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고미숙은 고전평론가이다. 1960년 강원도 정선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학부에서 독문학을 했으나 4학년 때 듣게 된 강의를 통해 국문학으로 바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치게 된다.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좋은 벗들을 통해 ‘삶의 기예’를 배웠으며 덕분에 강연과 집필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1년 10월부터는 ‘수유+너머’를 떠나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벙커특강을 통해 고미숙 교수의 강연을 처음 듣게 되었다. 듣는 순간 이 분의 생각이 내가 평상시에 생각하고 있던 방향과 꼭 맞아 행복한 시간이었다. 중고등학교 자녀를 둔 부모 입장에서 공부라는 것에 대해 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다.
특히, 질문이 없는 대학생들, 독서력이 없는 학생들, 시장의 그물에서 허우적대는 아이들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우리 교육 현실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학입시에 올인하는 문화는 여전하다. 하지만 지금은 깨어 있으면서 이러한 문화로부터 바람직한 배움의 길로 가고자 노력하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주변에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학원과 과외라는 사교육이 마치 필수품인 듯이 어렵게 모은 돈을 쏟아붓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의 길은 죽을 때까지 즐겁게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움이 새로운 것에 대한 깨달음을 알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나아가는 길이면 더욱 좋겠다. 이 책은 ★★★★★를 줘도 손색이 없다. 짧지만 많은 생각의 여운을 남기는 책으로 강력히 추천한다.
아래는 마음에 와닿은 부분을 발췌했다.
[8] 하지만, 진정 놀라운 건 그게 아니다. 그 누구도, 어떤 청소년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그게 더 끔찍한 일이다. (중략) 어린 시절부터 하도 문제지만 풀다 보니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몽땅 망각해 버린 것일까?
[9]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이 없으면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평생 남이 제출한 질문지에 답을 쓰느라 바쁠 테니까. 그건 실로 청춘에 대한 모독이자 삶을 노예화하는 지름길이다.
질문들은 세상천지에 널려 있다. 공부란 무엇인가? 학교를 떠나는 순간 공부가 끝나는 것이라면, 생로병사에 대한 통찰력은 언제, 어디서 배워야 하는가? 학교에선 왜 독서하는 힘을 길러 주지 않는가? 독서와 공부는 서로 다른 것인가? 교과서에 나온 지식들은 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더 나아가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행복의 조건은? 나와 민족과 세계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혹은 인간과 동물과 기계의 경계는 무엇인가? 등등.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27] 학교가 자본과 권력의 욕망에 달라붙은 ‘기식자’(테크노크라트)들을 양산해 내는 동안, 그 외부에서는 전혀 다른 유형의 지적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름하여 대중지성! (중략) 대중보다 더 대중적이고, 지식인들보다 더 지성으로 충만한 집단, 테크노크라트들이 ‘지식, 자본, 국가’의 삼위일체 속에서 움직인다면, 대중지성들은 그 외부에서 ‘지성의 교해’에 몸을 던진다.
여기에선 성적과 자격증, 사회적 통념과 위계 따위는 아무런 효과도 발하지 못한다. 대중지성을 움직이는 힘은 오직 앎에 대한 열정이다. 생명과 존재, 삶과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들, 그것만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들은 외친다. 학벌, 자격증, 기득권 따윈 필요 없어! 우린 다만 앎에 목마르고, 공부에 굶주렸을 뿐이라고.
[32] 학교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노예로 만든다.
학교는 교육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자금, 사람, 그리고 선의를 독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회제도가 교육에 관여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고 있다.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에서)
[35] 이런 분포는 어디까지나 근대적 학교제도의 산물이다. 동일한 연령대의 학생들을 같은 장소에 몰아넣고 같은 내용을 주입하는 것. 그럼으로써 모든 차이와 이질성을 말끔히 지워 버리고 아주 평균적으로 상식적인 존재, 곧 국민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학교에 주어진 소명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엇비슷한 연령대 외에는 서로 뒤섞일 만한 공간 자체를 빼앗겨 버린다.
