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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87]홍세화의 공부 ③_평생 공부의 시대와 안정된 삶의 보장된 사회

by bandiburi 2024. 5. 13.

홍세화의 공부 (출처: 정약용도서관)

<홍세화의 공부> 3부 포스팅이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책이라서 인용도 많다. 독서를 하며 보지 못했던 시각을 갖고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이 땅은 '가해자의 땅'입니다. 가해자가 계속 권력과 영화를 누리는 땅이고 그 가해가 한 번도 제대로 정리되어보지 못한 나랍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물적 토대를 장악하고 있고 재생산 구조를 아주 강고하게 가진 그런 구조 속에서는, 인간의 탈을 쓰고 과연 그러한 것을 할 수 있겠나 싶을 정도의 형태로 반성하지 않게 됩니다. (105)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 남쪽에서 제대로 된 일제 청산이 되지 않으면서 현재까지 기형적인 지배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 미군정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군사정권에서 호위호식했던 사람들, 사람들을 고문하고 사실을 조작해서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은 역사 앞에서 반성도 사과도 없었다. 그 후손들은 자신의 노력도 없이 사회의 기득권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제대로 정리되어보지 못한 나라라고 한다. 부당하게 얻은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국가의 자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재생산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뻔뻔할 정도로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변해야 한다. 

진보운동 내부의 물적 토대 문제와 얽히면서 민주노총이 가진 기반은 천 만 비정규직이나 프레카리아트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졌습니다. (109)

진보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연대해야 하지만 그 내부에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나누어졌다는 아쉬움이다. IMF 이후에 양산된 프레카리아트들은 앞으로도 더욱 비중이 늘어날 것이다. 이들에 대한 보편복지의 확충은 사회 발전의 필수조건이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거, 교육, 건강, 노후, 고용 등입니다. 첫째는 주거 문제, 결국 인간의 존엄성에 맞는 주택과 주거 환경을 가질 수 있을까? 그다음에 자식을 낳았는데 교육 양육을 제대로 시킬 수 있을까? 그다음에 자기가 병이 들었는데 돈이 없다고 치료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또 나이 들었는데 돈이 없어 길거리에 나앉지 않을까? 등등. (...) 그러니까 각자의 필요에 맞춰서 일단 다 얼마씩은 주는 걸 토대로 자기가 가장 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알아서 돈을 쓰도록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란 겁니다. (116)

최근에 전국민 대상으로 25만 원을 지급하는 의견에 대한 찬반 의견이 많다. 소수자, 사회적 취약계층, 경제적 약자들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면 좋겠다. 기본소득이나 보편복지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거나 기피하는 문화도 결국은 젊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적인 이해득실을 극복해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길이 어느 쪽인지 공론화하고 합의해서 진행할 일이다. 당정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늘 미래보다 정치색이 우선으로 보인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청년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쑥쑥 성숙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책들, 그래서 향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책들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글쓰기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하기를 바라지요. (121)

독서와 글쓰기는 스마트폰 시대에 현실에서 더 멀어졌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길어졌다. 계속해서 변하는 시대에 배워야 하고, 개인의 사회적 역할이 기대되는 때다. 독서를 하며 생각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야 한다. 글쓰기를 통해 숙성된 생각을 드러내는 연습도 유용하다. 

(출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홈페이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동참하면 더욱 좋겠지요. 그런데 기본소득에 관한 공부도 그 자체만으로는 깊이를 갖기 어렵고 인문 사회과학 전반에 관한 공부와 만나야 되겠지요. (122~123)

기본소득에 대한 공부 이전에 사람에 대한 공부 즉, 인문학과 세상에 대한 공부 즉, 사회과학을 알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한다.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홈페이지)

미국 등 강대국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약육강식이 관철되는 국제 사회에 대한 비판, 금융자본주의 체제와 세계화가 잉태한 문제들, 성장주의와 기후문제 등 오늘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를 바란다면 디플로르 읽으라고요. (127)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개탄하는 소식을 접하곤 한다. 기자다운 기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들린다. 기사를 취재하고, 분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기자를 보기 드물다. 더구나 우리에게 전해지는 기사의 대부분은 미국의 시각이 많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20년 생활하며 느낀 바를 이야기한다. 편향된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같은 정보를 읽으라고 권한다. 바로 1년 정기구독을 끊는다.

