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손은 카메라 렌즈처럼 거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거울처럼 좌우를 바꾸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숙련된 화가라면 내 얼굴을 보는 타인의 객관적인 시선을 가장 정확히 포착해줄 것이다. 그뿐인가? 화가는 예술가다. 인물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세계와 정신까지 나타내 주리라. (20페이지)
유튜브에서 Devon Rodriguez란 화가가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있는 승객을 스케치해 선물하는 것을 재미있게 봤다. 자신의 재능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자신도 유튜브 수익을 얻을 수 있어 모두가 윈윈 하는 장면이었다. 이 책 <얼굴을 그리다>는 유튜브 동영상에서 맛볼 수 없는 초상화와 인물화, 그리고 영화에서의 컴퓨터 그래픽까지 폭넓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강세황은 문집 <표암유고>에 당당히 서술한 바 있다.
나는 키가 작고 외모가 보잘것없다. 그래서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 안에 탁월한 지식과 깊은 견해가 있음도 모르고 나를 만만히 보아 업신여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번 싱긋웃어 주고 만다. (86)
먼저, 초상화가의 눈을 통해 소화되어 손으로 그려지는 그림은 실재와 다른 화가의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동일한 사람을 두고 여러 화가들이 그렸을 때 보는 관점과 강조하는 부분이 달라 그려진 그림도 다르다. 우리 자신이 타인에게 비치는 우리의 모습을 알기 어렵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거울이나 셀카를 통해 보는 우리는 타인이 보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초상화가의 눈을 통해 모공과 검버섯 하나하나까지 적나라하게 그려지는 그림은 모델이 되는 사람이 생각하는 자신과 다를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는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는 아련한 그리움은 모두가 말없이 공유하던 감정이었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은 그런 감정의 한 토막을 꺼내 놓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므로 내가 군대에서 그린 그림들이 일종의 심리 상담과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고 나는 감히 짐작하고 싶다. 한 장의 그림으로 말미암아, 그림을 부탁한 사람과 그림으로 그려지는 사람에 관한 길고도 깊은 대화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157)
둘째, 이순신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역사적 인물의 영정 초상화에 대한 획일성이다.
박정희 시대의 유산으로 지역마다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던 위인들의 모습을 정부에서 표준을 정해 획일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역사적 인물을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정을 그리는 화가는 어떻게 구체화시킬까. 여러 문헌을 찾겠지만 결국은 화가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들의 영정 초상화는 상상화다. 차라리 다양한 그림을 허용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이 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특히 초상을 제작하는 예술이야말로 그 근원에는 완전히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있다. 이 결핍이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한, 그것을 현현하게 하는 초상 예술 또한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88)
사진이나 초상화가 전해지지 않아서 생김새를 알 길이 없는 과거 인물들의 얼굴은 후대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다양한 형상을 취할 권리를 갖는다. 국가 기관이 나서서 인물의 형상을 창작한 후 그것을 공식 영정으로 선포하는 것은, 개인의 몫으로 돌아가야 할 상상의 여지를 국가가 무단으로 독점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애초에 표준 영정이라는 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위인들의 얼굴을 더 다양하고 자유롭게 상상해 볼 수 있었으리라. (216)
셋째, 초상화에서 영화 속 인물을 CGI 실제로 그려내는 단계까지 확대해서 설명한다.
사진이 나오기 전에는 초상화의 역할이 중요했다. 사진이 등장한 뒤로도 초상화와 인물화는 살아남았다. 사진에서 영화로 나아갔고 현재는 영화 속 등장인물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심지어 이미 사망한 영화배우를 현재의 작품에 CGI를 통해 부활시켜도 관객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는 수준이다. 작가는 초상화가이면서 연극도 하는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경험에서 나온 지식을 책에 녹여넣었다.
이처럼 지배적인 위상을 점유한 시뮬라크르들에 의해 형성되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가상의 세계를, 보드리야르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라고 불렀다. (411)
그러나 하이퍼리얼리즘은 원본과 복제, 실재와 가상의 전복된 위계를 보여 주는 데 본래의 목적이 있다. 그림을 얼마나 정교하게 잘 그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과 그림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행위, 즉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어디까지가 가상이고 어디까지가 실재인지 고민하도록 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데 방점이 있다. (418)
마지막으로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한 이해다.
실물보다 더욱 실물 같은 작품을 통해 어디까지가 가상인지 고민하도록 하는 것을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한다. 할아버지 초상화에 대한 사례에서 너무나 직설적인 그림으로 할아버지가 피부과 치료를 받아 더 젊어보이셨다는 내용이 있다. 현실이 그림에 영향을 주고 그림이 다시 현실에 영향을 준다. 하이퍼리얼리즘 하면 떠오르는 아티스트가 듀안 헨슨이다. 그가 레진 등으로 만든 'Woman Eating(1971)'과 같은 작품은 너무나 현실처럼 보여 감탄했었다. 이제는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초상화 속 인물이란 물감이라는 질료로 만들어진, 선과 색으로 적절히 버무린 조형물일 뿐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하찮아 보이던 것이 특별해지고, 찰나의 것은 영원을 획득한다. (299)
시뮬라크르란 복제의 복제,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의 허상을 뜻한다. 시뮬라크르가 작용하는 것을 일컬어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 하는데, 영어의 '시뮬레이션'을 떠올려 보면 조금 더 친숙할 것이다. (407)
이 외에도 <얼굴을 그리다>를 통해 다른 그림 설명 책과는 다른 많은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작가 정중원과 같이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작가의 삶에 비해 나의 삶이 무척 단조롭다. 그래도 매주 책을 읽고 포스팅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시공간을 넘어 교류하는 즐거움은 단조로운 가운데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만들고 있어 위안을 삼는다.
■ 저자: 정중원
홍익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같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는 작품들이 국내외로 알려지면서 다양한 전시 및 워크숍, 강연을 이어 가고 있다. 역대 최연소 작가로 국회의장 공식 초상화와 헌법재판소장 공식 초상화를 의뢰받아 제작했다.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서 2011년부터 비영리 극단 '서울 셰익스피어 컴퍼니'를 운영하고 있으며, <햄릿>, <헛소동>, <겨울 이야기>, <리어 왕>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림을 그리고, 연극을 하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아름다운 이들과 교류하는, 이른바 '고대 그리스인처럼 살기'를 삶의 기조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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