[42] 그 이중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인생과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는 것. ‘빈민의 인문학’ 코스로 유명한 얼 쇼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빈민들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급진적’인 행동이다.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빈민들에게 정치적 삶을 가르치며, 진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공적 세계로 이끌어 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쇼리스, <희망의 인문학>에서)
[48] 공부 안에서라면 노인과 청년은 권위와 위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막상 공부를 하게 되면 나이 든 분들이 집중력이 훨씬 좋다. 체력은 좀 부족하지만 잡념이 없는 데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폭이 넓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10대와 20대는 체력은 좋지만, 잡념이 많고 경험의 폭이 좁아서 텍스트를 장악하는 능력이 훨씬 뒤떨어진다. 그러니 공부는 ‘젊을 때, 머리가 좋을 때 하는 것’이라는 건 말짱 거짓말이다. 게다가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공부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일진대. 거기에는 우와 열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갈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따름이다.
“남이 한 번 해서 그것에 능하다면 자기는 백 번 할 것이며, 남이 열 번 해서 그것에 능하다면 자기는 천 번 할 것이다.”(중용)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꾸준히 밀고 가는 항심과 늘 처음으로 돌아가 배움의 태세를 갖추는 하심, 공부에 필요한 것ㄴ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50]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이제 가문이 망했으니 네가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났구나.” 참 대단한 아버지다. 보통 아버지 같으면 당장 가문을 살릴 방도를 마련해 보라고 닦달을 하겠구만, 이 아버지는 쫄딱 망한 주제에 아들한테 마침내 독서의 찬스가 왔으니 절대 놓치지 말라고 한다. 이 황당한 아버지에 따르면, 독서, 이 한 가지 일은 “위로 성현과 짝할 수 있고, 아래로 뭇 백성을 깨우칠 수 있으며, 그윽하게는 귀신과 통할 수 있고, 밝게는 왕도와 패도의 방량을 터득하여 우주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책을 손에서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55] 독서를 외면하는 대안학교라? 언어도단! 상식적인 말이지만, 그런 다양한 활동이 신체와 ‘통’하려면 무엇보다 근기(根器)가 튼실해야 한다. 근기란 쉽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에너지 분포도’ 같은 것이다. 그릇이라고도 하고, 카리스마라고도 한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성적이나 학벌이 아니라, 바로 이 근기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충전할 수 있는 길은 단언컨대 독서밖에 없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58] 독서가 변방으로 밀려나 버리자 고등학교는 물론이거니와 대학과 대학원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사회에 나가서도 공부란 여전히 성적과 동일한 말이 되어 버렸다.
‘서울대 증후군’이란 게 있다. 수능이나 대학입학 성적을 다 늙어서까지 외고 다니면서 자신을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경우가 그것이다. 공주병에 못지않은 나르시시즘이다. 그런가 하면, 학교 때 성적이 안 좋았던 사람들은 자신은 평생 책과는 인연이 없다고 치부해 버린다. 결국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간에 이래저래 평생을 성적에 발목이 묶여 사는 셈이다.
(중략)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를 쓴 다치바나 다카시에 따르면, 도쿄대 학생들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책을 읽는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 결과 물리학과 학생들이 대학에 와서 기초 수학에 대한 과외를 받는 실정이란다.
[61]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학교가 유포한 환상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 사람들을 제도적 서비스에 길들이는 것이라 한다. 즉, 서비스가 좋아질수록 삶의 질이 향상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의료체계가 복잡해지면 건강해진다고 여기고, 학교가 많아지면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고 착각하고, 고속도로가 뚫리면 생활수준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결과는 자립적 활동력을 상실한 신체, 곧 제도에 길들여진 노예들을 길러 낼 뿐이다. 오호, 유감스럽긴 하지만 맞는 말인 거 같다. 우리 교육 현실이 딱 그 꼴이다. 시설과 서비스는 나날이 좋아지는데, 학생들의 창의성은커녕 나날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64]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콩도르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즉, 기존의 배치를 거스르면서 전혀 다른 욕망의 지도를 그려 낼 수 있는 과감성, 전혀 다른 삶을 창안할 수 있는 상상력, 뭐 이런 것들이 창의성의 진짜 의미에 가깝다.
[65] 함께 살면 먹는 거나 입는 것이 몇 배로 풍족해진다. 또 굳이 노후대책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함께 노년을 보낼 친구가 있는데, 무슨 대책이 또 필요하단 말인가? 중요한 건 의기투합하는 친구가 있느냐인데, 바로 어릴 때부터 이걸 훈련하면 된다는 것이다. 의리, 우정, 신의 – 창의적으로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가치를 몸에 익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조금만 발상을 바꿔도 세상엔 기막힌 일들이 널려 있다.
