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어떤 내용인지 모르고 시험을 위해 무조건 암기했던 기억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역사를 재미있고 즐겁게 교사와 학생이 의견을 교환하며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관련된 자료를 함께 찾아보고 작은 사건이라도 상상력을 동원해 그 시대로 떠나보고 토론했다면 더욱 또렷하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사도 학생도 대학입시라는 무거운 짐 속에 놓여 있었고 학습법에 대한 훈련이 거의 전무했다.
이 책은 저자 고미숙이 고전평론가로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자신만의 어투로 연암 박지원의 삶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기다. 저자의 유튜브 강의를 들어본 입장에서 책의 내용은 마치 옆에서 강의하는 듯한 그녀의 말투 그대로다. 그래서 부담없이 저자와 함께 여행할 수 있었다.
건륭제는 만주족이 중원을 정복한 이후 네번째 황제다. 할아버지가 '왕중왕'으로 꼽히는 강희제고, 아버지 옹정제 역시 저 머나먼 변방 관리들까지 손금 읽듯 체크했다는 성군이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 이 트리오의 치세는 청왕조의 절정기이자 중국이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웅비한 시기이기도 했다. (413)
책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아래와 같이 두 가지를 정리해본다.
첫째, 박지원이란 어떤 사람이었나 알 수 있었다. 정조시대에 노론이 득세하고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시대에 기득권을 가진 노론이었지만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던 인재였다. 성리학이 득세하던 시대에 열린 사고를 가지고 노매드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삶을 즐겼다. 우연히 옵서버처럼 부담 없이 삼종형을 따라 떠난 중국 열하로의 여행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열하일기>다. 호기심이 많고 사농공상을 떠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날이라면 더욱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을 것이다. 청나라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라며 양반 지배세력이 소중화 사상에 젖어 있을 때 그들에게서 배울 점을 찾았다.
직업도 신분도 다르지만, 이들은 주류major에서 벗어난 '소수자'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을 묘사하는 연암의 언어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똥을 져 나르는 엄항수가 정신적으로는 가장 고결하다고 하는 것이나 양반이 되려고 그토록 갈망하던 정선부자가 양반문서를 보고서는 '당신네들이 나를 도둑놈이 되라 하시유' 하며 달아나는 것, 송욱이나 광문자 같은 '거리의 자식'들도 군자들의 위선적인 사귐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등 <방경각외전>의 이야기는 온통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역설로 흘러넘친다. 이를테면, 언더그라운드에서 웅성거리던 '마이너들의 목소리'가 연암의 입을 빌려 지상을 활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41)
둘째, <열하일기>가 1780년 중국 건륭제의 70세 생일인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과 함께 중국 연경(북경)으로 떠난 여행기다. 이 사절단을 이끈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아무런 부담없이 40대 초반의 나이에 동행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자신의 몸에 기록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고 수시로 적었다. 요즘이야 작은 수첩이나 스마트폰으로 기록이 용이하지만 당시에 말을 타고 이동하며 큰 종이와 붓으로 기록하는 박지원을 상상해보면 매우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의 호기심이 대단했다. 일행들을 따돌리고 밤에 밖으로 나와 중국 사람들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고 이를 또한 기록했다.
