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책에 매료되어 <깨달음의 혁명>, <그림자 노동>에 이어 <전문가들의 사회>를 읽었다. 이전의 책에서와 같이 시대와 사회를 읽는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전문가들의 사회>는 이반 일리치 외에 의료, 법률, 노동 등에 몸담은 공저자들의 글이 함께 담겼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932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937
이 책을 읽고 내용에 대해 되새김질하며 자급자족형 농업 중심 사회에서 빠르게 중공업과 서비스 중심 사회로 압축 성장한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첫째, 법률과 의료를 중심으로 한 전문가 집단이 갈수록 자신들만의 성벽을 높이 세우고 있다.
자신들만이 아니라 세습이 용이한 교육 시스템, 법률 시스템을 만들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도전을 장려해서 국가의 중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하기보다는 당장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심화된다. 초등학교부터 의대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교육은 아주 크게 왜곡된 모습의 단면이다.
둘째,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우리 사회에도 조용히 마비시키고 있지 않나 걱정된다.
생각하지 않는 부모, 비판하지 않는 교사의 지도하에 맹목적인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의 사유 능력을 박탈한다. 소위 전문가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기준에 맞는 인간이 되기 위해 교육과정을 이수한다. 기준을 우수하게 충족하는 아이들이 새로운 전문가가 되어 시스템의 벽을 견고히 한다.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자신이 걸어온 과정을 파괴하고 새롭게 세우려는 결단을 하지 않는 이상 문제의식 없이 '악의 평범성'에 마비된 채로 살게 된다. 점진적으로 사회는 인간이 소외되고 전문가들이 정의한 문제를 해결하는 상품만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는 '왜'라는 질문 없이 경쟁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공동체를 위해, 이웃을 위해 나의 시간과 재능을 보내는 일은 장려되지 않는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가 없다. 성장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중요하다. 부모의 상황에 관계없이 아이들은 공평하게 대우받아야 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보살피는 훈련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교사들 마저도 부모의 부와 권력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는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답습하고 학교폭력을 행사한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세습하기 용이한 기득권층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단시간 내에 변화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일탈이나, 재벌 자녀들의 일탈은 일제 일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들이대는 법의 잣대는 참으로 유하다.
우리 사회는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 집단이 우대받는 사회다. 왜 그럴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분해하고 해석한 내용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다. 책에서 남기고 싶은 글과 느낀 점을 아래에 포스팅한다.
궁핍을 가져오는 부를 전 세대가 광적으로 추구한 결과 자유마저 양도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시대, 처음에는 정치를 복지 수혜자들의 조직적인 불평의 장으로 만들었다가 결국에는 친절한 전체주의를 통해 정치를 소멸시켜 버린 시대로 말이다. (16)
사회적으로 부가 늘었다고 한다. 정치는 모든 국민이 늘어난 부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부가 증가할수록 궁핍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불평등이 심화된다. 현재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 전통사회에서는 대가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의 혜택이나 긴밀한 사회관계에 따른 상호부조 덕에 가난도 견딜 만한 것이었으나, 현대의 부는 오로지 상품과 화폐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것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은 필요의 충족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한다.
인간의 '필요'가 있을 만한 분야라면 어디든지 이들 신종 전문직은 지배적이고 권위적이며 독점적이고 합법적인 -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개인을 나약하게 하고 결국 불구로 만드는 - 자격을 주장함으로써 공익을 수호하는 특권적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다. (24~25)
인간의 필요를 정의하고 그 필요에 대한 결핍을 부각한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전문가의 서비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전문가들의 사회'다. 개인은 그 시스템에서 소외된다. 인간으로 시작했지만 인간 자체가 배제되고 전문가만 남는다고 비판한다.
