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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41]나의 생애와 사상_슈바이처의 신학 철학 의학 그리고 음악에 대한 생각

by bandiburi 2024. 2. 21.

슈바이처에 대해서는 아프리카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의사로서 헌신한 훌륭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 학창 시절에 배운 파편적인 그에 대한 지식은 몇 십 년간 한치도 진전되지 않았다. 이 책 <나의 생애와 사상>을 읽으며 슈바이처란 인물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등 음악에도 관심이 많고, 철학과 다른 종교에도 마음에 열려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이 30이 되었을 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몇 년간의 노력 끝에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가봉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1차 세계대전을 마주하고 포로가 되기도 한다. 총 3번에 걸쳐 아프리카 가봉 랑바레네를 방문하며 현지인들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의 기반을 갖춘다. 

슈바이처의 이 책은 그의 삶의 경로를 따라 경험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제목과 같이 생애를 담고 있지만 그의 생각을 담고 있다. 신학, 철학, 종교, 음악, 의료봉사 등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기록했기에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1900년대 전후의 시대상황을 고려하며 그의 생각을 따라가는 게 필요하다.

어렵지만 슈바이처의 사상에 대해 일부분 만이라도 따라가 볼 수 있는 책이다. 개인의 사고를 장려하기보다는 집단의 사고를 따르기 쉬운 이 시대에 독자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도록 도전을 준다. 

다음은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과 짧은 소감을 함께 포스팅한다.


요한이 이러한 질문을 했다는 것은 아무튼 당시 어떤 신자도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만일 요한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었다면, 그런 뜻으로 질문을 했을 것이다. (17)

책에는 슈바이처가 <예수 생애 연구사>와 같이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나온다. 이전에 몰랐던 슈바이처의 다른 면을 본다. 

독일 대학에서는 다른 나라에서처럼 학생들의 공부를 심하게 간섭하거나 끊임없는 시험으로 괴롭히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학생들은 독자적인 학문 연구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이에 대해 얼마나 고맙게 여기는지 모르겠다. (19)

 

우리는 이른바 "테제"의 제목으로 "신약성서 및 신교의 고백 문헌 속에 기록된 제 해석과 슐라이어마허의 최후 만찬론의 비교 연구"를 받았다. 이 테제는 모든 지원자에게 일률적으로 부과되었으며 논문은 8주 이내로 작성 완료되어야 했다. 이 논문의 결과에 따라 수험 자격 유무가 결정되었다. (22~23)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과 대비된다. 학생이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교육, 충분한 시간과 주제를 주고 자료를 읽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결과물을 제출하고 평가하는 교육이 우리에게 없어서 더 부러운 문장이다. 이럴 때 아이들이 사고력과 자기 주도력, 그리고 서로 비교 경쟁하지 않고 협력하는 태도가 형성될 것이다. 

나는 바흐와 더불어 리하르트 바그너도 숭배해 마지않았다. 나는 뮐하우젠 고등학교에 다니던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극장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들었다. 나는 이 음악에 너무나 압도되어 며칠 동안 학교 수업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 없을 정도였다. (21)

바흐, 바그너와 같은 작곡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는 과정이 학창시절에 없었다. 운이 좋게 가정환경이 이런 음악에 노출될 수 있는 학생이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작정 암기하지 않았을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사와 학생, 부모가 모두 서양 음악이나 우리 음악을 일상에서 즐기는 교육 환경이 필요하다. 그래야 성인이 되어서도 다양한 취미를 즐길 수 있는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관심의 문제다. 

나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진리에 대해 저지른 여러 가지 과오의 결과를 자주 다루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열심히 생각하게 되었다. (73)

바흐의 음악은 시적이며 회화적이다. 그 이유는 그의 음악의 주제가 시적이나 회화적인 표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악곡은 이와 같은 표상에서 나와 완전한 음선 건축을 이루는 가운데 전개된다. (...) 이 음악에서는 속세의 불안에서 평화를 동경하다 마침내 이를 맛본 하나의 영혼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체험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88)

파이프 오르간 (출처: thesarniajournal)

파이프오르간의 음질과 효능은 네 가지 요소, 즉 파이프와 통풍 상자와 풍압과 악기의 실내 위치에 의하여 결정된다. 여러 세대 동안의 경험에 따라 옛날의 파이프오르간 제작자들은 파이프를 통해 최상의 균형과 형태를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파이프 제작을 위해 최상의 재료만을 사용했다. (94)

슈바이처는 파이프오르간을 즐겼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다. 이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책으로 출간하는 과정도 언급되어 있다. 유튜브로 파이프오르간 연주도 들어봤다. 무엇이든 계기가 되어 보고 경험하는 과정이 시작이다. 

 

1896년 어느 청명한 여름날 아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조용히 생각해본 끝에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부터는 인류에 직접 봉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55)

(출처: lefigaro)

친척과 친구들이 합세하여 어리석은 계획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나를 보고 타고난 재능은 썩히고 타고나지도 않은 재능을 활용해보려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야만인들 사이에서의 활동은 그로 인하여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의 재능을 썩히는 일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115~116)

이렇듯 나는 도착한 지 몇 주일 안 되어 원주민들의 육체적 참상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에 오겠다던 계획을 그대로 실행하길 잘했다 싶었다. (179)

신학, 음악, 철학 등 여러 분야에 재능이 많았던 슈바이처를 보며 가족이나 지인들은 당연히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려는 그를 만류했다. 슈바이처의 대단한 점은 사회적인 명성 속에서 안주할 수 있었지만 서른 살에 과감히 자신의 소명을 찾아 의학을 배우고 의사가 되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선교지로 떠났다는 점이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개인적 활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인간이 되어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고 할 때 비로소 직업 생활과 더불어 인간 생활이 구제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정신적이고 선한 것에 봉사하게 된다. (...) 이런 일이 많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소홀히 대하기 때문이다. (120)