환생은 스스로 다음생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윤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쿤둔>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 신비로운 제도에 대해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건륭제 당시에는 파첸라마 6세가 대보법왕의 역할을 하던 때였고, 그의 행차는 중국 역사에서도 굉장한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열하에는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415)
따라서 황제가 조선 사신단으로 하여금 파첸라마에게 경배를 드리게 한 것은 일종의 시혜였다. 그러나 사신단에게 그건 날벼락같은 소리였다. 만주족도 노린내 난다고 고개를 돌리는 판에 저 변방 야만족의 승려 따위에게 머리를 숙이라니. 가진 거라곤 '소중화 프라이드'밖에 없는 조선인들은 정사에서 말구종배에 이르기까지 울고 불고 심지어 황제에게 팔뚝질을 해대는 등 갖은 '난리부르스'를 다 떤다. (416)
만수절 행사 전에 연경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건만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의 피서산정에 가 있었던 것. 게다가 만수절 행사에 조선 사신단을 꼭 참여시키라고 특별명령까지 내렸다. 이런! 일행은 다시 짐을 챙겨 연경에서 열하로 달려가야 했다. 무박나흘의 강행군이었다. 야삼경에 고북구 장성을 통과하거나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대모험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 (429)
연경까지 힘들게 도착했지만 건륭제가 열하에 있으니 정해진 기한내에 도착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황제의 명에 따라 기한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개의 강을 위험을 감수하며 건너는 과정을 거친다.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특히 재미있던 것은 건륭제가 파첸라마에게 절을 하라고 했을 때의 대응이다. 유교국가인 조선의 관리로서 낮게 보는 라마교 승을 만나는 것을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건륭제의 화를 자초했고 떠날 때는 냉대를 받게 된다. 얼마나 조선 지배층의 생각이 경직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청나라가 조선에 비해 배울 점들을 북학파에 속한 지식인들이 글을 통해 전했지만 정조마저도 흔쾌한 접목하지 못했다. 결국 1800년에 순조가 즉위하면서 북학의 분위기는 쇄국의 분위기로 전환되어 조선의 발전은 한참 뒤처지게 되었다.
여행을 싫어하는 자의 편력이라?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의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 철학자 '에피쿠로스 Epicurus' 식으로 말하면,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위 이른바 '클리나멘 clinamen'이 그것인 셈. 돌연 발생하는 방향선회, 그것이 일으키는 수많은 분자적 마주침들, 편위란 이런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터, 내가 <열하일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도 이런 우발적인 편위들을 통해서였다. (17~18)
3천 년에 한 번씩 피는 꽃, 우담바라. 살아서는 서릿발 같은 재판으로 이름을 날리고 죽어선 염라대왕이 되었다는 포청천. 본명은 포증, 송나라 때 유명한 판관이다. (중략) 그에게서 웃는 모습을 기대하기란 요원하다. 그런데 박제가는 연암의 시짓기를 우담바라 꽃과 포청천의 웃음에 비유했다.(44)
홍대용과 정철조, 두 친구는 머리를 맞대고 황도, 적도, 남극, 북극 등 '지구과학'에 대해 열나게 토론하고 있는데,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 잠을 청하는 연암의 모습이 한 편의 '시트콤'이다. 하지만 이때 주워들은 이야기로 뒷날 열하에서 중국 선비들한테 온갖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우쭐댔으니 참, 연암처럼 친구복을 톡톡히 누린 경우도 드물다. (56)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한 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런 점에서 '백탑 청연'은 연암 생애의 하이라이트이자 중세 지성사의 빛나는 '별자리'다. 그들은 체제와 제도가 부과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윤리와 능동적인 관계를 구성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북벌론에서 북학으로 사상사의 중심을 변환한 것도, 고문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체적 실험을 감행한 것도 모두 이런 역동적 관계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리라. (66)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왕위계승을 꺼려하던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국영 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중략) 평소 홍국영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삼가지 않았던 연암 주변에까지 점차 권력의 그물망이 조여들고 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이 그에게 피신할 계획을 세우도록 재촉하는데, 이 장면도 한 편의 '드라마'다. (69~70)
그러나 연암은 이 기회를 제도권 밖에서 지식의 전수를 실험하는 일종의 '열린 교육터'로 활용한다. 즉 그는 오로지 과거시험밖에 몰랐던 변방의 젊은이들에게 학문하는 즐거움을 가르친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과거 공부 이외에 문장 공부가 있고, 문장 공부 위에 학문이 있으며, 학문이란 글을 끊어 읽거나 글에다 훈고를 붙이는 것만으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연암은 입시 공부에 시달리는 학인들에게 사색하는 법, 토론, 분변하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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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문체반정이 피 튀기는 정쟁은 아니었으나, 그 파장은 가혹했다. 정조시대 이후 새로운 문체적 실험이 완전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지성사적 측면에서 '암흑기'라 해도 좋을 정도로 황량하기 그지없다. 피를 흘리지도, 경제적 제재를 가하지도 않았지만 지식인들은 자기 검열을 통해 스스로를 길들여 갔던 것이다. (110~111)