환경의 효용가치를 무상으로 넉넉하게 제공하던 공유자원이 15세기 이후 현재까지 이어진 인클로저(enclosure)를 통해 일부 집단에 전유됨에 따라, 그것을 기반으로 했던 자급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생계활동(subsistence)은 불가능해지고 인간의 삶을 상품이 독점하는 현재의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35)
역생산성: 자본 투입이 임계점을 지나면 오히려 생산성을 저해하는 현상이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오히려 결핍을 심화시키는 현상을 가리킨다. (37)
사람들이 시간을 낭비하는 속력,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 병을 만들어내는 의료의 포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기업과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엉터리 상품들에 사람들이 일정한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이런 의존으로 인해 인간 잠재력이 파괴되고, 그것도 특정한 방식으로 파괴되기 때문이다. 상품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인간이 만들거나 행하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 오직 이 범위 안에서만 교환가치는 사용가치를 만족스럽게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41)
사용가치를 보지 않고 광고를 보며 교환가치에 따라 상품을 소비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인간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이를 살리기 위한 교육이 사라진다. 수많은 병과 건강에 대한 정보를 통해 걱정을 심고 의료 서비스에 의존하게 만든다.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시간이 갈수록 인간의 자급자족 능력은 희미해지고 의존하게 만든다. 질문하고 사유하고 비판의식을 가질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상품이 사용가치의 생산 가능성을 소멸시키고 궁핍을 낳는 부만을 가져오는 것처럼, 전문가가 정의하는 권리는 자유를 소멸시키고 사람들을 권리에 짓눌려 숨 막히게 하는 폭정을 수립할 수 있다. (48~49)
이처럼 임신을 일종의 '질병'으로 이름 붙이자 이 꼬리표는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역할과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에 이르기까지 큰 함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임신과 관련해서 일어난 일은 노화 문제에 와서는 더욱 큰 우려를 낳는다. 왜냐하면 약물 중독자는 우리 가운데 일부일 뿐이고, 술에 중독된 사람은 그보다 조금 더 많을 뿐이며,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절반이지만, 나이를 먹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멍석을 깐 인물이 노화방지 연구의 선구자인 일리야 메치니코프(Ilya Metchnikoff)다. (78)
'아하!'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문장이다. 의료가 돈을 버는 분야로 확장해 가는 사례를 잘 보여준다. 우리 자신의 건강에 대해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의료 서비스는 의심하게 만든다. 의사가 질병을 정의하고 해결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노화'는 모든 사람에게 발생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발생하는 노화까지도 의료 서비스를 통해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하며 '노화 방지'라는 분야를 만들었다. 사람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노화에 대해 두려워하고 회피하고 싶어 한다. 상품이 되고 돈이 된다. 우리가 피상적인 부분에 집착할 때 전문가 집단의 요구에 응하기 쉽다.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이 책은 성찰의 도구로서 아주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개인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질병 역시 '질병'으로 정의하는 한 개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니까. 여기서 '상관없이'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사회 문제를 질병으로 이름 붙이는 과정에는 대단히 중요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질병이란 오로지 특별히 지정된 면허취득자와 수임자들, 즉 의사들만이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86)
과거에는 인종, 민족, 성별, 나이를 들어 직장에서 누군가를 배제했다면, 이제는 신체 상태나 건강을 이유로 들어 승진 부적격자, 업무 부적격자로 판정하고 조기퇴직 대상자로 내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미 배제 사회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지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축조되어 있는 장벽들을 보라. 학교, 식당, 극장, 공공건물, 법원, 심지어 개인주택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온전한 접근과 참여를 배제하기 위해 만든 담장들을 말이다. (89)
사회에 사람의 흐름을 막는 장벽이 적을수록 인간 친화적인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은 가치를 인정받고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협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갈수록 서로 간의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그 자녀들에게 보이는 장벽이 그 좋은 사례다.
인간의 악마성은 악한 동기 자체보다는 무비판적 상투어와 사유의 불능성에서 나온다고 결론지으며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91)
사실,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서비스 제공자와 서비스 제공 시스템, 그리고 서비스 기술과 기법이다. 즉 가면 뒤에는 시장을 필요로 하는 비즈니스, 새로운 성장 가능성을 찾는 경제, 그리고 수입원을 찾는 전문가들이 있을 뿐이다. (100)
아무리 잘 관리되는 서비스 시스템이라 해도 전문 서비스가 인간을 불구화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대중을 이겨낼 수 없다는 생각은 바로 이런 인간적 당위에서 나온다. (...) 인간을 불구화하는 효과로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필요'에 대한 전문가적 가정으로부터 만들어진다. (106~109)
첫째, 필요를 결핍(deficiency)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둘째, 결핍의 소재를 고객 개인에게 두는 전문가적 관행에서 볼 수 있다. 현대의 전문가들 대다수는 개인의 문제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막상 치료에 들어가서는 개인을 맥락으로부터 떼어내는 공통점을 보인다.
