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뉴스타파 프로그램 마지막에 등장하는 강직한 모습으로 처음 알게 된 리영희 선생은 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재산과 학벌, 집, 연봉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평가받는 시대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사회적 책임보다 더 가지지 못해 안달하며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리영희 선생과 같은 국가의 리더가 아쉽다.
그는 일제 말기에는 순수한 학생으로, 한국전쟁을 군인으로 보내고, 이승만 정권하에서 부패한 자들의 부조리를 경험하며 자유와 정의를 위해 비판적 지식인으로 성장한다.
이 책은 안타깝게도 군사정권 초에 그의 가족이 내 집을 마련하는 것까지만 기록됐다. 하지만 가난하고 힘이 없던 나라가 어떤 상태였는지 이 책을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나라면 청년 리영희가 당면한 현실 앞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이런 고민은 각자도생의 분위기가 높아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해봐야 한다.
권력을 추종하고 거기에 빌붙어서 일신의 안녕을 위해 약자를 수탈하는 거짓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리영희 선생은 이런 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었을 것이다.
<역정>을 통해 새롭게 일게 된 사실도 있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삭발 여인 사건'이란 것과 쿠데타 정권이 화폐개혁을 시도했다가 4일 만에 미국의 반대로 포기한 부분이다. 그래서 책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이하 마음에 드는 문장을 책에서 발췌했다.
서울이나 남한의 각 지방에서는 해방 후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 그런 구별이나 의식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평안도가 평등주의적 사회기풍이 상당히 철저했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24)
보불전쟁으로 알자스로렌이 독일 영토로 병합되어 불어가 금지된 국민학교 마지막 불어 시간을 그린 알퐁스 도데의 작품에서 선생이 학생들에게 훈계했던 것과 같은 감동적인 민족감정의 표시는 기억에 없다.
"나라는 잃었어도 프랑스어를 지키고 잊지 않으면 감옥에 들어 있어도 열쇠를 쥐고 있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고, "프랑스 만세!"를 외치면서 끝나는 단편 <마지막 수업> 속에 나오는 아멜 선생 같은 조선인 교사도 없었고, 그런 사회적 감동도 없어 보였다. (31)
조선의 웬만큼 큰 면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일본 황실 숭배의 군국주의적 종교인 신도의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신사 참배'가 조선인의 정신적 황국신민화를 위해서 강제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48)
지금은 국민학교가 중학교로 가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지만 그 당시의 국민학교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으로 끝나는 '종결'이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불과 몇 안 되는 예외적인 중학 진학 아동의 경우뿐이다. 나머지 9할 이상의 아동에게는 졸업식은 천진난만하고 즐겁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종말을 뜻했다.
그날부터 그들은 '어른'이 되는 것이고, 그 당시의 조선인 어른에게는 본업인 소작인 아들로서의 고된 농사일뿐 아니라 전쟁 시국 하의 각종 부역, 일본 군대를 위한 노동 징용, 보국대의 고역이 기다리고 있다. (51)
어머니는 아버지의 성품과는 정반대로 드세고 고집스럽고 억척스러웠다. 누구에게도 지려 하지 않았고, 웬만한 사람들은 눈에 차지 않을 만큼 오만했다. 평안북도의 산골 벽동과 창성 지방의 억세고 미련한 소를 일컫는 '벽창우'가 '벽창호'라는 낱말로 변형된 그 고장, 그 소처럼 억세고 강직하다. (58~59)
같은 '신탁통치'라는 용어였지만, 미국의 제안은 4대 열강의 직접적 행정관리하의 방식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소련 안은 한(조선) 민족에게 자치적 행정권을 주고 열강은 다만 뒤에서 협의 자문하는 방식이었다는 중요한 차이점을 안 것은 20년 가까이 지나 언론계에 들어가 독자적 연구를 하게 된 뒤의 일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놓쳐버린 기회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온 민족주의자의 일치된 소리였던 신탁 반대의 분노는 나의 가슴에서도 훨훨 불탔다. (...)
