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성경과 코란이라는 오래된 책에 기록된 내용을 기반으로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로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 샘 해리스는 믿음이란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기독교에서 구약과 신약이라는 과거에 구전되고 기록된 내용들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반복해서 해석되고 사람들에게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문명 발전사로 보면 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과학적인 시대였다. 그 당시 기록된 것이 여전히 금과옥조처럼 간주되며 신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새로운 각도에서 기독교나 가톨릭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저자의 관점이 신선하면서도 쇼킹하다. 마치 단군신화와 같은 고대문서를 신앙의 기초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일깨우고 있다.
만약 종교가 인간의 결핍과 진정한 차원의 사고를 다루는 것이라면 '발전'의 여지가 있어야만 한다. 종교 교리는 점점 더 유익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고, 종교의 발전은 과거 교리의 되풀이가 아니라 '현재'의 질문들에 관한 문제여야 할 것이다. (...) 이 기준에 의하면 종교의 전체적 과제는 완벽하게 뒤처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27)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책들 중에 조물주가 직접 지은 책이 있다는 주장은 아무런 증거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고, 손수레마저도 기술 발전의 눈부신 사례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작품임이 확실해 보인다. 우리 세계관의 근거가 되는 그러한 문서에 의지하는 태도는 2,000년에 걸쳐 종교와 분리된 정치와 과학적 문화를 통해 인간 정신이 스스로 시작한 문명화된 통찰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54)
각 세대의 자녀들은 종교적 명제들은 다른 명제들이 거쳐야 하는 정당화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고 교육받기 때문에, 문명화는 아직도 터무니없는 비상식의 공세 아래 놓여 있다. 지금도 우리는 고대 문서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87)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정보의 유효한 원천을 저버리고, 우리의 종교는 고대의 금기사항과 과학이 있기 전 상상에 집착하고 있다. 마치 그것들이 형이상항적으로 궁극적 의미를 띠기라도 하는 것처럼. (265)
- 증거 없이도 믿음이 정당화될 수 있나?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정녀 수태와 죽음 뒤의 부활이 필요했다. 인성을 지니는 동시에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신성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가 확립된다. 누군가의 발상으로 시작되었을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이성으로 말도 안 되는 서사지만 기독교 역사에서는 의심을 허용하지 않았고 믿음을 강요했다.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죽음과 고문을 의미했다. 믿음을 요구하는데 의심하고 증거를 요구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적 분석이나 추론이 없었던 시대다.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무결점의 존재다. 교황을 중심으로 정해진 교리는 신자들에게 법이었다.
사도신경이란 신앙고백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들일 때마다 반복해서 암송하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진실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종의 세뇌활동이다. 증거도 없는 명제를 믿으라고 한다. 아래에 사도신경의 내용을 인용했다. 증거가 없이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는 일곱 가지에 밑줄을 그었다. 신앙을 사기꾼이라고 하는 이유다.
①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②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③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④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⑤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⑥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⑦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예수의 생애를 구약의 예언과 동일하게 만들려는 시도와 함께, 신약에서 기적들을 강조하는 태도는 비록 허점이 있어도 그들의 신앙을 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작업에 대해 최초의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헌신이다. 모든 기적은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예언은 널리 수용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계획된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점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말했다. "기적이 아니었으면 나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113)
미국인들 역시 일부 뜬구름 잡는 명제들을 증거 없이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 우리가 신앙에 부여해준 특권 즉, 증거 외에 다른 것을 통해 믿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들 중 하나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기는커녕 입도 벙긋 못해왔던 것이다. (35)
죽음 없이는 신앙에 입각한 종교가 갖는 영향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죽음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신앙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죽음 너머로 던지는 그림자 이상의 것임이 확실하다. (48)
인간의 뇌는 세상에 대한 믿음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발전소다. 사실 모든 뇌의 인간성은 뇌가 이미 수용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른 명제의 관점에서 명제적 진실에 관한 새로운 주장을 평가하는 능력에 있다. 진실과 허위, 논리적 필연과 모순을 가리는 직관에 의지함으로써, 인간은 상당 부분 밀착되어 있는 사적인 세계관들을 굳게 결합시킬 수 있게 된다. (62)
신앙은 사기꾼이다. 종교 생활에서 발견되는 모든 특이한 현상들(눈물 흘리는 성모상, 짚고 있던 목발을 땅에 집어던지는 아이)은 신자들에 의해 신앙의 확증으로 이용된다. 그러한 순간에 신자들은 마치 불확실의 사막에서 데이터라는 시원한 물을 만난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는 '핵심 신앙 정당화'에 목말라하고 그러한 정당화가 바로 앞에 있다고 믿을 때만 그러한 믿음들을 믿는다. (78~79)
확실한 범인은 신앙 교리 그 자체다. 사람이 증거도 없이 어떤 명제(불신자는 지옥으로 가고, 유대인은 아기들의 피를 마신다 등)가 진실임을 믿을 때, 그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종교 재판이 악명을 떨치면서 용의자와 유죄 판정이 계속 이어지게 된 것은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받고 증인의 증언을 강요하기 위해, 죄를 자백한 이단자가 범행에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을 발설하게 하려는 회유책으로 고문을 도입하고 관례화하면서부터였다. (101~102)
- 맹목적인 믿음과 신앙은 9.11 테러와 같은 범죄의 시작이다.
현재의 삶의 행복을 낮게 보고 사후 세계의 행복을 과장해서 얘기하는 종교는 경계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 현재를 버리고 보지도 못하고 말로만 존재하는 사후 세계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종교 교조주의에 치우쳐서 교리를 해석하고 죽음과 전쟁을 강조하며 신자들의 현실의 행복을 경시하는 신앙은 이미 사이비며 인류를 재앙으로 몰고갈 위험을 가진 단체다.