셋째, 특화(specialization)다. 특화는 선진화된 기술 시스템의 주요 '생산품'이기도 하다.
전문화된 서비스로 필요를 결핍으로 정의하며, 그와 동시에 그런 결핍을 가진 존재들을 개별화하고 구획화한다. (111)
문제가 당신 개인이듯이 해답은 전문화된 서비스의 제공자인 내게 있다는 것이 그 가정이다. (112)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이 전문가들만의 특권이 되면 시민은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이 특권은 문제를 정의하는 주체로서 시민을 제거하며, 문제 해결자로서의 시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16)
전문가들의 암호 사용이 가져오는, 인간을 불구화하는 가장 치명적 효과는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시민의 능력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질문이고 어떤 것이 답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이 '필요'이고 '치료'인지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전문가 시스템의 관용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117)
법률 서비스에 대한 접근은 일반인에게 참으로 어렵다. 그들만이 사용하는 용어와 절차는 상대적으로 사람들을 무능하게 보이게 한다. 법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에 무조건 변호사를 통해 진행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대해 비판한다. 무엇을 위한 시스템인가 하면 결국은 법 전문가라고 하는 집단을 위함이다. 우리 사회가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는 곳을 변해가고 있다. 뉴스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소와 고발은 법 전문가들의 영역이라고 인식한다. 사람이 존중받고, 소통과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법 전문가들이 나서서 고소 고발을 남발한다. 왜냐하면 교육에 그런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소비자가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독립적인 감독기관이 없으니 이 전문직협회에나 호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률 전문직은 우리가 다른 소비자 서비스를 평가할 때 사용하는 견제 수단을 전혀 활용할 수가 없다. (132)
대부분의 사법 시스템은 변호사 없이 소송에 임하는 당사자들을 포용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원활한 법정 절차를 이기적으로 지연시키고 혼란을 초래하는 괴짜들로 분류되곤 한다. (138)
대부분의 소송인들은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건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을 변호사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받는다.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도 있는 드라마에서 관찰자의 위치로 좌천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변호사들은 소송 당사자의 지시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며 사실도 아니다. (141)
숙련 노동이 노동자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은 다양하고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 숙련된 기계공이 된다는 것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숙련 노동자의 진정한 만족감 가운데 하나는 마치 화가가 된 듯이 마음으로 상상한 것을 그의 두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156)
산업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궁극의 전문가주의(ultimate professionalism)이다. 즉 우리의 '필요'를 교묘하게 부추길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인지 결정을 내리고 그런 무기들을 구비한 전문가 군대 말이다. 우리의 필요가 결정되고 나면 그것들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는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이 제시된다. 시스템 안에서 그대로 남아 생산을 지속하는 것이 그것이다. 문화는 여기서 감옥 - 곧 노동 - 의 외벽 역할을 한다. 노동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 시스템은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양자는 모두 이 사회를 몰아가는 동력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171)
숙련 노동자의 영혼은 완전히 체념하는 법도 없고 '손'이나 '말'의 처지에 만족하는 법도 없기에, 산업사회 - 자본주의 사회든 다른 종류의 사회든 - 를 전혀 다른 사회로 대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노동을 삶에서 분리하지 않는 사회, 그리하여 노동과 삶 모두를 불모화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는데 보템이 될 것이다. (174)
독서습관 742_전문가들의 사회_이반 일리치_2017_사월의 책_230609
■ 저자: 이반 일리치 Ivan illich
'독서습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744]마음의 태도_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생각과 행동의 변화 필요 (0) | 2023.06.11 |
---|---|
[743]그렌델_다시 쓴 베어울프의 전설_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있는 존재의 비애 (0) | 2023.06.11 |
[741]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_암투병과 임사 체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에 대한 사랑의 소중함 (0) | 2023.06.08 |
[740]할매의 탄생_우록리 할머니들의 생애구술사로 보는 인생 철학 (0) | 2023.06.04 |
[739]그림자 노동_자급자족에서 임금 노동으로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통찰 (0) | 2023.05.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