결과적으로 훗날의 이승만 씨 집권과 그의 타락 부패한 친일파들의 반민족적 정권 유지의 원초적 협조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회한이 지금에도 가시지 않고 있다. (147)
국방경비대의 여수 순천 반란사건 후, 경비대 내의 남로당 소속 장병의 적발과 그들에 대한 대규모의 숙군 과정에서 경비대 남로당 정보책이었던 박정희라는 장교가 검거되고, 그가 제공한 명단을 토대로 수많은 장교들이 희생되었으며, 그 변절의 공로로 박정희는 사형을 면하여 퇴역한 일 등도 훗날에 밝혀져서야 알았다. (167)
나라의 법은 간데없고, 권력을 등에 업은 온갖 이름의 정치깡패 단체와 조직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들의 구설인즉, 이승만 대통령에 반대하거나 반공을 표방한 정부와 그 집권세력, 그리고 세태에 대해서 비판하는 자는 무조건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170)
지식, 지성, 교양, 염치 따위는 인간이 다만 네 발로써가 아니라 두 발로 걷는 동물이라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일제 때 중학교 한문 시간에 김경탁 선생에게서 배운 관자의 한 구절이 천고의 명언이고 진리임을 새삼 깨달았다.
"의식이 족해서 비로소 예절을 알고 창름이 가득해서 비로소 영욕을 안다." 전쟁은 인간의 원조인 동물로 환원하는 계기다. (215)
진주중학과 각급 학교 교실에는 가마니도 제대로 없었다. 다 깨진 창문을 막을 아무것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 후의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에서 밝혀졌듯이, 예산과 식량은 전액 전량이 지급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들은 내의 한벌 받은 일이 없었고 꽁보리밥 한 그릇을 여럿이 나누어 먹어야 했다. (227)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이 보내지는가? 나라사랑은 힘없는 자들만이 하는 것인가?
전쟁과 군대를 알게 될수록 나는 점점 더 사색적으로 되어갔다. 그럴수록 이 나라의 기본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96)
후방에서는 각계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통일 없는 휴전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었지만, 매 순간 죽음의 신의 눈알을 노려보고 있던 일선의 장병들에게는 그런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309)
(...) 결혼을 마다해왔던 것이다. (...) 다음은 아직 나 자신의 인격적 숙성에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성격, 정서, 능력 따위를 성찰할수록 하나의 몸, 마음가짐은 물론 사회인으로서의 장래에 대해서도 불안과 두려움이 앞서곤 했다.
그런 상태로 새 사람을 데려왔을 때 전혀 인격적 화합, 동화, 발전을 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320~321)
이북에서 내려온 한 청년으로서 이 나라와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의무에 거의 무조건 순응하고 복종하던 개체의 내면에서는,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을 회의하고 질문하고,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진실된 가치를 밝혀내어, 진실 이외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충성을 거부하려는 종교 같은 신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327)
'사회의 감시역'이니 '정부의 제4부'니 또는 '사회의 목탁'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신문, 통신, 방송 기관과 그에 봉직하는 기자들은 부패한 취재 대상을 공갈하고 협박하여 부패의 공생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부패를 주고받는 유착관계로써 대한민국의 대명사였던 사회적 부패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었다. (346)
보부상의 떼거리와 황국협회가 싸우고 지나간 자리에 방금 반공청년단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가더니 독재정권을 반대하던 경향신문이 폐간된다.
그것도 식민지와 다름없던 시대의 미군정법령 제88호(언론통제)의 몽둥이에 맞아서.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때려잡는 보안법 파동이 산천을 들썩하고 지나갔다.
멀리 마주 보이는 서대문형무소의 교수대에 일제하의 애국지사 조봉암의 시체가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정권이 조작한 '북한의 스파이'라는 말패가 시체 옆에 세워져 있다.
반공이라는 법률의 이름을 빈 학살이 나라의 방방곡곡에 썩은 냄새를 가득 채우고 있다. (354)
미국 정부(국무성)는 1955년부터 '풀브라이트계획'이라는 것을 미국 지배하의 반예속적 국가들에서 실시하고 있었다.