[66] “공부는 즐거운 일이 되고 노는 일은 공부하는 일과 통할 때 공부도 진정한 공부요 놀이도 정말 즐겁다”(임형택, <공부가 놀이요, 놀이가 공부다>)는 경지를 실현하는, 아니 그걸 실현하기 위해 매진하는 교육은 진정 불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반드시 환기해야 하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면 청소년들이 백지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눈만 뜨면 광고와 인터넷, 각종 동영상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시각적 폭격을 해대는데,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는 그 유혹들로부터 자신을 지켜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지금 같은 시대에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건 청년기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설치해 놓은 빽빽한 그물망에 그대로 걸려드는 걸 의미한다.
[67] 토론이건 체험학습이건 그것이 강도 높은 학습의 과정이 되려면 고도의 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자기 생각을 바꾸겠다는 치열한 의지도 뒤따라야 한다. (중략)
체험학습 역시 마찬가지다. 여행과 수련회 등 갖가지 다양한 체험을 한다고 해서 저절로 창의적 사고를 하게 되는 건 아니다. 개나 소나 다 해외여행을 하는 마당에 여행 자체가 뭔 의미가 있겠는가. 신체를 육박해 들어오는 절실한 질문이 없다면, 그저 값비싼 레저를 즐긴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문화가 만연하다 보면 어려운 건 하지 않고, 쉽고 폼나는 일만 즐기는, 겉멋만 잔뜩 든 주체들만 양산하기 십상이다.
[71] 독서와 논술을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어진 문제에 답하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남이 제출한 문제를 푸는 ‘대상’에서 스스로 문제를 던지는 ‘주체’가 되는 것. 요즘 말로 ‘자기주도적’ 학습이 여기에 해당한다.
[78] 유영이 남긴 글 중 학문을 권하는 <권학문>가의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 이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 가르친다 하더라도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 / 이 또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 부모가 가르치는데 자식이 배우려 하지 않는 것 / 이는 자식이 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 배우기는 하되 힘써 노력하지 않는 것 / 이 역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88] 고등학생들이 대학을 선택할 때, 어떤 교수가 있는지 그 학과의 분위기는 어떤지 등을 고려하는 일은 거의 없다. 커트라인과 등급, 장학금 여부, 이런 정보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니 대학 신입생들이 대학에 대한 모든 기대가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하는 거야 당연지사, 자업자득이다.
[92] 어느 대학을 가건 혹은 평생 대학을 가지 못하더라도 좋은 스승과 벗들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대학을 못 가는데 어떻게 스승을 만나냐고? 충분히 만날 수 있다. 대학 밖에도 멋진 스승들은 얼마든지 있고, 또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나를 이끌어 줄 존재들은 계속 출현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인복이다. 속된 말로 인복만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게 무에랴.거꾸로 세상 모든 걸 다 가져도 인복이 없으면, 인생 참, 꿀굴해진다.
[97] 들뢰즈의 <카프카>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낭송회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소리 내어 읽어 주자, 청중들이 포복절도했다는 것이다. 엉? 아니, 한 샐러리맨이 어느 날 깨어나 보니 벌레가 되어 있더라는, 그 난해하고 심오하기로 이름난 소설을 들으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우연한 기회에 그게 결코 허언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102] 낭송이 지니는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것은 소리를 통해 몸의 안과 밖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집합적이다. 즉 혼자서 할 때조차 그것은 외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소통에의 욕구가 없이는 낭송이 불가능하다. (중략) 낭송이란 일상적으로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 집단적으로 암송을 하노라면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도 터득할 수 있다.
[104] 경전을 터득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만, 외국어를 습득하는데도 암송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박노자 선생님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다양하고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천재 중의 천재다. 그런데 그가 한국어를 익힌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북한에서 러시아로 들어오는 <노동신문>, <춘향전> 등을 몽땅 큰소리로 외웠다는 것. 그런 방법으로 노르웨이어, 중국어, 한문에다 산스크리트어까지 익혔다고 한다. 실제로 외국어를 익히는 데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그 나라 말로 된 수준 높은 작품을 하나 골라 주구장창 소리 내어 암송하면 된다.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올 때까지. 기타 다른 종류의 지식을 습득하는 데도 암송은 실로 효과만점이다.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보통의 적성과 학습 의욕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만약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반복학습)의 교수를 받게 된다면 2~3개월 만에 습득할 수 있는 기능은 많이 있다”.