역사나 철학의 영역에서는 어느 한쪽의 현실감과 다른 한쪽의 독창적인 상상력 사이의 부단한 결투 속에서 진리 규명이 수행된다. 사실에 입각한 논증이라 하더라도 교묘하게 전개된 의견에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133)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차이를 논한다.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역사나 철학은 현실감과 상상력 사이의 지속적인 결투라는 말이 흥미롭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우리들이 정신 생활에서 구세대를 앞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업적만을 여러 모로 무위도식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유산의 상당 부분이 우리의 손아귀에서 차츰 사라져 가는 것만 같았다. (188)

슈바이처는 당시 세대를 정신적으로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 세대의 업적을 사용하기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현재 어떤 상황일까? 

근대 유럽인들이 진보에 모든 정열을 쏟는 것은 거기에서 어떤 개인적 이익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락보다 다음 세대들이 누리게 될 행복에 관심이 더 많다. 그들은 진보에 대한 정열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 그들은 인류를 위해 더 나은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다수가 지지하고 실천하는 이상은 환경을 지배하고 개선할 힘이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194)

사고하는 인간은 다른 생명 의지를 대할 때도 자신의 생명 의지를 대할 때와 똑같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갖고 대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그는 남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 속에서 체험한다. (201)

아무런 사상도 없는 현대의 세계 긍정과 인생 긍정이 지식과 능력과 권력의 이상 속에서 비틀거리는 데 반해 사고하는 세계 긍정과 인생 긍정은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완성을 다른 모든 진보 이상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최고 이상으로 제시한다. (203)

사고하는 인간이 필요하다. SNS의 발달과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이 우리의 생활을 아주 편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위치를 찾고,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소통하는 면은 더 이상 과거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편리함 속에 우리 시간의 상당 부분은 기존에 만들어진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책을 보거나 조용히 사색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남들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명을 구해주며 다가올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날마다 커다란 은총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204~205)

수용소에서는 교양을 위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무엇이든 알고 싶으면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물어볼 수가 있었다. 나는 배울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충분히 이용했다. (215)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한다. 그리고 포로가 되어 유럽으로 이송된다. 수용소에서 평소에 만날 수 없는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나서 배움의 기회를 본다. 긍정적이고 활동하는 지성인이다. 

우리 백인들은 식민지의 토인들에게 - 내 경험은 이들에게 국한되어 있다 - 우리의 지배를 강요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단지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땅에서 물질적 이익을 취할 생각뿐이라면 그럴 권리가 없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복지를 도와줄 생각이라면 그럴 권리가 있다. 이 민족들이 독립해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다소라도 보이면 그들 자신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234)

가봉 랑바레네 (출처: Wikimedia Commons)

1924년 2월 14일, 나는 랑바레네를 향하여 스트라스부르에서 출발했다. (아프리카에서의 두 번째 활동) (254)

이제는 랑바레네에서 일하는 것이 즐겁다. 무엇보다도 의사와 간호사가 충분하기 때문에 지치도록 일하지 않아도 할 일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사업을 가능하게 해준 후원자 여러분에게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270)

슈바이처는 가봉에 계속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과 아내의 건강 등으로 유럽으로 갔다가 총 세 번에 걸쳐 가봉으로 돌아간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족과 함께 의료봉사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다. 현실은 의료설비를 갖추고 유지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합리주의가 처음에는 낭만주의에, 다음에는 정신적 또는 물질적 영역에 주도권을 장악한 현실 정치에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해서 합리주의가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감히 우리 세대에게 말하는 바다. (274)

능동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모든 생명과 하나라고 느낌으로써 세계에 대해 정신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모든 생명의 운명을 자신 속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며 그들에게 가능한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284)


독서습관 841_나의 생애와 사상_알베르트 슈바이처_2004_문예출판사(240221)


■ 저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프랑스 동부 알자스의 카이저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슈바이처의 음악, 철학 및 신학에 대한 다재다능함은 파이프오르가니스트였던 할아버지와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신확과 철학을 공부하고, 소르본과 베를린에서 성서를 연구하는 한편 바흐 연구에 심취하였다. 이십대부터 파이프오르가니스트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바흐의 오르간곡 연주에서 세계 일인자로 손꼽힌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에 쓴 <예수 생애 연구사>는 20세기에 출간된 신학사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평가받았으며, 그 외에도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문화철학>, <J.S. 바흐> 등의 책을 썼다. 

서른 살이 되던 해, 새로 의학공부를 시작하여 7년에 걸친 분투 끝에 의학학위를 받고 연주회 수입과 저작의 인세와 기부금으로 마련한 의료활동 자금을 갖고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의 원시림 속으로 들어갔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온갖 어려움에 부딪혔으나 그는 체력의 한계와 약품과 물자의 결핍을 감내하며 원시림 속의 흑인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하며 복음을 전한다. 아프리카 오지에서의 그의 생명존중 활동은 이후 세계의 시선을 모았고, 195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괴테 연구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았던 그는 이미 1928년 괴테상을 받았고, 1951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되었다. 

생명 존중에 눈떠 평생을 아프리카의 오지에 던진 이 위대한 인류의 봉사자는 음악가로서, 철학자로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모든 것을 오직 아프리카 흑인들의 구원에 바쳤다. 

1965년 슈바이처는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해놓은 랑바레네의 병실에서 딸 레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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