네이버 경제뉴스 제목을 가끔 둘러본다. 제목에서 신문사의 색깔이 드러난다. 인터넷 기사가 넘치는 시대에 속도도 중요하지만 유료라도 양질의 정보를 보고 싶다. 

우리가 영어를 공부하는 시간과 노력의 절반을 떼어내 한국어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입니다. 우수리로 남는 게 있다면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공부하고요. 말이 사유고 사유가 곧 말이라고 할 때, 한국어로 사유하는 우리가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한들 한국어로 사유하는 층위 너머로 잘할 수는 없으니까요. (129)

영어에 대한 관심은 늘 높다. 자식들에게 투자하는 비용도 적지 않다. 하지만 모국어인 한국어를 잘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의 사유체계가 한국어이기 때문에 한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곧 외국어 능력이다. 거꾸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말이 사유고 사유가 곧 말'이라는 문장이 참 멋지게 들린다. 

(...) 정치는 두 개의 구성 요소를 가집니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입니다. 극우 세력이 공포를 주된 무기로 사용하여 동원한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분단된 우리가 더 잘 겪고 있는 일인데, 유럽의 극우 세력에겐 아랍, 무슬림, 난민과 테러가 있습니다. (136~137)

정치가 공포와 희망으로 구성되며, 극우 세력은 주로 공포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말이 요즘 우리에게 꼭 들어맞는 느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대화와 타협의 보이지 않는다. 상식적인 판단이 기대되는 상황에서도 억지와 뻔뻔함을 앞세운다. 희망의 정치를 보고 싶다. 

사실 굉장히 우려수러웠죠. 촛불 이후에도 '콘크리트 지지층'은 다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층은 상당히 많은데 설득도 안 되고 대화도 토론도 안 되지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일부가 계속 지극히 낮은 사유 수준에 머물러 있고, 자신의 사유세계에 도무지 회의가 없는 상태... (141)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이란 말이 참 부끄러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은 없이 무조건 지지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발전은 결국 구성원들이 사유하는 힘으로 결정된다. 기형적인 교육의 결과물이다. 

제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정말 경악하면서 동시에 비감에 젖었던 광고가 "당신의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였어요. (...) 그러니까 당신의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는 말이 잘사는 사람한테는 야만이 아닐지 몰라도 못 사는 사람한테 그 얘기를 한다는 건 야만인데,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중파 광고를 통해서 나올 만큼 한국인의 인간성 자체가 훼손되어 있는 지점들이 있는 거죠. (142)

한국 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경쟁을 조장하고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다. 우리는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불평등과 능력주의에 찌들어 있는 것이다. 외부의 관찰자 입장에서 볼 수 있던 저자에게는 경악할 정도의 광고였다는 점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잔인할 수 있을까. 

몸도 늙었고 생각도 고루해요. 80~90년대에 당시 20~30대에 운동에 참여했던 세대가 지금도 시민사회운동의 해게모니를 쥐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주지 않습니다. 젊은 세대가 아지 조직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겠지만, 저로서 선 기성 운동권이 대학생들이나 비정규직 알바생들의 조직화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고, 또 젊은 활동가들에게 기회를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어요. (147)

사회 활동가들의 세대 교체의 필요성이다.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이 여전히 주도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조언이다. 최근에 국민연금 개혁안에 대해서 미래 세대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점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고령인구가 많아진다고 하지만 세대를 아우르는 의사결정에는 젊은 층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사회운동을 하는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주의 이념의 지배 아래 우리는 국민의 의무는 강조 받았을지언정 '국가의 의무 = 국민의 권리'의 혜택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국가를 '국가의 오른손'과 '국가의 왼손'으로 나눈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을 빌려 온다면, 우리에게 국가의 오로지 오른손뿐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우리의 정치 현실은 프랑스 신부가 정치의 기본 소명이라고 강조한 사회적 연대의 실현은커녕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그 끝자락을 보여주었듯이 권력 남용, 정경 유착, 부정부패, 국가 폭력의 온상이었지요. 한국 사회의 만연한 탈정치화 현상은 이와 같은 정치 현실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151)