세계의 여러 예속 후진국가들을 상대로 한 것으로서, 각 분야의 지도급 인사들과 중견급 실무자들을 초청하여 미국이라는 사회를 구경시켜 혼을 빼어 미국혼을 그 두뇌 속에 심어주는 교육사업이다.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발상으로 구상되었기에 그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359)
한학을 하시고 유교적이었던 아버지는 이기붕의 얼굴 상부터 싫어했다.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쥐상"이라고 경멸하면서 '음흉한 놈'이라고 욕하곤 하셨다. (403)
그와는 반대로 군대의 특무대, 방첩대는 변혁에 대한 반동세력이었고, 학생들에 대해서 시종일관 원수와 같이 대했다.
이 나라의 군대, 특히 군대 중의 '사상경찰'로서의 방첩대, 특무대의 본질을 알게 되면서 나는 소름이 끼쳤다.(434)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한국인의 반미 데모가 잇따랐다. 이에 놀란 주한미군은 '삭발사건' 수습책으로 책임 중대장을 해직하고, 두 한국인 여성에게 피해보상금을 지불하는 등으로 얼버무렸다. (457)
이 나라 군대의 내부적 부패상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최경록 장군의 자세는 해방 후 처음 보는 군인으로서의 민족자존의 자세였던 것이다.
일제 사관학교나 심지어 일제 괴뢰 만주군관학교 따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서 일제에 충성을 바친 전력을 가진 해방 후의 '대한민국 국군'의 장성들과는 다른 기개였다. 일제 말기 대학생으로서 학도병 장교로 끌려가 평양의 제77연대에서 도주하여 만주의 독립군에 합세하려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분다웠다.(464)
이와 같은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중립주의 내지 남북통일에의 폭넓은 지지는 국내 보수 분단 고수 세력을 궁지에 몰고 들어갔다.
미국은 불쾌감을 표시함으로써 보수진영을 지원했다. 민족의 통일보다 분단과 반공을 그 집단적 존재의 근거로 삼아온 군부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주목되어 있던 때다.
4.19이 이후 타락 부패분자의 숙정을 군부 내에서 시작한 신임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이 미국 정부의 숙청 반대 간섭을 "한국의 주권침해"라고 신랄하게 비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같은 전반적 사상 경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미국은 최 장군의 목을 따버렸다. (475)
중국에서 주은래, 유소기 등 청년 학생들이 주동한 5.4 운동은 그 첫날의 선언문에서 조선인의 용기를 본받으라고 격했다.
"저 조선인민을 보라. 우리가 생명의 불이 끊어진 것으로 알았던 조선인민은 맨가슴을 펴고 일본 제국주의 총칼에 맞서 싸우고 있다. (...) (484)
여기서 훗날의 파란 많은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의 스케줄이 합의된 것이다.
박은 일본 정부와의 이 합의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 선물로 들고 가게 돼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반일적 고집에 골치 앓고 민주당 정부의 우유부단에 속을 태운 터라, 군인 독재권력으로 하여금 기어이 매듭을 짓게 하려는 정책이었다.
일본 정부와의 이 사전 합의가, 새로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이 박을 워싱턴으로 초대하는 외교 시나리오의 가장 중요한 동기이고 목적이었던 것이다. (506)
정치권력과 언론기능은 일정한 긴장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권력자는 그 '일정한' 한계조차도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528)
■ 저자: 리영희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났고, 1950년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조선일보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역임했고,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대학원에서 연수했다. 1976년 한양대 문리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해직되었다가 1980년 복직되었고, 같은 해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 복직되었다. 1987년 미국 버클리대에 부교수로 초청되어 강의했으며 1995년 한양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 후 1999년까지 같은 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를 역임했다. 2010년 타계했다.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 <베트남 전쟁> <역설의 변증> <자유인> <인간만사 새옹지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스핑크스의 코> <반세기의 신화> <대화> <분단 민족의 고뇌> 등이, 편역서로 <8억인과의 대화> <중국백서> <10억인의 나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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