[109] 구술 능력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구술 능력이란 단순한 말솜씨가 아니라, 삶과 인간,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의 표현이다. 그것이 없이는 이야기를 엮어 가기가 결코 쉽지 않다. (중략) 삶에 대한 통찰 혹은 애정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엮는 능력이 생기고, 거꾸로 이야기의 맛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과 인생에 대한 깊은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므로 글쓰기 훈련을 하기 전에 이 능력을 먼저 키워야 한다. 즉, 책을 읽은 다음 독후감이나 감상문을 쓰게 하는 것보다 자기식 어법으로 재현해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13] 사교육 시장에 내몰리고 싶지 않은 꼬마들, 성적의 위계와 입시의 중압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청소년들, 기성세대의 고루한 관습에 저항하고 싶은 청년들, 시각의 지배에 예속되기를 원치 않는 직장인들, 매너리즘에 찌든 일상의 회로를 벗어나고 싶은 아줌마들, 삶의 비전과 지혜를 통찰하고 싶은 노인들 – 이 모든 ‘대중지성’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독서뿐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
[126]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중략) 그들이 진정 박탈당한 것은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통찰할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었다. 한 번도 지적 풍요로움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늘 충동에 내몰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범죄와 마약의 수렁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129] 그러므로 고전을 읽기 위해 친구를 부르는 일은 이 팍팍한 레일을 벗어나 친밀성의 공간을 구성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돈과 권력, 기타 다른 종류의 위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학벌과 세대, 직업과 성별의 한계를 간단히 넘어서 찐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고전은 평생토록 읽고 또 읽어도 끝나지 않는다.
[135] 평생 배움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먼저 간절히 염원하라.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줄 스승을 만나게 해 달라고. 시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정 안 되면 책을 통해서라도 꼭 만나야 한다. “자신의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하려면 모름지기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하고, 스승을 만나려면 모름지기 묻기를 좋아해야 한다.” (이익, 박희병 편역, <선인들의 공부법>에서)
[144] 밑천이 전혀 없을 때, 집단 속에서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약속과 시간을 지킨다, 눈과 귀를 몽땅 열어 둔다, 즐겁게 공부한다, 배운 만큼 실천한다 등등. 그런 점에서 글쓰기 수련은 내게 관계를 구성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지혜를 터득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156] 공부는 무엇보다 자신을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끔 만든다. 베르그송이 그의 책 <창조적 진화>에서 한 말.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이며,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한히 창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에서 변화, 성숙, 창조의 기초에 바로 ‘공부’가 있는 셈이다. 변화하고 싶은가? 아니, 살아 있는 생명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변화하라! 그 ‘변화’가 잘 되지 않는다고? 그때가 바로 공부해야 할 때이다. 삶의 ‘창조적 진화’는 공부하는 자에게만 일어나므로!
[166] 어찌 보면, 몸과 일상이 문명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몸이 곧 삶이고, 일상이 곧 세계다. 일찍이 율곡 이이가 갈파했듯이, “지금 사람들은 공부하는 것이 일상생활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도 높고 먼 데 있어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공부는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는 자포자기해 버린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선인들의 공부법>에서)
[169] 삶을 망각하고 죽음을 향해 치닫게 하는 문명, 우리의 일상은 바로 거기에 터를 내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공부 거리다. 그러므로 영화를 감상하듯 자신의 일상을 곰곰이 살펴보라. (중략) 살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라, 아니, 일상을 책으로 변환하라!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행복조차도 배워야 하는 존재”라고, 좀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다. 특히 현대인들은 행복이 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이유도, 목적도 없이 돈! 돈! 돈! 을 외치며 살아갈 따름이다.
[173]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건 무조건 축복임에 분명하다. 내 몸이 전혀 다른 신체적 조성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그걸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덩달아 행복해져야 한다. 몸의 기운이란 자연스레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어 있으니까.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는데도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행복한 기운이 하나도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가짜거나 문제가 많다.
[174] <주역>의 패러다임에 따르면, 부모 자식 간에도 적당한 상생상극이 필요하다. “나무에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거나 떠버리는 것처럼, 자애롭기만 한 어머니는 결국 자식을 죽이게” 된다.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가지를 쳐주듯이 아이에게도 적당한 극(克)을 줘야” 한다. “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생명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임성원, <평화나눔아카데미 강의록>), 그러므로 이성 간이건 가족 간이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175] “지혜로운 자에게는 지혜 자체가 복이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어리석음 자체가 벌인 셈이다.”(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177] 백혈병 환자들의 히말라야 등정기 (중략) 이들은 산을 통해서 오히려 병을 앓기 이전보다 더 능동적인 리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웃음으로 아토피나 암을 치료하는 모습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감동을 전해 주었다. (중략) 대개 아토피나 암은 마음의 질병이라고 한다. 사실 몸과 마음은 경계를 선명하게 구획하기가 어렵다. 몸이 곧 마음의 표현이고, 마음은 또 몸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문제는 이 둘이 따로 놀기 시작할 때다. 몸이 마음을 버리고, 마음이 몸을 돌아보지 않게 될 때, 그때부터 병이 싹트기 시작한다. 먼저 마음이 닫히면서 기운이 안으로 울체 되면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긴다.
