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산 박대성 화백의 강의에서 소개된 인물 '리커란'에 대한 책을 힘겹게 읽었다. 박대성 화백이 투병 중인 72세의 리커란을 당당하게 찾아간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리커란이란 인물이 그림계에서 얼마나 유명한 사람일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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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리커란의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까지 그의 삶을 따라가며 리커란의 그림 세계를 보여준다. 중국어를 한글로 번역했지만 한자를 그대로 사용한 부분이 많고, 중국 미술계에 대한 내용이라 어려웠다. 인명도 그림 관련된 용어소 생소했다.
20세기를 살았던 리커란은 역사의 험난한 과정을 모두 겪었다. 그의 그림 세계도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유럽 화가들의 화풍을 따라가며 그리기도 했다. 결국은 자신만의 산수화를 만들어냈다.
수시로 자연을 찾아 사생을 하며 안목을 키워간 점이 인상 깊었다. 화가란 부단히 자신의 관점을 가지기 위해 자연을 보고 그리며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다양한 그의 작품이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어 '리커란 그림 세계'를 잘 볼 수 있다. 조금은 지루했던 책이었다.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을 아래에 인용했다.
리커란(1907~1989)은 20세기 중국 화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산수화의 혁신가', '시대를 넘어선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당대 중국 회화사에 있어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이정표'라는 칭송을 받았다. (13)
그러나 양무운동은 서구 문화를 수용하면서 단지 물질적인 자연과학만 허용했을 뿐,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척했다. (24)
리커란도 이 해(1929)에 시작한 유화 연구생 모집에 응시했다. 학교의 자유로운 학풍과 서구 신예술 조류를 적극 지지하는 린펑미엔의 방침에 따라, 리커란은 클로도로부터 후기 인상파 양식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동사에 세잔에서 마티스에 이르는 모더니즘, 독일 표현주의 등의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31)
리커란은 개량주의 신봉자로서 중국화 개량의 실천가였다. 그의 성공은 중국의 역사, 사회, 문화라는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의 서양 사회가 거쳐온 예술 발전의 관점에서 보자면 20세기 중국 회화의 발전을 실제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32)
청대의 문자옥(文字獄)은 매우 엄중했기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정치를 언급하지 않는 '소학(문자학)'과 '고거학'쪽으로 연구 방향을 돌렸다. 이는 18세기 이후 고고학의 발전과 더불어, 당 이전의 수많은 비각이 계속 출토되면서 비학의 흥기를 촉진시켰다. (37)
(...) 그 자신이 학자이자 시인, 서법가이면서 독창적인 전각가를 겸했기 때문에 '시 서 화 삼절'이라는 문인화의 전통에 '인(印)'을 추가하여 '시 서 화 인'을 결합하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 (...) 개량주의를 실천한 화가 리커란의 예술 사상은 캉유웨이의 중서융합 사상에서 비롯하며, 또 전통주의를 실천한 화가 리커란은 19세기에 형성된 금석파의 신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전통의 심미 취향과 예술 표현의 특징을 화조화에서 산수화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39)
리커란의 뛰어난 서예 솜씨는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져서 세모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춘련(春聯)을 부탁했다. (...) 빠르게 나아지는 그의 실력을 보고 기뻐하며, 왕친팡은 특별히 그에게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은 하얀 바탕에 물을 들이는 것과 같다"라는 뜻의 '커란(可染)'이라는 학명을 지어 주었다. (42)
함께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던 중 그는 가이쟈오티엔이 한쪽 정강이를 탁자의 횡탱(옆으로 난 버팀목)에 기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한시도 단련하지 않는 적이 없음을 발견했다. 가이쟈오티엔이 말하길 "훈련을 하고자 한다면 태산과 같은 엄청난 무게를 봐야하며, 꾀만 부리는 기교로는 영원히 어떤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다"라고 했다. (78)
인간성이 왜곡되고 파괴되는 시공간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어려운 일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학생들마다 자신의 스승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황당무계한 상황 속에서 리커란도 이 일을 겼었다. 그 역시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92)
'위대한 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은 야만스럽게 피를 딛고 일어났으며 중국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93)
리커란은 이 전람회 서문에서 <나의 그림>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지금 내 나이 팔순에 가까우나 한번도 내 그림에 만족해 본 적이 없다. 내가 만일 백 살까지 살 수 있다면 아마 그림이 좋아지지 않을까 늘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백 살이 되어도 그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현재에 비해 조금 나아질 뿐이다. '무애유지', 즉 사물의 발전은 무궁무진하고 한계가 없으며, 절대적인 완미(完美)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100)
결국 리커란은 1989년 12월 5일 오전 10시 50분, 영원히 이 세상과 작별하고 말았다. (104)
"예술이라는 학문은 무한한 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타인을 감동시키는 고도의 역량을 획득하기 위해 처음부터 성실하게 기본공을 쌓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그 기본 실력을 창작과 결합시키기 위해 평생토록 실력을 쌓아야 한다." (109)
'의경이란 무엇인가? 의경은 예술의 영혼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사물의 정수를 집결한 것이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빚고 녹여 만들어 고도의 예술적인 가공을 거쳐 정과 경을 융합한 것이다. 경을 빌어 정을 표현하는 데 도달하는 것으로, 여기서 표현되어 나온 예술의 경계는 시의 경계이며 이를 의경이라고 부른다.' (113)
시인 가도(賈島)는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자고, 승려는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라는 시를 쓸 때, 문을 두드린다의 '고(敲)'자와 문을 민다의 '추(推)'자 중에 어느 것을 쓸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중에 한유(韓愈)가 '고'자가 낫겠다고 조언했다. 이 글자를 쓰면 문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청각적인 효과가 첨가되어 월야의 고즈넉한 의경을 더욱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 백년이 흘러서도 '추고'는 어느 것이 더 나을지 고민하는 것을 뜻하는 관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113)
사생의 목적은 창작이지 단지 눈앞에 있는 것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만일 기록을 하고 싶다면 사진기를 쓰면 된다. (114)
예술 양식은 그 예술가가 지닌 기질과 소양이 표출되어 나오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모방되거나 위조될 수 없었다. (158)
그에게 사생이란 대상을 숙련되게 표현하는 필수 과정이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재인식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188)
독서습관 792_리커란_완청리_2008_시공사(231012)
■ 저자: 완청리
1945년 북경에서 태어났으며, 북경 중앙미술학원 미술사학과 학사, 같은 학교 대학원 중국화 석사, 미국 캔자스 대학교 미술사학과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홍콩 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홍콩 시정국위임 예술고문으로 있다. (2008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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