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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492]게으름에 대한 찬양①_의무와 과도한 노동 대신 여가와 교육이 필요

by bandiburi 2021. 12. 5.

그러나 아무런 의무를 지우지 않은 채 유한 계층을 대대로 세습하는 것은 엄청난 낭비다. 이 계층의 구성원 그 누구도 근면하라고 가르쳐지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이 계층이 전반적으로 유별나게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이 계층에서 어쩌다 다윈 같은 사람이 하나 나왔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여우 사냥이나 하고 밀렵자를 벌주는 일 이상의 지적인 일에 대해선 생각조차 해본 적도 없는 시골 신사들이 수만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31)

 

버트란드 러셀의 책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첫 번째 내용인 '게으름에 대한 찬양 In Praise of Idleness'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1935년에 출간된 이 책의 내용이 80년 가까이 지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통찰을 주고 있다. 소스타인 베블런을 통해 '유한계급'이란 의미가 영문으로 Leasure Class란 것을 알았을 때 의미가 많이 와닿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러셀도 '유한 계층'이 일반 노동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데 그들의 부를 세습하는 것이 낭비라고 비판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일을 할 필요는 없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사냥과 같은 소일거리로 지적인 일을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다. 현재도 금수저라고 하며 부모 잘 만난 자녀들이 상속과 증여를 통해 자신의 노력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기업 오너 3세, 4세들이 마약에 탐닉하는 것은 그 부작용일 것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33)

 

산업의 발달로 우리는 과거와 달리 편리한 삶,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이 되었지만 국내적으로나 글로벌하게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굶주림으로 하루하루가 힘겨운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한쪽에서는 부유층의 호화로운 삶이 언론에 보도된다. 어리석다고 러셀은 말한다. 모두가 적게 일하고 여가를 가지며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데 어리석게도 여전히 과거처럼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며 정력적으로 일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예외지만 유럽에는 이러한 일을 하는 두 계층보다 존경받고 있는 제3의 계층이 존재한다. 바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남들에게 일할 수 있는 은전을 베푼 대가를 받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러니 잘못하면, 내가 지주들을 찬양하는 것으로 비춰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안락하게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일해야 한다는 모든 신조가 생겨난 뿌리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18~19)

 

오늘날까지도 왕이 근로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려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 영국의 임금 생활자들의 99퍼센트가 아마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20)

 

과거의 지주계층이 토지 소유를 통해 타인들의 노동력의 결실을 이용해서 게으를 수 있었다. 그들은 교묘하게 사회적인 프레임을 주도한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중요한 미덕이라고 선전하고 교육한다. 99퍼센트의 국민들이 이에 따라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을 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주 7일 근무도 마다하지 않는다.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도 감수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토지 소유 역시 일부 개인들에게 편중되어 있다. 그들은 토지가격의 상승으로 불로소득을 누리고 있다. 또한 토지 외에 부동산을 통한 부의 증대에도 열을 올린다. 국가 권력은 국민의 에너지를 국부를 창출하는 쪽으로 가이드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은 이미 가지고 있는 권한을 손상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럴수록 기득권을 극복할 수 있는 철학과 신념을 가진 리더들이 많이 정치, 사법, 정부에 포진돼야 하겠다. 부의 세습과 교육을 통한 권력의 세습이 심화되는 이 나라에서 요원한 일이 될까 걱정이 앞선다.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박탈을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다만 우매한 금욕주의 - 그나마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나 강요하는 - 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도한 노동을 주장케 할 뿐이다.(24~25)

 

우리에게 자유로운 여가 시간이 있더라도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한다. 둘째 아들이 수능시험을 마치고 2주가 되었는데 주로 하는 일이 넷플릭스를 통해 드라마 보기나 게임이다. 아이가 수능 준비를 하는 동안은 시험을 잘 보는 훈련을 집중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여유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부모로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고 내용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긴 하는데 직접적으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스로 느끼고 따라올 것이라 생각한다. 

 

지배계층들, 특히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교육 선전하는 일을 담당하는 계층의 태도는 세계의 지배 계층들이 소위 '정직한 무산자'들에게 늘상 설교해 온 것과 거의 똑같다. 근면하라, 절주하라, 먼 장래의 이익을 위해 장시간 일하려는 의욕을 가져라, 심지어는 당국에 순종하라는 것까지. 하나같이 재등장한 것들이다. (중략)

러시아에서도 육체 노동과 관련해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오랜 세월 부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정직한 노동'을 칭찬하는 글을 써왔다. 소박한 생활을 예찬했고, 부자들보다 가난한 자들이 천국에 갈 가능성이 더 높다고 가르치는 종교를 공언해 왔으며, 물질의 공간적 위치를 변화시키는 일에는 특별한 고귀함이 있다고 육체 노동자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려고 애써왔다. (25)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게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없었다. 기회의 평등조차도 사실은 없었다는 것을 권력자들의 자녀를 보면 알 수 있다. 과거에서 부자들과 그 세력들은 노동자들에게 가난을 받아들이고 소박한 삶을 인정하게 하고, 현세가 아닌 천국을 꿈꾸며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라고 믿도록 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 언제까지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만족하며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죽을 때까지 불가능하다. 지금 바로 이런 불평등과 편향된 부분을 깨닫고 때로는 주체적으로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진지한 사람들은 영화 보러 가는 습관에 대해 끊임없이 비난하며 그런 버릇은 젊은이들을 범죄로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영화를 만드는 노동은 훌륭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이기 때문에, 또한 돈을 벌게 해 주기 때문에.(29)

 

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이 반드시 불성실한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 얘기는 하루 4시간 노동으로 생활 필수품과 기초 편의재를 확보하는 한편,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하도록 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보다 더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30)

 

김밥을 사러 전문점에 드렸더니 몇 주 전과 달리 키오스크가 설치되어 그곳에서 주문을 한다. 빠르게 우리 사회 곳곳에 사람을 대체하는 기기들이 들어오고 있다. 이는 업주나 키오스크를 제작하는 제작사에 이익이 될 것이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전 사회적으로 이런 변화가 노동력을 줄이면서도 사회적 부를 증가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결국은 주 5일 근무가 아니라 주 4일 근무로 변하더라도 현재와 동일한 재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이다. 시간의 단축은 여가 시간을 늘릴 것이고 교육이란 이런 여가를 제대로 보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독서습관492_게으름에 대한 찬양①_버트란드 러셀_2016_사회평론(211203)


■ 저자: 버트런드 러셀 (B. Russell, 1872~1970)

러셀은 40여 권에 이르는 수많은 저작을 남긴 철학자요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문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가졌던 러셀의 삶은 활동적인 사회 참여로도 유명하다.

98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지적 정렬로 하루 동안 평균 약 3천 단어 이상의 글을 써내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었고 그 분야는 철학에서 수학, 과학, 사회학, 교육, 정치, 예술 및 종교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 좌파, 회의적 무신론자로 불렀던 러셀은 노년으로 갈수록 '정치적' 인물이 되었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시작한 그의 평화운동은 수소폭탄실험 반대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으로 이어졌고 쿠바위기와 중국 인도 국경 분쟁에도 적극 개입하였다.

러셀의 저작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책이 바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다. 러셀은 이 책에서 산업사회가 낳은 인간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오히려 여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논쟁적 쟁점을 제기했다.

러셀의 역설적인 주장이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우리의 어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말해 주기 때문이며 정신없이 지나치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철학자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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