (1) | 2025.02.26 |
[1011]碑銘을 찾아서 : 京城 쇼우와 62년_이토 히로부미가 살고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다면 (0) | 2025.02.25 |
[1008]설국_도쿄의 시마무라가 만난 설국의 고마코의 정열과 요코의 순정 (0) | 2025.02.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