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만 있고 답을 찾지 않는다면 인간은 영원히 미궁 속을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137페이지)
현호정의 <단명소녀 투쟁기>를 읽고 박지리문학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젊은 나이로 떠난 박지리 작가의 책이 궁금했다. 그녀의 책 중에서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 눈길을 끌었다. 제목이 <다빈치 코드>를 연상케 했다. 추리소설로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댄 브라운의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다른 책들을 작아 보이게 했다. 하지만 재미있으면 페이지에 관계없이 읽히는 소설의 속성을 알기에 대출했다.
배경과 주인공의 이름은 외국이지만 소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한국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경험에 기초한 상상력과 주요 독자를 고려하면 당연하다. 세 가지로 소감을 포스팅한다.
그런데 1지구 출신인 아빠는 오히려 엄마보다도 거부감이 더 심해 모두가 우러러보는 프라임스쿨조차 신랄하게 깎아내렸다. 아직 철도 안 든 아이들을 병적인 자아도취에 빠뜨리는 학교라면서. (242)
첫째, 가족 간의 사랑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
주인공 다윈은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좋은 총명한 학생이다. 아버지 니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할아버지 러너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삼대가 위태위태한 경계에서 가족의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제이의 죽음에 대해 조카인 루미가 살인자의 정체에 대해 조금씩 접근해 가면서 다윈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환멸로 방황하고 온몸으로 고통을 드러낸다.
진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폭풍을 고려해 현재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한다. 아버지 니스도 할아버지 러너를 이해하며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결국은 진실보다 사랑이 세상살이에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아버지의 행위의 근원이 무엇이고, 할아버지의 행위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악의 기원'이란 제목이 이해되었다.
루미는 어느 때보다도 권력의 힘을 절감했다.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규칙을 만드는 사람과 만들어진 규칙에 따르기만 하는 사람의 차이가 바로 이런 순간에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타 지구에서 볼 때 1지구 사람은 모두 권력자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알고 보면 이 안에서의 계급 차는 오히려 더욱 극명했다. 규칙을 만드는 사람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은 절대 그 지위에 오르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니. (260)
둘째, 1지구부터 9지구까지 거주지역의 차별은 우리의 현실의 반영이다.
1지구 출신은 세상을 이끌어 간다는 자부심이 있다. 엘리트 의식이 있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한다. 9지구까지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람들의 거주환경은 급속도록 악화된다. 9지구는 60년 전의 12월 항쟁 이후로 초토화되어 버려진 땅이 되어 사람이 자립해서 살 수 없게 되었다.
수도권 중심으로 대한민국이 돌아간다. 특히 강남권에 사는 것이 무언의 자부심이 되었다. 반면에 강남에서 멀어질수록 마치 1지구에서 9지구로 가는 것처럼 지역별 격차가 크다. 지방에서는 사람이 급격히 감소하며 인프라 시설에 대한 투자도 감소한다. 악순환이다. 지방도시에서 읍단위로, 그리고 면단위로 내려갈수록 9지구와 유사해진다. 직업의 수도권 집중화, 거주 인프라의 집중화, 문화시설의 집중화는 갈수록 심화된다.
그러다 마지막 날, 문득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시험지 속 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546)
셋째, 프라임스쿨과 프리메라 여학교와 같은 엘리트주의다.
엘리트학교에 입학과 졸업은 학생의 장래를 보장한다. 다른 지구에서 간혹 입학생이 있지만 주로 1지구 출신 부모를 둔 자녀들이 입학한다. 마치 강남 출신 학생들이 스카이에 점점 더 많은 입학생을 보내는 것처럼 현실과 비슷하다.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학벌을 형성하는 것이 좋은 처세인 것처럼 영화 속의 엘리트 학교 교복은 그들의 미래를 당겨온 듯한 대우를 받는다. 일방적인 엘리트주의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 그들만이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이 드러난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법의 정의를 통해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검사들이 과도하게 언론에 드러나는 세상이다. 법의 칼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날카롭고, 검사들의 반대에 선 자들에게 날카롭지만 검사들에게는 너무도 무디다. 또한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의술을 익힌 의사들 중 극히 일부는 사람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모습을 보인다. 이 역시도 오만이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삶을 사는 것뿐이라는 거야. (650)
재미있게 읽은 소설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다윈 영이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너무나 갑작스럽다. 이전에 겪었던 심적 고통의 기간에 비해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는데 작가의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긴 소설의 서사를 기대하며 결말에 이르렀는데 빠른 반전에 다 읽은 뒤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이 세계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선 아버지의 죄를 묻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이해하는 것으로도 부족했다. 변호인이 돼 주는 것도 부족했다. 사랑해야 했다. 아버지를 진실되게 사랑해야 했다. (776)
■ 저자: 박지리
1985년 생. 스물다섯의 나이에 <합체>로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등단. 독특한 글쓰기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쓴 작품으로 <합체>, <맨홀>, <양춘단 대학 탐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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