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은 반쯤 집 안에 갇혀 있으면서, 늘 수줍고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하고, 또 육체 활동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시대에, 그녀를 이 황량한 곳까지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그것이 절망감일 거라고 짐작했다. (85)
메릴 스트립에 관한 책 <퀸 메릴>에서 그녀가 등장한 영화 중에 1981년 작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있었다. 제목을 처음 접했기에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원작인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읽었다. 1969년에 출간된 책으로 소설의 배경은 빅토리아 시대인 1867년 영국 남서부의 라임만 지역이다.
100년의 시차를 두고 소설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여주인공인 사라의 태도와 행동은 여성 해방자의 모습이다. 반면에 찰스의 약혼자였던 어니스티나는 전형적인 예비신부의 모습이다. 주인공 찰스는 사라와 어니스티나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시대를 뛰어넘을 것인가 현실에 순종할 것인가의 고민이다. 결국 그는 사라를 선택한다.
그녀가 아편 중독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인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 19세기에는 많은 숙녀들이 (…) 캄캄한 밤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 아편제를 성찬용 포도주보다 더 자주, 더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우리 시대의 수면제와 비슷했다. (108)
신사라면 결코 분노를 드러낼 리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아마 꿰뚫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보여준 태도는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포목상의 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을 뿐이다. (…) 그녀에게서는 전통적인 차분함, 인생에서 좌절해도 결코 품위를 잃지 않는 귀족적인 의연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228)
그는 거기에 서서, 자기 시대의 모든 것 – 혼란스러운 생활, 강고한 확신과 엄격한 관습, 억압된 정서와 우스꽝스러운 익살, 조심스러운 과학과 뻔뻔스러운 종교, 타락한 정치와 변함없는 계급 제도 – 을, 그의 가장 깊은 갈망을 은밀히 방해하는 막강한 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속인 것은 바로 그의 시대였다. 그의 시대에는 사랑과 자유가 전혀 없었다. 또 생각도 없고, 목적도 없고, 악의도 없었다. 속임수는 그 시대의 본질 자체였기 때문이다. (408)
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 이유는 … 첫째, 제 과거 때문이에요. 전 고독에 길들여졌어요. 너는 늘 제가 고독을 혐오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고독을 너무나 쉽게 피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자 제가 고독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전 누구 하고도 인생을 같이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 이대로 있고 싶어요. 아무리 친절한 남편, 아무리 너그러운 남편이라도, 남편은 결혼 생활에서 제가 다른 여자, 아내로서 적당한 여자가 되기를 바랄 거예요. 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503)
19세기에 상류층 여성의 경우 주로 집안에 머물렀다. 생활을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유한계급의 부인들에게는 그런 상황이 우울증이나 불면증, 그리고 활동 부족으로 인한 질병을 가져왔을 것이다. '캄캄한 밤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라는 말은 풀트니 부인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면서 많은 여인들이 이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면증에 대한 처방으로 수면제로 아편을 복용하던 시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모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은 내 마음 바깥에 존재한 적이 없다. 내가 이제까지 주인공들의 마음과 깊은 생각까지 아는 척해 왔다면, 그것은 내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시대에 보편적으로 용인된 관행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행이란, 소설가는 신에 버금가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112)
이 시선을 나는 찰스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그 사내의 얼굴에서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그 사내의 얼굴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얼굴이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고, 내가 바로 그 사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 (454)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유명한 여성 작가들의 소설인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달리 소설가가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는 존 파울스가 1960년대의 '누보로망(새로운 소설)'의 전위적인 방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소설에 몰입해서 주인공들의 함께 생활하다 갑자기 100년의 시대를 뛰어넘어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외에 소설가와도 대화하는 기분이라서 반갑지는 않았다.
진화론은 도덕성을 위선으로 격하시키고 의무를 폭풍 속의 밀짚모자처럼 날려 보내는 철학을 지향하고 있었다. 찰스가 사라진 책임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사라가 상상했던 만큼은 그녀를 탓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139)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가장 강력한 추정은 자네가 그 여자한테 아무것도 아닐 가능성이 진실이라는 걸세. 그 의사 선생의 생각이 옳지 않을까? 자네의 미래를 파멸시키고… 자네를 지금의 자네로 끌어내리는 것 말일세. (465)
악마와 계약을 맺으면, 얼마 동안은 순탄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악마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행운의 여신은 가혹한 감독이다. (…) 행운의 여신이 그동안 베푼 친절까지 엄격하게 소급하여 대가를 받아내는 경우가 많다. (472)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벗어나 서로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영화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또한 이 소설에서 1860년대의 영국에서 종교와 도덕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다윈의 진화설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던진 정신적 갈등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프랑스 중위'가 왜 제목에 들어가야 하는지 의문이다. 소설에서 그 프랑스 중위는 사라를 설명하기 위해 스치듯 지나가는 인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독서습관 608_프랑스 중위의 여자_존 파울즈_2006_열린책들(2207)
■ 저자: 존 파울즈 John Fowles
존 파울즈는 1926년 영국 남부의 에식스 주에서 태어났다.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종전 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누보로망에 노출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와 그리스 등지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으며, 1950년대 중반에 귀국한 뒤 대학 강단에 서는 한편 글쓰기를 시작했다.
1963년 발표한 처녀작 <컬렉터>는 대담한 주제와 독창적인 서술 방식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작가에게 안겨주었고, 다음으로 소개된 <마법사>(1966) 역시 걸출한 상상력과 혁신적인 기법으로 히피 세대들의 필독서로 떠올랐다. <더 타임스>는 장문의 서평을 통해 그를 <전후에 등단한 작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그리고 위대한 영국 문학의 전통을 가장 확실하게 재창조해 나갈 수 있는 작가>라 평했다.
존 파울즈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큰 찬사를 받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19세기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수용하면서(또한 슬며시 조롱하면서), 옷깃의 주름에서부터 어투의 어색함에 이르기까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세심하고 완벽하게 재현해 낸 작품이다. 시대의 위선과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두 총명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자유에 대한 정열이 고갈되어 이미 수수께끼가 되어 버린 20세기 상황에 대한 탁월한 우화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를 보임으로써 다양한 문학 담론의 초점이 되어 왔던 파울즈는, 현대 영국 소설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특이한 주제와 의욕적인 기법을 과시한 작가라는 평과 함께 평론가와 일반 독자들로부터 동시에 큰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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