9.11 테러를 일으킨 19명의 테러리스트들이나 자살폭탄 테러를 실행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믿음이 그 사례다.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신자들의 모습이다. 그들을 세뇌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집단은 종교단체의 우두머리들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증거 없는 신앙을 맹종하는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한다. 핵무기와 정밀타격이 가능한 무기체계를 갖춘 오늘날 그런 무기들이 신앙만을 위해 온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때 9.11보다 훨씬 무서운 상황이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사람들이 가졌던 두려움과 공포를 고려하면 교회를 중심으로 조장되는 마녀사냥과 같은 비인간적인 대우는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한 현재까지도 중세 시대와 같은 신앙으로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행동이 지속되는지는 사람이란 강하면서도 연약한 존재다.
짧고 어려운 생애 동안 닥칠 수 있는 많은 질병들이 만연했던 가운데, 중세 기독교인들은 이웃이 주문을 걸면 자신의 건강이나 재산에 피해가 닥칠 것을 특히 염려했다. 과학의 출현, 그리고 그로 인한 환상적인 잔혹성의 표출만이 그런 사고를 물리칠 수 있었다. (105)
교황 비오 7세가 1816년에 교서를 내리기 전까지 교회는 고문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109)
콘스탄틴 황제의 승인으로 312년 기독교가 국가종교의 위치로 상승하면서 기독교인들은 공공연히 유대민족을 깎아내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고 그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법령을 통해 예전에 유대인들에게 내려졌던 많은 특혜들이 폐지되었다. (115)
신앙은 윤리와 고통 사이를 이간시킨다. 어떤 행동들이 조금의 고통도 유발하지 않을 때도 종교 교조주의자들은 그런 행동들(동성 간 성행위, 마리화나 복용,...)은 사악하며 처벌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반면 고통과 죽음이 다반사로 발견되는 상황의 근거들은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제3세계 국가의 가족계획에 대한 자금지원 중지, 일체의 폭력도 휘두르지 않은 마약사범의 기소...) (202)
신학은 이제 인간의 무지라는 나무에 달린 가지 이상의 의미다. 무지에 확실히 날개가 달린 셈이다. (207)
- 종교는 진실에도 비이성이라는 독약을 너무 많이 섞었다.
우리는 종교에 대해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오랜 전통을 가진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만 말로만 지속되어왔기에 지적으로 효력을 잃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유대인을 박해한 역사가 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시기에 종교인들은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라고 물었을 때 윤리적으로 떳떳할 수 있었나 질문하게 된다.
종교가 윤리적, 도덕적인 면을 간과하고 비이성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며 타인의 목숨을 가볍게 여길 때 신앙의 최후는 멀지 않았다. 타인의 생명도 나의 목숨만큼이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신앙이 필요하다. 무지하고 서로를 증오하며 탐욕스러운 신앙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겸손하며 사랑으로 공존하는 인류를 지향하는 신앙이 되어야 지속가능하다. 경건만을 강조하며 불화를 조장하는 근거 없는 신앙은 사라져야 한다.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양쪽에 모두 존재한다. 두 종교 모두 유대인을 신이 내린 초기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110)
교회가 나치 대량학살에 가담했는가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교회는 근엄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바티칸이 독일에 대해 제공한 비난받을 만한 협력행위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것은 가톨릭 신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즉 교황은 정의상 절대 오류가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125~126)
타인을 윤리적으로 대하는 것은 그들의 행복과 고통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223)
종교가 가지는 문제는 종교가 그 진실에다 비이성이라는 독약을 너무 많이 섞었다는 점이다. (244)
우리의 종교 전통들은 지적인 면에서 그 효력을 잃었고 정치적으로는 파멸했다. 영적 경험은 인간 정신의 자연적인 경향임에 확실하지만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한 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 확실히 이성과 영성과 윤리를 우리의 생각 안에 공존시키는 일이 가능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의 최대 관심사에 이성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신앙의 최후가 될 것이다. (264)
학살과 만행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종교 전쟁이 우리에게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신앙의 교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일 것이다. 만약 우리의 민족주의가 보다 확장된 도덕 정체성에 자리를 양보해준다면, 우리의 신앙은 쏟아지는 진정한 의문과 비난들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경건한 소망뿐인 지식을 믿는 것은 일종의 악이다. (...) 믿는 것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에게 신앙은 필요하지 않다. (..) 어떤 사람의 믿음에서 우리가 존중해야 할 한 가지는 지금 생에서의 나은 삶에 대한 바람이다. 누군가가 다음 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은 존중해줄 필요가 없다. (268)
우리가 일깨워 줄 필요가 있는 유일한 천사는 우리의 더 나은 본성, 이성, 겸손, 그리고 사랑이라는 천사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단 하나의 악마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것, 즉 무지, 증오, 탐욕, 신앙으로서 이는 확실히 악마의 걸작품이라 하겠다. (271)
독서습관 670_종교의 종말_샘 해리스_2008_한언(221223)
■ 저자: 샘 해리스 Sam Harris
샘 해리스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동서양의 철학을 공부했고, 동 대학에서 신경정신과학(Neuro-science)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처녀작인 <종교의 종말>은 그의 치열한 고민과 성찰이 그대로 녹아있는 역작이다. 이 책은 발표되자마자 미국 전역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2005년에는 펜(PEN) 논픽션 부문의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현재 뉴욕에서 '신앙과 불신앙의 신경과학적 근거',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등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기고 활동을 하고 있다.
샘 해리스에 대한 정보는 www.samharris.org에서 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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