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317~318)
한강의 북콘서트를 통해
5.18 광주항쟁에 관한 <소년이 온다>와 제주도 4.3 사건에 대한 <작별하지 않는다>를 만났다. <소년이 온다>를 읽은 뒤 바로 <작별하지 않는다>를 봤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과 함께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2078
'이념'으로 사람을 편가르기 하고 사람이 사람을 적으로 삼았을 때 어떤 결과를 벌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제주도 4.3 사건이다. 경찰과 군인들에게 어린아이도, 임신한 여자도, 노인도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소설 전반부에서는
대학 졸업하며 처음 알게 된 잡지사 직원 경하와 프리랜서 사진작가 인선의 관계에 집중한다. 제주도가 고향인 인선이 엄마를 돌보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가서 공방을 하고 있다는 정도가 드러난다. 4.3 사건에 인선의 가족이 어떻게 관련되었는지 엄마의 가족사를 통해 점차 드러난다. 소설은 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인선이 제주도에 거주하면서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인선의 엄마가 죽기 전에 유족으로서 억울함을 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유품으로 이야기한다.
우리 근현대사의 안타까운 점을 보게 되었다.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 하에서 살아나서 다시 국민들 앞에서 당당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반민족적 친일 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살아남아 기득권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4.3 사건에 대해 군사정권 시절 내내 유족들이 입을 열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우리 사회의 용기가 필요한 시기다.
인선의 엄마와 아빠, 외삼촌과 이모들이 겪은 일들, 그리고 현재 유골로 남은 피해자들의 실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피해를 입은 자들과 실태 파악을 가로막는 자들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떠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한테는 앞장서 가라고 하고, 아버지는 바닷게처럼 옆걸음을 걸어서 나를 따라왔어요. 두 사람의 발자국을 조릿대 잎으로 쓸어 지우면서. (163)
한강 콘서트에서 작가가 제주도를 방문해 조릿대가 있는 곳을 방문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릿대는 경찰과 군인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눈위에 찍힌 자국을 없애기 위해 필요했다는 사실을 이 문장을 보고 이해했다.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195)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여 마을이 사라졌다. 그리고 한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흔적만 남았다. 살아남은 자들 중 일부는 근처에서 과거를 떠올리며 살았다. 인선의 어머니가 그중 한 명이었다.
일제 때 부역하던 고등계 형사들이 그대로 남아 해방 전에 하던 대로 고문을 한다고, 그렇게 읍내 경찰서에서 죽은 고등학생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듣고 온 뒤로는 아버지 혼자 동굴에 숨어 지내게 했대. (217)
공방의 날로 앞에서 내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지. 수년 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247)
인선은 공방에서 엄마가 살아온 삶을 따라갔다. 엄마의 기억에 남은 상처들을 들여다봤다. 엄마가 왜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물렸는지 알았다.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251)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 나오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316)
독서습관 794_작별하지 않는다_한강_2021_문학동네(231016)
■ 저자: 한강
1970년 겨울에 태어났다.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인터내셔널 부커상, 말라파르테 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산클레멘테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 참여 작가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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