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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89]1940년 체제 ①_일본의 전후 회복과 고도성장기 후 석유파동 1945~1979

by bandiburi 2024. 5. 17.

<1940년 체제>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전한 이후부터 30년 침체기를 경험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본은 가난을 빠르게 극복하고 고도 성장기를 누리며 세계 경제 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에 버블이 터지며 장기 불황을 경험했다.

1940년생인 저자 노구치 유키오가 직접 시대의 변화 현장에서 경험한 실화들이 담겨 있다.
대장성 공무원으로, 미국 유학 중 목격한 현장 및 일본 대학에서 가르치는 과정에서 경험하며 느낀 내용들이다. 
그래서 딱딱하지 않다. 여러 사실을 나열하다보니 약간은 두서없어 보이는 부분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왜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다. 
1980년대 일본인들의 생각의 변화였다.

'성실하게 일하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부동산이나 그림, 골프장 등으로 쉽게 돈 벌 수 있다는 '부의 연금술'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의 큰 변화를 읽지 못하고 '1940년 체제'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부동산이나 코인으로 단기간에 불로소득을 올리려는 풍조가 만연한 2024년 현재의 대한민국에도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고 우대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데 한 표를 던진다. 
미래 세대에게 건강한 사회, 서로 신뢰하는 사회, 최소한 생존이 보장되는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전제돼야 한다. 
저자가 일본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동시에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똑같이 필요한 메시지다. 

다음은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과 소감이다. 
양이 많아서 1부와 2부로 나눠서 포스팅한다.


일본은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 8일 이후에도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적어도 6월에 종전이 됐더라면 많은 일본인의 운명이 극적으로 뒤바뀌었을 테죠. 이것은 전쟁이 끝난 후 제가 쭉 품어온 의문입니다. (...) 지도자들 그 누구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항복 결정이 계속 늦춰진 것뿐입니다. (20)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이 독일과 같이 1945년 5월에 항복했다면 계속되는 폭격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한 일본인들의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지도자들의 책임회피 심리가 수십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미국의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일본의 대기업에 대해 "전후에 태어난 기업은 오로지 소니와 혼다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올바른 견해입니다. 전후 일본의 대기업 중 상당수는 전시에 정부의 손으로 세워졌거나 군수로 급성장한 기업들입니다. (26)

소니와 혼다를 제외한 일본 대기업이 전쟁 중 군수산업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국전쟁으로 그 기업들이 사라져야 했지만 군수산업으로 다시 부흥한 것이다. 

 

제1장 전후에도 계속 살아남은 전시체제 1945~1959

불탄 자리에서 서민이 생계를 애면글면 꾸려나갈 때 중앙 관청의 관료들은 전후 경제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맨 먼저 궁리한 건 자신들의 생존이었지만 말입니다. (39)

조직 개편과 동시에 이들 부처에서 전시 중 지도적 위치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공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대장성과 상공성 등 경제 관청은 거의 상처 없이 살아남았습니다. 일본 전체에서 20만 명 이상이 공직에서 추방당하고 있는 가운데 대장성에서 쫓겨난 이는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았죠. (41)

대장성과 같은 경제 관청이 대부분 그대로 살아남았다는 부분을 알려준다. 이 문장은 한국의 현재 정부기관을 생각해 보게 한다. 중년이 되며 느끼는 바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보다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곳이 기획재정부라는 점이다. 모든 일은 돈이 연관되고 돈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도 비슷한 상황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들 사기업에 대한 개혁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죠. 분할된 기업도 점령군 통치 시기가 끝나자 대부분 합병되어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금융기관은 거의 상처 없이 살아남았습니다. 이는 점령군이 전쟁 시기에 만들어졌던 은행 중심의 금융 시스템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43)

일본에서 전후 개혁의 한계를 보여준다. 점령군에 의해 미흡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미군정이 이뤄진 해방 후 남쪽에서 이뤄진 친일청산에 비해서는 원활했다고 본다. 해방기에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는 결국 미군정이 통치의 편의성을 위해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친일 했던 사람들을 대거 재기용하면서 미완으로 끝났다. 안타까운 역사다. 그 흔적이 현재까지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허버트 패신은 이렇게 된 기본적 원인은 "점령군이 일본의 관료 제도를 잘 몰랐던 탓"이라고 말합니다. (46)

기업 측에서는 주주가 경영에 관여할 수 없게 되자 그 부가 효과로 경영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후계자를 선택하는 관례가 정착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 대기업은 내부 승진자 중에서만 경영자를 뽑게 된 것입니다. (50)

일본 기업의 내부 승진 특성이 시작된 이유를 설명한다. 주주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업별 조합은 회사와 운명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경영자와 대결하는 게 아니라 협조하여 기업을 성장시키려는 의식이 강합니다. 전쟁 후 고도성장 과정에서 이러한 성격을 지닌 일본의 노동조합은 기업 각각의 성장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51)

우리 기업들도 활용했던 방법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기업, 산업화 시기에 노동자보다 성장이 우선하던 시대의 모습이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잘사는 나라 일본의 체제였을 거다. 