[182] 운명이 궁금하냐? 그럼 네 몸을 잘 관찰해 봐. 네 몸의 동선과 습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관계와 활동. 그게 바로 너의 운명이라고.
남이 봐주는 사주는 아무런 맥락이 없습니다. 내가 자란 환경과 부딪혔던 사건,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주는 자기가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해석하고 창조적으로 삶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186] 나아가 육식은 근대 문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제러미 러프킨의 <육식의 종말>에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육식은 그냥 여러 먹거리 중 하나가 아니다. 특히 쇠고기 산업은 제국주의 상품의 핵심 전략이자 미국식 삶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생체 권력의 거점에 해당한다.
[190] 이 척박한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는 길은 단 하나, 교사가 먼저 공부에 미치는 것뿐이다. 설령 입시를 위한 것일지라도 선생님이 공부에 미치면 자연스럽게 그 배움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따지고 보면 본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억압이고 명령에 불과하다.
[194] 학교는 공부를 독점함으로써 전 사회를 학교 화하고 말았다. 자격증과 학벌, 국경 등 온갖 차별을 뼈와 살에 사무치게 만들어 버리는 불모적 공부법. 그런 공부를 전복해 버리면 천하가 다 배움터가 된다.
[204] 정화 스님의 <대승기신론소>와 박문호 선생님의 ‘뇌과학’, 두 가지는 내게 아주 강력한 통찰의 힘을 준다. 대상을 바라보는 눈과 힘, 공부에서 이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없다.
[209] 즉, 노동해방이란 노동자가 중산층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소외된 노동’이 아닌 자유로운 활동을 능동적으로 창안할 수 있다.
[211]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 소외와의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책을 읽고, 삶을 조직하고, 천하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주자가 말했듯이, “부귀하면 부귀한 대로 공부할 일이요. 빈천하다면 빈천한 대로 공부할 일이다”. (중략) 태어나는 순간부터 입시를 위한 전쟁터에 내몰리고 거짓된 표상의 덫에 걸려 청춘을 다 바쳐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17] 김윤식 선생님 강의가 열렸다. (중략) 주제는 ‘이광수와 고아의식’, 40, 50대 수강생들에겐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킬 만한 테마였다. 한데, 아주 특이하게도 수강생들 중에 10,20대가 상당수 섞여 있었다. (중략)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지식이란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열정과 기운을 전수하는 것임을. 너무나 평범해서 잊혀진 명제, 그리고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시대의 대학과 지식인들이 반드시 환기해야 하는 명제 또한 이것이 아닐지.
[222] 소위 ‘부동산 시세’란 게 아파트라는 돌화폐에다 낙서를 했다 지웠다 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중략) 왜 우리는 크고 멋진 집이 필요한가?
[223] 우리 시대의 아파트란 셋을 넘지 않는 가족이 하루 두세 시간을 점유할 뿐, 대개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이보다 더 썰렁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집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화려한 가구들인 셈이다. (중략)
사람들은 재산을 누리기보다 섬기기 바쁘다. 뼛속 깊이 자본의 노예인 것. “삶이냐, 소유냐?” 이 고전적 질문은 이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자본의 노예가 될 것인가?”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초한다. 사적 소유의 신성함이 윤리적 근간을 이룬다. 따라서 사적 소유가 곧 정체성을 구성한다. 내가 가진 것, 나의 소유, 나의 재산이 곧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이 끔찍한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치열한 공부가 필요하다. 시보다 아름답고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과학책, 린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229] 진정한 공부는 그 자체로 이미 축복이다. (중략) 우리는 다만 천지에 가득한 지혜의 흐름을 세상 곳곳으로 옮겨 주는 다리이자 전령사일 뿐! “무릇 어진 이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면 남을 성취하게 해 준다.” (<논어> ‘옹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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