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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29]밤으로의 긴 여로_1912년 8월 유진 오닐의 자전적 희곡

by bandiburi 2024. 1. 23.

저자 유진 오닐이 자신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만든 희곡이다. 1912년 8월 어느 날 하루에 한 가족 사이에 있었던 일을 4막으로 구성했다. 오전 8시 30분, 낮 12시 45분경, 저녁 6시 30분경, 자정쯤이다. 안개, 무적소리, 가난, 술, 마약, 죽음, 질병 등 분위기가 음울하다.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 냉소적이며 술에 의지하는 제이미, 형보다 크지만 병색이 완연한 에드먼드, 그리고 가난을 두려워해 인색한 아버지가 등장인물이다. 

이 작품을 탈고한 뒤 오닐은 자신의 사후 이십오 년 동안은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만큼 사적이고 아픈 이야기였던 것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에 등장하는 티론 가족은 어머니의 이름이 엘라가 아닌 메리이고, 두 살 때 홍역으로 죽은 둘째 에드먼드와 셋째 유진의 이름을 맞바꿔 놓은 걸 제외하면 오닐 가족을 그대로 그린 모습이다. (226~227)

1912년 당시 유진 오닐의 가족들 사이에 있었던 증오와 멸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로부터 이십칠 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함께 할 수 없는 가족들을 용서와 이해로 바라본다. 

이미 메리는 다시 모르핀을 맞기 시작했고 단순한 독감인 줄 알았던 에드먼드의 병은 심각한 증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짐짓 태연함을 가장하던 가족들은 두려움이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자 메리는 마약에서, 아버지와 두 아들은 술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메리는 마약의 힘을 빌려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 그곳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세 남자는 술기운으로 절망과 쓰라림을 견딘다. (...) 아버지의 인색함은 가난 탓으로, 어머니의 마약 중독은 돌팔이 의사 탓으로, 제이미의 냉소주의와 뒤틀린 질투는 인생에 대한 좌절 탓으로, 에드먼드의 병적인 비관주의는 다우슨, 니체, 보들레르 탓으로 돌려지고, 각자 마약이나 술기운을 빌려 자신을 변호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면 피붙이다운 연민과 애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보들레르가 노래한 "그대의 어깨를 눌러 땅바닥에 짓이기는" 현실의 무게는 그들로 하여금 서로를 잔혹하게 할퀴고 증오하게 만든다. (229)

관절염과 모르핀 중독으로 집안에서 살며 단절로 인한 외로움을 드러내는 어머니 메리,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친 말을 쏟아내는 두 아들 제이미와 에드먼드, 땅에 대한 집착으로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전등 하나라도 끄라는 인색한 아버지 티론으로 구성된 가족의 하루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하루하루를 연이어 맞이해야 하는 현실은 암울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티론: 다 그만두고 다 피해 버려! 야망이라곤 없는 인간에겐 편리한 인생 철학이지. 고작 하는 짓이라곤......(25)

이런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유진 오닐의 삶의 이력이 결국은 <밤으로의 긴 여로>와 같은 자전적 소설로 재탄생했다.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희로애락의 순간들은 글로 남겨졌을 때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래서 모두의 삶은 한 편의 소설이다. 내가 살아보지 않았던 새로운 시대와 환경으로의 경험을 하는 시간이었다. 

에드먼드: 그래서 하커가 몸소 쇼네시를 꾸짖으러 나타나셨대요. (킬킬대며) 완전히 실책이었죠! 이 사회의 부호들, 그중에서도 특히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부자가 된 인간들은 위대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가 못 된다는 걸 여지없이 증명한 사건이었어요. (27~28)

1912년 당시에도 현재에도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은 부호들이 있다.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가 담겨있다.  

메리: 단 하루라도, 하다못해 오후만이라도 어디 나갈 데가 있다면. 심각한 얘기 말고 그저 웃고 떠들며 시름을 잊을 수 있는 여자 친구가 있다면. 하녀들 말고, 저 멍청한 캐슬린 말고 말야! (53)

어머니 메리의 외로움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다. 절망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메리: (...) 당신이 새로 아이를 가지면 유진을 잊을 수 있다고 아이를 갖자고 우겼을 때 거기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 그래서 에드먼드를 가진 동안 내내 두려웠어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거든요. 유진을 두고 떠난 걸로 난 다시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는 여자란 걸 증명한 셈이니 다시 아이를 가지면 천벌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에드먼드를 낳지 말았어야 했어요. (102~103)

둘째를 홍역으로 잃고 병약한 에드먼드를 낳았지만, 산후 통증을 치료받기 위해 돌팔이 의사에게 모르핀 처방을 받아 중독자로 살게 된 메리가 후회하며 하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후회할 일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에드먼드: (...) 가끔은 마약쟁이 어머니를 둔 게 너무 힘들어요! (메리, 움찔한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신듯 석고상처럼 보인다. 에드먼드는 자신이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고 싶은 심정으로 참담하게 더듬거린다) (...) (145)

에드먼드: (...) (고통에 차서) 제일 참기 힘든 건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여 있는 거예요. 짙은 안개 속에 숨어 그곳에서 헤맨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네요. 고의적으로요. 그게 사람을 죽이죠! 고의적으로 그런다는 건.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우리한테서 벗어나,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잊으려는 거죠! 그러니까 마치, 우리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증오하는 것처럼요! (171)

에드먼드나 어머니 메리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과 증오로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를. 

에드먼드: (...) 어머니가 저를 낳고 심하게 아팠을 때 괜찮은 의사를 불렀다면 어머닌 이 세상에 모르핀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을 거예요! 그런데 아버진 호텔 돌팔이한테 어머니를 맡겼고, 그 돌팔이는 자기가 무식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제일 쉬운 방법을 쓴 거예요. 나중에 어머니가 겪게 될 일은 신경도 쓰지 않고요! 그게 다 싸기 때문이었죠! 아버지는 맨 싸구려만 찾으니까! (172)

어머니의 마약 중독이 아버지가 싸구려 돌팔이에게 어머니 치료를 맡겼기 때문이라며 아버지의 인색함을 비난하는 문장이다. 

제이미: (...) 그리고 네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마약을 시작한 거야. 네 탓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너에 대한 증어를 억누를 수가... (207)

○ <밤으로의 긴 여로>를 소개한 책은 <글쓰기의 시작은 자서전 쓰기에서>


독서습관 829_밤으로의 긴 여로_유진 오닐_2019_민음사(240122)


■ 저자 : 유진 오닐

1888년 미국 뉴욕의 한 호텔에서 연극배우 제임스 오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때문에 호텔을 전전하며 살다가 기숙학교에 들어가지만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적응하지 못해 자퇴한다. 이후 6년 동안 남미와 뉴욕을 떠돌면서 선원 노릇을 하거나 방랑자 생활을 하며 자살을 기도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 후 결핵에 걸려 요양소에 입원한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의 작품을 접하면서 연극에 흥미를 느낀다. 퇴원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습작 활동을 하고, 신극 운동가들과 함께 뉴욕 무대에 진출한다.

<지평선 너머>(1920), <안나 크리스티>(1921), <기묘한 막간극>(1928)으로 세 차례에 걸쳐 퓰리처 상을 수상하고 1936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는다. 마비 증세와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집필에 몰두하여 <얼음장수 오다>(1946)와 <밤으로의 긴 여로>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1953년 보스턴의 한 호텔에서 세상을 떠난다. 사후인 1956년에 발표된 <밤으로의 긴 여로>는 통속극에 머물러 있던 미국 연극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수작으로 그에게 네 번째 퓰리처 상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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