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릴레오 북스에서 소개된 책 성석재의 <투명인간>을 몰입해서 봤다. 한 권을 책 속에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서 담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였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족 어디에나 있었을 법한 서사를 가진 만수 가족으로 구성원들 모두가 생존을 위해 힘겹게 살아가는 내용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부유했던 집안이 쇠락해 화전민들의 마을로 들어간 만수의 조부모, 그곳에서 결혼하고 6남매를 낳아 농사를 지으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만수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똑똑한 큰아들 백수, 듬직한 맏딸 금희, 예쁜 둘째 딸 명희, 우직한 둘째 아들 만수, 약삭빠른 셋째 아들 석수, 그리고 막내딸 옥희까지 육 남매를 둔 가정이다. 화전민 마을에서는 그럭저럭 살만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해서 교육과 일을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현실의 벽과 마주하게 된다. 자식들이 직면한 그 벽은 우리의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들이다.
담임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을 리 없는데도 어쩐지 매정하게 들려서 눈물이 났다. 어디를 가나 돈 없고 실력 없으면 이런 대접을 받게 되어 있구나 싶었다. (159)
그래도 우리는 못 먹고 못 입는 거 아니잖아. 잘 살지는 못 해도 정말 우리 아니면 굶어 죽을 사람 생각도 해야지. (292)
똑똑해서 유명대학에 입학한 백수는 황소를 팔아 학교를 다녔지만 가난에 시달린다. 우골탑이다. 가족의 희망이었던 백수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고엽제 후유증으로 먼 이국 땡 베트남에서 사망한다. 갑작스럽게 장남이 된 만수다. 이후 만수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가족을 위해 살아간다.
백수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보내준 재봉틀로 장녀 금희가 생활비를 마련해서 근근이 도시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백수의 사망과, 금희의 결혼으로 생활은 더욱 힘들어진다.
연탄을 주로 사용하던 시절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에서 산소공급기 한 대에 금희와 명희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잔인했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명희는 평생을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하는 삶을 살아간다.
만수의 삶을 보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자본주의 생태계의 밑자락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전거를 탄 사람이 석수라고 추정된다. 사라졌던 석수가 만수와 자살다리에서 만난 것이다. 석수를 투명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빚들은 평생 우리를 따라다니며 피를 말릴 것이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비참하게 빚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 사회적으로 쓰레기가 되고 친구, 친척, 가족,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 조상에게 죽일 놈이 되는 거였다. 우리를 제외한 온 세상이 힘 있고 백 있고 돈 많은 인간들과 법과 체제가 한 통 속에 되어 우리의 명줄을 조르고 있었다.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무력했고 두려웠고 절망에 빠졌다. (299)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나라에서 하라는 대로 했지만 차별받고 죽음까지 받아들여야 했던 다수의 국민들이 모두 투명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생존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수많은 투명인간들이 있다.
국민 모두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사회보장 시스템이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심화되는 빈부격차를 해소해야 하고, 병들고 나이 들어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보장제도가 필요하다. 사회에 투명인간 취급받는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
행복은 성적순으로 매겨지고 부는 상위 일 퍼센트가 독점하며 권력은 세습된다. 정경유착, 금권언(金權言) 유착, 초국적기업 신정주의(神政主義), 광신적 테러가 그런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363)
이 소설에는 특징이 있다.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다.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화자가 한 사람이지만 <투명인간>에서는 등장인물 모두가 화자가 된다. 소설 초반에는 어색했다.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주의해서 읽어야 했다. 할아버지부터 육 남매 모두가 화자가 되니 등장인물의 내면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 권의 소설이지만 여러 명의 화자를 나열하는 식이라서 짧게 느껴진다.
<투명인간>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가난하고 인권이 존중받지 못했던 어두운 현대사를 복기한다. 힘겨운 시대를 살았던 조부모, 부모 세대를 지나 살만한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보다는 무표정 혹은 근심 어린 표정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독서습관 717_투명인간_성석제_2014_창비(230411)
■ 저자: 성석제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중단편 소설집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조동관 약전> <호랑이를 봤다>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참말로 좋은 날> <지금 행복해> <이 인간이 정말> 등과 짧은 소설을 모은 <재미나는 인생>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펴냈다. 장편소설에는 <왕을 찾아서> <아름다운 날들> <도망자 이치도> <인간의 힘> <위풍당당> <단 한번의 연애>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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