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생애 전환 학교>에서 소개된 이창동 감독의 2010년 영화 <시>를 봤다. 유튜브에서 전체를 볼 수 있었다. 2시간이 넘는 긴 영화라서 약간 지루한 감도 있었다. 하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생각하며 보니 볼만 했다.
주인공인 양미자 역으로 나온 배우 윤정희 씨에 대한 사연이 먼저 떠올랐다. 지난 9월에 본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가진 재산 때문에 피아니스트인 남편 백건우 씨와 딸에 의해 치매 상태에서 강제로 유럽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60년대 최고의 여배우였다는 윤정희 씨가 저렇게 살고 있구나 싶었는데 영화 <시>에서 역할이 66세의 알츠하이머(치매)를 앓는 노인이었다. 영화가 미래를 예측한 것일까. 영화처럼 그녀에게 치매가 왔다. 안타깝고 놀라운 사연이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크게 두 가지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여학생 시체가 물에 흘러내려가고 있는 장면과 미자가 병원에서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는 장면이다. 이 두 가지 장면은 시종일관 스토리의 전반을 지배한다.
미자는 몸이 부자연스러운 회장이라는 할아버지 환자를 목욕시키고 주변 청소를 해주면서 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환자를 돌보는 일은 힘겨워보인다. 더구나 허름한 주택에 들어오면 딸의 아들을 돌봐야 한다. 손자는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해 제멋대로다. 어렵게 생활하며 손자까지 돌봐야 하는 미자의 인생이 힘겨워 보이는 부분이다. 가난한 삶이 2대, 3대로 이어지고, 손자의 미래도 밝아 보이지 않는다. 딸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자는 치매 초기 진단을 받았지만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시'를 배우기 위해 강의에 참석한다. 치매를 가진 노인이 새롭게 시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부분은 애처롭다. 조그만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감상에 빠진 소녀가 되어 수시로 노트에 시상을 기록한다. 시인이 되길 꿈꾼다. 하지만 좀처럼 시다운 시를 쓰지 못한다. 김용탁 시인의 강의에도 참석하고, 시낭독회에도 참석하며 사람들과도 교류한다. 자신만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려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간다.
죽은 여학생은 주변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자살한 거였고 노트에 적힌 6명의 남학생 중 한 명이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손자에 대한 내면의 분노와 소녀에 대한 슬픔이 뒤섞인 심정이다.
다른 5명의 학부형들은 여학생의 가난한 엄마와 3천만 원에 합의를 보려고 한다. 미자는 손주로 인해 얼떨결에 참석하는데 분담금인 500만 원이 없어 고민을 거듭한다. 딸에게도 손자에게도 속 시원하게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는 미자다.
돈에 대한 고민, 시인이 되고 싶은 소망, 가족의 가난에 대한 절망이 그녀를 감싼다. 소나기에 흠뻑 젖기까지 고민하다 결국 분담금 500만 원을 구하기 위해 돌보고 있는 회장을 찾아간다. 그가 이전에 원했지만 거절했던 거래를 한다. 노년에 아름다운 말을 모아서 시를 쓰려고 했던 소망이 현실의 가난과 손자의 비행으로 인해 나락으로 빠져버린다. 그 상태에서 자신의 시를 쓰고 강의 마지막 시간에 제출하고 사라진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중에 확인해 보니 박기영의 노래 <아네스의 노래>였다. 들어보니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잘 어울린다. 김용탁의 낭독이 양미자의 낭독으로 그리고 여학생의 낭독으로 이어지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양미자는 여학생처럼 높은 다리에서 뛰어내린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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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가난하고 파편이 된 가족으로 불손한 손자를 부양해야 하는 삶이 현실을 벗어난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희망보다는 안타까움을 준다. 시종일관 우리 사회의 양지보다는 음지를 비추는 카메라 앵글과 그들의 평범하고 싶은 세상살이에 마음이 겸손해진다. 미자의 꿈이 이뤄지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또 한 층의 인생살이를 구경했다는데 만족한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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