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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30]참담한 빛_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백수린의 소설

by bandiburi 2024. 1. 27.

소설가 백수린을 처음 만나는 책 <참담한 빛>이었다. 총 10개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짧은 단편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인공들의 삶을 여행했다. 모든 소설이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며 작가의 메시지를 전한다. 작가만의 색깔이 독자에게 전해진다.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남은 느낌을 몇 가지로 포스팅한다.

첫째, 과거와 현재가 수시로 교차된다. 현재를 말하고 있는 듯 하지만 갑자기 과거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처음에는 집중해야 했으나, 몇 편의 이야기를 접하며 작가의 패턴을 파악하게 된다. 

둘째,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여러 나라가 무대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한국에 한정되지 않고 이탈리아 베니스 등 여러 나라에서 활동한다. 그 도시의 세세한 골목길을 묘사하는 부분은 작가가 직접 체험한 풍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 

셋째, 결말이 명확하지 않다. 소설의 주인공이 갈등을 해소하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등 독자는 결론을 기대하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하지만 작가의 글은 분명하지 않은 상태로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넷째, 소설의 분위기가 무겁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직접 언급했듯이 일상에서 접하는 상황에서 소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아이디어는 소설 속에서 진전되며 개인과 사회의 이슈를 담았다.

다섯째, 중간중간에 상황을 묘사하는 표면이 많다. 작가 특유의 섬세함이랄까. 독자에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주변 상황에 대한 묘사가 많다. 스토리에 집중하고 싶은데 묘사에 분산되는 느낌이다. 

여섯째, 해설을 보며 백수린 작가의 소설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하나의 단편을 읽어가면 희미한 공통점을 보게 된다. 하지만 뭐라고 언급하기 어렵다. 그런데 책의 말미에 있는 해설을 보며 그래 이런 의미였어라고 문학평론가의 해석에 공감하게 된다. 

다음은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을 소설 제목과 함께 인용했다.


스트로베리 필드

"네가 싫어진 게 아니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이제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야." (28)

 

시차

그녀는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커다란 배낭을 발아래 내려놓은 채 강을 응시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 그의 생모가 그를 보기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60)

 

여름의 정오

어쨌든 그는 살아 있었다. 나도 살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미 그 시절의 오빠보다도, 타까히로보다도 나이가 더 많았다. 그것이면 충분해, 나는 조그맣게 읊조렸다. (92~93)

 

높은 물때

윤은 어느날, 여기는 베네찌아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야,라고 소리 질렀다. 윤의 기세에 이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면 여기는 어디지? 제는 묻고 싶었다. 이곳이 어딘지는 제 역시 알 수 없었다. (200)

제는 피부로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며 "생은 수없이 많은 모멸감과 열패감을 선사할 것이지만 그 와중에 아주 가끔 또 영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할 것이고 또 아주 가끔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할 것이다."라는 문장을 떠올렸는데, 그것은 제가 졸업전시회 팸플릿의 머리말로 썼던 문장이었다. (212)

 

해설

백수린의 소설은 대체로 특정한 과거를 더이상 비밀에 가둘 수 없다는 듯 그에 대해 말문을 여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점차 과거는 단순히 현재를 지탱하기 위한 부기로서가 아니라, '끝내 살아남아' 도무지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다음으로 넘어설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시간, 지금과 나란히 두고 거듭 바라보아야 할 어떤 경로로 자리하게 된다는 데 있다. (301~302)

주어진 대로 무자비하게 이어지는 삶과 달리 소설은 사건의 한복판에 선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의 정체를 사건이 마무리된 자리에서 곱씹도록 만든다. 삶은 두번일 수 없지만, 소설은 삶을 두번 살게 하는 것이다. (302)

백수린 소설에서의 사랑을, 삶 깊숙한 곳에 은폐되어 있는 고통을 말하기 위한 은유라고 말해도 될까. 사랑은 지금 결핍되어 있는 것, 부재함으로써 더욱 강렬하게 사로잡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동원될 수 있는 수사이기 때문이다. (307)

이때 백수린의 인물들은 감각적 이미지에 실리는 현실의 무게를 개인의 앓는 환부로 수용한다. 그 통증에 집단적 차원의 고통을 요약함은 물론이다. 작가는 사회적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개인과 개인이 만나 서로의 고통에 대한 사정을 나누려고 애쓰는 속에서 희미할지언정 서서히 드러날 수 있도록 둔다. (308)

백수린을 읽고 우리는 '지나온 일'을 '지나간 일'로 두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이미 끝난 이야기'란 없음을 증명하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떠올린다. (312)

작가의 말

어떤 것들은 변했고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았는데, 대개 그러하듯 변한 것들은 영원했으면 하는 거였고, 변하지 않는 것들은 변화가 시급한 일들이었습니다. (314)

열편 중 어떤 소설은 누군가가 들려준 꿈의 한 장면에서 시작했고, 어떤 소설은 친구들과의 대화 속 짧은 한두 문장에서 시작했습니다. 화가가 된 파견 간호사의 이야기를 다룬 짤막한 기사나, 노래의 가사, 시의 몇 구절, 희곡이나 소설의 어떤 문장에서 시작된 소설도 있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에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말들과 문장을 모아 쌓아올렸더니, 이런 모양이 되었습니다. (315)


독서습관830_참담한 빛_백수린_2016_창비(240126) 


■ 저자: 백수린

1982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폴링 인 폴>이 있으며 2015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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