보수정부가 집권한지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최근에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주범이었던 최순실과 관련된 뉴스가 들린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 관련 유튜브 방송이 보도된다. 또다시 '자기 성찰'과 '비판 의식'의 부재가 떠오른다. 부끄러움과 겸손, 인간에 대한 양심이 부족하다. 자신의 노력에 비해 과도하게 받았다면 겸손해져야 한다.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흥분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치가 혐오스럽다고 정치를 멀리한다면 혐오스런 정치는 누가 바꿔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정치는 다시 혐오스런 정치인들의 독점물이 되어 계속 혐오스러운 상태로 남게 되니 사람들은 계속 정치를 혐오하게 되고... 악순환이지요.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젊은이들의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뿐인데 그런 젊은이들은 극소수에 머물고 주변화되고 있습니다. (152)

정치에도 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젊은이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정치의 분위기를 선진화할 수 있는 세대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연습이 교육과정에 포함돼야 한다. 

한국의 초중고 교실에서는 사유하는 교육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문 사회과학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인문 사회과학 공부를 주입식 암기 교육으로 한다는 것은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내용을 숙지시키고 얼마나 잘 숙지했는지를 놓고 경쟁시키는 것인데, 이런 전체주의 교육의 당연한 결과로서 비판성과 주체성은 형성될 수 없습니다. (155)

우리 교육의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는 문장이다.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시민을 키우는 교육이다. 성인이 되어서 간신히 사유의 힘을 깨달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비교와 경쟁의 사고에서 열등감과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 틀을 벗어나야 한다. 부모와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교육 정책이 중요하지만 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우리 교육의 현실을 직시하고 가정에서라도 생각하는 훈련, 토론하는 훈련, 비판적 사고를 연습하도록 해보자. 

선동하기보다는 설득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사회가 한국 사회입니다. (156)

2024년 총선 전후로 정치권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만으로도 갈등을 조장하며 선동하는 말이 우리 사회를 질식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다. 우리 사회와 정치의 수준이 그렇다. 

한국엔 개별 주체가 시민성도 없고, '사회성'도 결여돼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스무 살 내외에 사회과학을 접하게 되어 사회를 다시 보게 되는데, 중고등학교 때 예컨대 소설 같은 걸 통해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이나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관계에 관한 간접 경험이나 학습도 없는 상태인데, 사회과학을 접하면서 사회를 설계한다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고민이라든지 숙고나 자기성찰이 빠진 거죠. 인문학적 토대가 있은 뒤에 사회과학에 접근되어야 되는데 이것 없이 사회과학과 만나고 의식화됐을 때 오는 무리가 운동권들한테 있지 않나 싶은 거예요. (187)

운동권 세대에는 대학입시 중심의 교육을 마치고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경험했어야 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통한 사람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 사회과학을 접하게 되면 건전한 시민성을 갖추기 어렵다. 이런 의식화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저자의 비판이다. 

비판성이야 당연히 견지해야 되는 것이고, 비판적 지식인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사회 비판적 사회 참여적 지식인이 점점 줄어들고 있거나 없어집니다. 이건 사실 위험한 겁니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195~196)

사회에 대해 비판할 수 있고, 참여하는 지식인이 많아야 건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그런 지식인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다. 경직되고 획일적인 사회는 퇴보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장려되는 사회로 가야 한다.  

대부분의 한국 사회 구성원은 일생 동안 두 번 학습한다. 한 번은 대학 입시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취업, 임용을 위해. 오랫동안 학습하느라 지친 탓도 있겠고 물질 중심 사회에서 취업, 임용으로 긴장이 마감되는 탓도 있다. 공부가 일생의 과제가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미완의 존재라고 할 때, 죽는 순간까지 '나를 짓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204~205)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대부부의 역할을 대신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이제는 두 번 학습한 것으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기에는 변화가 너무나 빠르다. 결국은 '나를 짓는 일'은 끊임없이 지속되야 한다. 공부란 삶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공부란 결국은 시험을 위한 것도 아니고, 누구와 경쟁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책으로는 실습으로든 익혀나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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