농지 개혁, 차지법 차가법 개정, 인플레이션, 재산세 등 각종 원인으로 일본의 지주계급과 부유층은 몰락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귀족 계급과 불로소득으로 경제를 지배하는 자본가 계층이 온존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전쟁 이전의 지배계급이 전쟁 시기와 전후 십수 년에 걸쳐 일소되어 '일억 총중류'라는 사회구조의 기초가 세워졌습니다. (62)

일본에서 지주계급과 부유층이 몰락하고 사회주의 적인 '일억 총중류' 사회를 지향했다. 대한민국에서 실현되지 않았던 모습이 전범국인 일본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유럽은 자본가 계층이 살아남았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일본 경제가 패전 직후의 부흥에서 고도성장으로 이행한 계기는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이었습니다. (...) 일본에게 이 전쟁은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을 '한반도 전쟁의 전략물자 보급기지'로 삼은 덕분에 일본의 시장 수요가 크게 증가하는 '한국 전쟁 특수'가 발생한 것입니다. (73)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전쟁이 패전으로 신음하는 일본 경제를 부활하는 불소시개가 되었다. 

제2장 고도성장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1960~1970

195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개인 소비와 공공투자가 증가하여 국내시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설비투자가 증가했으며, 설비투자가 다른 설비투자를 낳는 순환으로 경제가 급성장했습니다. 수출이 늘어난 것은 국내시장의 확대에 따라 규모의 경제가 발생하여 경쟁력이 높아진 결과였습니다. (130)

한국전쟁으로 빠르게 되살아난 일본 경제는 성장을 거듭하며 수출 경쟁력을 갖춰간다. 

 

제3장 일본 기업들, 석유파동을 이겨내다 1971~1979

이른바 '일본 열도 개조론'이란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둔 1972년 6월 다나카 가쿠에이의 저서에서 발표된 지방 개발 정책입니다. "일본 전역을 고속도로와 신칸센 등 고속 교통망으로 연결해 지방 공업화를 추진, 지방 과소와 대도시 과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177)

'일본 열도 개조론'이란 말을 많이 들었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중에 일부는 우리가 적용했다. KTX 교통망을 전국에 구축하고, 지방으로 공기업을 이전했다. 하지만 교통망의 확충만으로는 다른 인프라가 부족한 지방이 수도권을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하는 부작용만 나았다고 본다. 

PC의 등장에 인터넷 보급까지 더해져 변화는 가속되었습니다. 일본 경제제도의 기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대변혁(정보통신혁명)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85)

1997년 IMF를 경험하며 국민 모두가 고통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인터넷망을 구축하며 정보통신혁명의 흐름을 탄 대한민국은 현재까지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후의 인공지능이나 전기자동차와 같은 새로운 혁명의 흐름을 적기에 올라타야 한다. 정부의 선택과 집중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 미래를 향한 철학을 보여줘야 한다. 

1970년대 초반의 짧은 기간 동안 달러와 원유, 달러와 금, 달러와 다른 통화 간에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사실상의 고정 가격 제도가 붕괴하면서 시장에서 가격이 변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 상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191) 

'1940년 체제'는 1950년대, 1960년대의 자원 자금, 자금 부족 국면에서 전략적인 산업 부문에 자원이 우선적으로 배분될 수 있게 해 전후 부흥과 공업화를 촉진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석유파동이라는 외부 위기에 일본 경제 전체가 최적으로 대응하도록 크나큰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195)

'1940년 체제'는 일본이 1970년대 석유파동까지 내외부의 위기에 총력적으로 대응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는데 최적의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때는 위기의 원인이 된다. 2부로 이어진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2352

 


독서습관 889_1940년 체제_노구치 유키오_2022_글항아리(240516)


■ 저자: 노구치 유키오

1940년 도쿄에서 태어나 1963년 도쿄대학 공학부를 졸업했으며, 1964년 대장성에 입성하여 경제 관료로서 활동했다. 1972년에 미국 예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교수, 도쿄대학 교수, 스탠퍼드대학 객원교수, 와세다대학 파이낸스연구과 교수를 거쳐 현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문 분야는 일본경제론, 1974년 닛케이 경제 도서 문화상, 1979년 마이니치신문 이코노미스트상, 1980년 산토리 학예상 및 일본부동산학회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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