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박범신은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1973년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3년 ‘상상력의 불은 꺼졌다’고 절필하고 용인 변방의 외딴집 ‘한터산방’에 들어가 3년간 침묵하기도 했다가 1996년 다시 돌아왔다. 그는 내외에서 ‘영원한 청년작가’라 불리기도 하며 자본주의 경쟁 구조에 따른 우리 사회의 반생명적 불모성을 강력히 비난하는 이 책 ‘비즈니스’를 완성했다.
지난주에 읽었던 박범신의 ‘소금’을 읽고 저자의 성향을 알게 되었다. '소금' 말미에 저자의 글에서 이 책 ‘비즈니스’를 알게 되어 바로 빌려 읽게 되었다. 짧지만 흥미로운 내용으로 토요일 반나절만에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은 평범한 가장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게는 쇼킹했다. 한 때 가십거리로서 아이들 과외비를 벌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엄마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설마 하며 넘어갔었다.
책은 시작부터 중학생인 정우의 학원비, 과외비를 벌기 위해 주인공인 정우 엄마가 ‘비즈니스’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남편과 아이가 없는 낮 시간대에 '비즈니스'를 하고 돈을 받는 식이다. 그녀의 친구 주리는 돈을 위해서 사는 여인이다. 돈을 위해 결혼하고 돈으로 치장을 하고 과시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돈과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주리의 영향으로 주인공도 점차 자신의 비도덕적 행동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점차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남편, 외고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서울대까지 보내기를 바래서 악착같이 학원과 과외를 시키기 위해 기를 쓰고 가랑이 찢어지는 삶을 살고자 하는 주인공 정우 엄마다.
'ㅁ' 시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는 마치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것 같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구시가지는 신시가지 노동력 공급처다. 그래서 신시가지는 사람들의 삶에서 꿈이요 이상이 된다. 마치 양지와 음지처럼 보이지 않는 분리가 있고, 계급화된다.
신시가지에 사는 사람들은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더 큰 텔레비전 등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한다. 그곳은 생텍쥐페리의 표현에 의하면 ‘재화의 감옥’일 뿐인 곳이다.
[70] 프란시스 베이컨은 일찍이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라고 말했다. 사진예술의 조류를 설명하던 노교수가, 현대에 들어와서 사진예술은 완전히 자본의 감옥에 들어가고 남은 것은 사진을 빙자한 산업뿐이라고 설파하면서 인용했던 잠언이었다. 자본의 감옥에 들어간 것이 어디 사진예술뿐이겠는가. 정치가 들어가고 문화가 들어가고 사람들의 꿈과 이상도 다 그곳에 들어갔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그녀도 일찍부터 그 감옥에 들어갔으며, 나 또한 이제 그 감옥에 수감되었다.
자본의 감옥, 재화의 감옥은 멋진 표현이다. 매달 급여를 받아 생활하는 샐러리맨으로 만 19년을 넘었다. 사회생활 초기에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매달 꼬박꼬박 주어지는 월급은 마약과 같은 것이다. 크지도 적지도 않은 생활할 만큼의 돈으로서 큰 재정적 충격이 없는 이상 만족하며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안주하기 딱 좋다고 했다. 젊음의 20대 30대가 지나고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시기가 되면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어 마약을 구걸하는 상황까지 간다는 것이다. 꼭 맞는 말이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면서 필요한 만큼의 마약이다. 변화를 주기에는 리스크가 크다. 가족 모두 원치 않게 되는 것이다. 생활의 감옥이랄까?
얼마 전에 후배 직원들과도 담소를 나누다 우리가 생활하는 사무실이 마치 스스로 들어가는 셀프감옥과 같다고 했다. 일주일 중 5일을 셀프감옥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긴 시간중에 적지 않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다.
[129]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을 서울로 보냈다. 아예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외고, 서울대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단계, 그 너머의 또 다른 특수한 곳에 존재했다. 아이를 위해 외국에 저택을 마련한 부모도 있었고, 특별 과외를 시키는 부모도 있었다. 유학 간 아이들이 특별히 받는 과외는 주로 승마나 골프 같은 과목이었다. 그런 아이들은 자신이 성골이라고 믿었고, 귀족으로 성장했다. 귀족으로 성장해 돌아오면, 부모들이 가진 재산이나 기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라 공부해 외고, 서울대를 나온 가난한 집 수재들이 그들의 고용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정우처럼 가진 것 없는 집 아이들은 그들 귀족의 명을 받고 그들의 재산을 더 불리는 전사로 키워지고 있는 셈이었다. 부의 세습적 구조는 날이 갈수록 오히려 깊어졌다. 그리고 그런 구조는 전선조차 뚜렷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세계적이었기 때문에, 뿌리치거나 깨부술 방도가 전무했다. 뿌리치면 실패자로 세상 끝으로 밀려나야 했고, 깨부수려 하면 감옥에 가야 했다. 그러나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귀족의 전사가 되는 길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129페이지에 적은 글은 어렴풋이 이 사회의 심화되는 빈부격차와 부의 대물림을 적절하게 표현한 글이다. 요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는 대한항공 삼남매의 몰상식한 행동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오너의 자녀라고 해서 고위직 임원의 직함을 달고 있다는 것이 좋은 사례다. 재벌의 2세, 3세가 제대로 육체적, 정신적 훈련을 통해 기업을 운영할 능력을 갖고 있다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오너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직함을 달고 덕성도 없는 자가 힘들게 취업해서 승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일반적인 집안의 자녀들을 권위적으로 다루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난한 소시민의 자녀들은 맹목적으로 서울대나 SKY를 추구하며 어린 시절부터 학원을 돌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는다. 부모들은 이것이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해야 할 당연한 과정인 것처럼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돈을 정규교육 외에 학원비 등으로 소비한다. 서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하더라도 사업에 대한 도전의식이나 수완이 없다면 결국에는 어느 기업에 들어가 종으로서 살던가, 국가공무원으로서 급여생활자가 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일부 부모들은 매달 주어지는 봉급이라는 마약에 중독될 수밖에 없는 봉급생활자를 양성하기 위해 주인공처럼 비도덕적인 면까지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정우 엄마는 교육철학이나 왜 교육을 시키는지에 대한 나름의 고민도 없이 남들이 하니 나도 뭔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조바심 내는 극성 부모들의 한 면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도 생각해 봐야 한다. 산업화 시대의 교육방식은 결국 투자대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부유층의 종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종이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원하는 바를 실현하고자 하는 인격체로 자라도록 지원해야 한다.
주인공은 비즈니스를 통해 알게 된 자폐증상을 가진 ‘여름’이 아빠의 인생을 접하면서 점차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특히 주인공이 마지막에 신시가지 개척을 성과로 내세우는 시장을 '타잔'(여름의 아빠)이 납치해 협상 중 뇌졸중으로 응급실에 입원시킨다. 이 과정에서 정체가 드러나 경찰 조사 중에 자신의 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남편과 이혼하며 남편과 정우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고 건조한 감정에 스스로 놀라는 정우 엄마의 고백은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이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가정, 매춘을 통해서라도 잘 교육시키고자 했던 아들 정우에 대한 생각을 할 때 별다른 기억이 없었지만, 잠시 알게 된 ‘여름’이는 애틋하게 다가온다.
짧지만 쇼킹했고,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곱씹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이 나라의 많은 부모들이 이 책을 통해 맹목적인 교육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그 틀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야 할지 진정으로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면 하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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