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겨울이 오면 온 동네를 무겁게 짓누르는 눈더미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암울함이 동네를 뒤덮고 있지만, 그래도 고향의 품은 거기에 깃든 생명의 면면한 흐름을 넉넉하게 품고 있다. 타인의 고뇌와 아픔을 곧 자신의 고뇌와 아픔으로 느끼고 감싸 안는 정이 살아 있는 것이다. 도시로 떠났던 젊은이가 다시 돌아와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넘치도록 꽉 차 있지 않은 헐렁함 덕분일지 모른다.
지금, 시류에 따라 시대착오적이라 해석되는 그 정과 헐렁함이 오히려 정겹고 그립게 다가오는 것을 향수라 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필요한 것은 시대를 이끄는 거대한 기치와 인생을 뒤흔드는 불같은 정열, 혹은 타인을 앞서는 빛나는 성공이 아닐 수 있다. 무코다 이발소에서 오늘도 드나드는 동네 사람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일에 충실을 기하는 야스히코처럼, 정든 동네와 땅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끼리 따스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와 오늘 하루를 뿌듯하게 사는 작은 성취감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317~318)
위의 옮긴이의 말이 이 책 『무코다 이발소』를 아주 잘 정리했다. '군고구마처럼 따끈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아주 적절한 한 줄 요약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저출산과 고령화, 지방소멸을 경험했다. 이 책은 홋카이도의 시골 공동체가 배경이고 주인공이다. 1950년대 탄광으로 번창했지만 1960년대 이후 석탄 산업과 함께 쇠퇴했다. 자연스럽게 인구 감소가 뒤따랐다.
80세가 넘은 부모세대와 이를 모시는 50대의 자녀세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젊은이들은 학업을 위해, 직장을 찾아 도시로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간신히 유지되는 주유소, 이발소, 술집, 상점 등이다.
일본보다 더 빠르게 저출산과 고령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우리의 현실이 오버랩되었다. 수도권이 더욱더 강력한 인구의 블랙홀로 성장하고 있다. 반면에 제2의 도시인 부산을 포함한 지방은 급격히 축소되는 있다. 홋카이도 도마자와 면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다.
충청도 작은 면에 고향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 고향 마을에서 이런 변화가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도마자와에서 인구가 감소하며 장년층들이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이 한반도 지방에서 살며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과 유사하다.
일본과 우리의 현실이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어 소설은 쉽고 재미있다. 도시로 떠난 자녀가 고향을 살리겠다고 돌아오는 이야기, 40대 총각이 중국인 아내와 결혼하는 이야기, 도시에서 잘 나가는 줄로 알았던 여인이 고향으로 돌아와 술집을 차리며 고향이 활기를 띠는 이야기, 도마자와 면을 홍보하기 위해 영화 촬영을 지원하고 엑스트라로 참여했지만 연쇄살인극에 대한 내용이라 실망했던 이야기, 고향에서 수재였던 친구가 도쿄에서 사기를 치고 도망자 신세였지만 자수하는 이야기 등 우울하지만 달달한 고구마 같은 사연들이다.
겨울이 길고 눈 덮인 도마자와 면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다. 이발소를 운영하며 쉰세 살의 야스히코는 마을의 여러 갈등과 웃음의 중심에 서 있다. 사람들은 많지만 서로가 모르는 타인인 도시에서는 찾기 어려운 따듯한 인간관계가 도마자와가 건재할 수 있는 이유다. 맹목적으로 도시의 삶을 꿈꾸며 도시로 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잠시나마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오랜 기간 살았지만 늘 팍팍한 삶을 뒤로하고 도마자와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인구가 줄며 추운 겨울의 적막한 시골은 더욱 썰렁하다. 그런 고향이 좋다는 그의 말을 도마자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 사람도 없는 조용한 시골로 오려하느냐는 거다. 양쪽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 정확하지 않을까.
자식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을 잇거나 새로운 사업을 통해 도마자와에 활기를 불어넣으려 하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인다. 젊은이가 돌아오고 싶은 곳,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지방을 만들자, 이대로는 안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재미있어서 출퇴근 시간을 포함해 하루 만에 금세 읽었다.
독서습관 1004_무코다 이발소_오쿠다 히데오_2017_더난콘텐츠그룹(250203)
■ 저자: 오쿠다 히데오
따뜻한 유머와 날카로운 통찰력, 특유의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창조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소설가.
1959년 기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1997년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로 늦은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2002년 괴상한 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 더 풀』로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며, 2004년 같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공중그네』로 제131회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쉽고 간결한 문체로 인간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면서도, 부조리한 세상에서 좌충우돌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잊고 있던 가치를 묻는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포스트 하루키 세대를 이끄는 선두주자로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과 함께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일본의 크로스오버 작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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