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책을 보다'라는 프로그램에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이 나와서 소개한 고은 시집 <순간의 꽃>을 읽었다. 시집을 좀처럼 읽지 않는데 박웅현이 시를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얘기를 해서 직접 느껴봤다.
<순간의 꽃>에 담긴 고은의 시들은 짧다. 일상에서 우리 모두가 접할 수 있는 소재가 대부분이다. 간혹 해외 여행지에 대한 감상도 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불어오는 바람, 봄이 되어 피어나는 새싹, 다양한 색깔을 자랑하는 꽃,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물, 생명을 가진 자연에 대해 시인은 렌즈를 가까이 가져간다. 그리고 그 순간의 느낌을 몇 줄의 시로 재탄생시킨다.
시를 쓴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독자에게 전한다. 길지 않아 집중해서 읽는다. 반복해서 읽으며 저자의 느낌을 되살리려 애써본다. 일부 시들은 짧지만 이렇게 사물과 인생을 연결 지을 수 있구나 감탄한다. 시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 유튜브나 넷플릭스와 같은 매체에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능동적으로 머리를 사용하게 돕는다. 신선함을 선사한다. 2013년 봄이 멀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시인이 되어보는 것도 좋겠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13)
산을 오르며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물길에서 노를 젓는데만 집중하느라 넓은 물을 보지 못했는데 우연히 노를 놓쳐버리게 되어 큰 물을 보았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작은 일에 과몰입해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사자자리에서
내가 왔다
궁수자리에서
네가 왔다
우리는 백년손님 이 세상 서성거리다 가자(32)
사람의 생사를 돌아보게 하는 시다. 이 세상에 왔다가 기껏해야 100세를 산다. 시인은 '서성거리다'는 말로 100년의 삶을 요약한다. 그래 맞다. 우리는 태어나서 세상에 적응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어느 시기도 반복됨이 없다. 육체의 변화에 맞게 적응하며 서성거리다 간다.
옛 시인
나라는 망하건만
산하는 있네라 하였도다
오늘의 시인
산하는 망하건만
나라는 있네라 하도다
내일의 시인
오호라
산하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였네
너도
나도 망하였네라 하리로다(35)
시의 구성이 디스토피아적이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는 망했지만 산하는 그대로라고 했다. 오늘의 시인이 산하가 망했지만 나라는 있네라고 한 이유를 유추해본다. 산업화를 위해 논과 밭이, 그리고 산이 사라지고 공단이 들어선다. 깨끗한 자연은 사라지고 나라의 발전이란 명목으로 개발 위주로 돌아간다. 그래서 나라는 있지만 산하는 망해간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도 산하도 모두 망하겠다는 시인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말인가
푸른 잣나무 가지에
쌓인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67)
푸른 잣나무에서 하얀 눈덩이가 떨어지는 소리로 위로를 받고 싶다. 아름다운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눈이 쌓여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해 잣나무가 눈덩이를 떨어뜨린다. 눈덩이가 얼마나 큰 소리를 내겠는가. 하지만 그 조용한 추락의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아름다운 소리를 상상해 본다. 위로를 받는다.
소말리아에 가서
너희들의 자본주의를 보아라
너희들의 사회주의를 보아라
주린 아이들의 눈을 보아라(72)
언론매체와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우리가 골라 보는 소식은 우리의 관심사다. 대부분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돈과 연관되어 있다. 돈에 대한 탐욕과 육체에 대한 욕망이 담겨 있다. 그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간다. 소말리아에서 굶주린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굶주려야 하는가. 탐욕에 찌들어 살아가는 너희들에게 외친다. 아이들의 눈을 기억하라고.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씨앗
이렇게 시작해보거라(76)
이 시를 보며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고민하는 청년들이 떠오른다. 취업이 갈수록 어렵다고 한다.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고령층 위주의 정책으로 젊은이들은 소외되었다. 그들에게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땅버들씨앗처럼 시작해 보는 방법이. 공정과 상식이 강조되는 사회다. 하지만 기득권 집단의 행태를 보면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반복되고 있다. 국민이 부여한 권리를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청년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고, 하고 싶은 일을 경제적인 부담 없이 해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국가를 위해 의사결정을 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오피니언 리더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변화를 기대한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 무죄입니다(101)
국회의원 중에 법조인이 많다고 한다. 검찰 출신이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법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 사회의 요직에 자리한다. 퇴직한 후에도 전관예우를 받는다.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다. 그 네트워크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다.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회가 바람직할까. 부정적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집단은 다양한 계층의 의견이 수렴되고 반영되어야 한다. 하지만 특정 집단에 기울어져 있는 현실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게 된다.
수많은 소송이 이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죄가 있다고 한다. 법의 심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수준이 한심하다. 시인은 하얀 함박눈이 세상을 덮듯이 모두의 죄를 무죄라고 선고한다. 왜 자꾸 사람들의 잘못된 점을 들춰서 없는 죄도 있는 것처럼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것일까. 국민들은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함박눈처럼 무죄를 선고하고 나라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도 늦었다는 만시지탄의 느낌이다.
독서습관692_순간의 꽃_고은_2013_문학동네(230211)
■ 저자: 고은
1933년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을 펴낸 이래 시, 소설, 평론 등에 걸쳐 고도의 예술적 경지를 선보여왔다. 시집 <순간의 꽃>, 시선집 <어느 바람> <오십 년의 사춘기>, 서사시 <백두산> (전 27권), 연작시집 <만인보>(전 26권), <고은시선집>(전 2권), <고은 전집>(전 38권)을 비롯해 150여 권의 저서를 간행했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웨덴어 등 전 세계 10여 개 언어로 시집, 시선집이 번역되어 세계 언론과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과, 스웨덴 시카다 상, 캐나다 그리핀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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