결국 정조가 반정反正, 곧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 할 때의 정正의 의미는 간단하다. 우주와 역사에 대한 깊고도 원대한 사유, 중후한 격식을 갖춘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중략) 그런데 다양한 흐름이 좌충우돌하긴 했지만, 정작 창작의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즉 중국처럼 초대형 장편소설들이 탄생하지도 않았고, 고증학의 흐름 역시 별반 대단치 않았다. 판소리계 소설이 크게 번성하긴 했지만, 중국 소설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단편'에 불과하다. (118)
그러나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은 문장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문장이란 무릇 저 천상의 가치, 곧 천고의 역사와 우주의 이치를 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소품문들은 지극히 섬세한 정감의 떨림을 드러내 사람들로 하여금 한없는 슬픔에 잠기게 하지 않으면, 작고 미세한 것들을 밑도 끝도 없이 주절대 시선을 흩어버리지 않는가. 이런 데 빠져들면 사대부들의 존재 근거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고문으로 표상되는 거대담론이 사라진다면, 사士계급은 대체 무얼 의지해 통치이념을 구축한단 말인가. 그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작은 것들의 향연' 속에서 고문의 권위는 차츰 해체되어 갔다. (125)
그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소품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문장에 생의 약동하는 기운을 불어넣을 것인가였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어디다 쓰겠는가?" 말하자면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공명통'이어야 한다. 찬탄이든 증오든 공명을 야기하지 못하는 글은 죽은 것이다. (128)
그 여파 때문이었던지 이 문제작은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까지 역임했음에도 조부의 문집을 공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뜨거운 감자'였다. 마침내 1900년 창강 김택영의 주도로 <연암집>이 처음 출판되었고, 이듬해에는 <연암속집>이 발간되었다. <열하일기>가 단독으로 출간된 것은 1911년 최남선이 고전 보급을 목적으로 창설한 조선광문회가 발행한 것이 최초이다.(137)
정조가 명명한 소위 '연암체'의 실체는 바로 이 주류적 언어를 '더듬거리게'하고, 나아가 문체의 경계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균열 그 자체에 있는 것일 터. 그러므로 패사소품이 되는 부분만 잘라버리면 '어엿한' 고문이 되리라 보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다. 리좀의 한 부분을 잘라 땅속 깊숙이 심는다고 어찌 수목의 뿌리가 될 것인가(140)
조선시대 연행에서 '유리창'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무려 27만 칸에 달하는 서점, 골동품 가게들이 즐비한 지식의 보고, 아니 용광로. 그야말로 세계의 지식이 흘러들어오고 다시 뻗어나가는 곳이 유리창이었다. 그러므로 근대 이전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있어 유리창은 연행의 필수코스였다. (163)
그의 관심은 이렇게 벽돌, 가마, 온돌에서 시작하여 수레, 말로 이동한다. 수레와 말은 공간적 한계를 가로지를 수 있는 이동수단이기 때문이다. "대개, 수레는 천리로 이룩되어서 땅 위에 행하는 것이며, 뭍을 다니는 배요, 움직일 수 있는 방이다. 나라의 쓰임에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조선에도 수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조선의 수레는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틀에 들지 않으니, 이는 수레 없음과 마찬가지다.(210~211)
부에 대한 연암의 메시지는 이렇다. "원컨대, 천한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 하여 꼭 기뻐할 일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굴러올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며,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 오싹하며 뒤로 물러서야 할 터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복권이나 증권으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운을 부러워하기 바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결코 행복이 아니다. (217)
한편, 형부 앞을 지나다 불쑥 들어가서 죄인에게 따귀를 때리는 형을 가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고, 또 시장을 돌아다니다 최고위급 관리들이 직접 시장에 나와 물건을 흥정하는 장면을 보고 놀라워하기도 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습속이기 때문이다. (219)
'달라이 라마'란 '지혜의 바다'란 뜻으로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제도적 명칭이다. 달라이 라마가 단순히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통치권자로 임명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인데, 그것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건 환생이라는 믿음이 제도적으로 승인되었기 때문이다. (230)
설상가상으로 2부는 1부의 속편이 아니다. 1부에서 돈키호테가 한 기이한 모험들이 책으로 간행되어 사람들 사이에 널리 유포된 상황이 2부의 출발지점이다.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자신이 저지른 모험을 확인하기 위한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이처럼 <돈키호테>는 기상천외한 모험담이기 이전에, 파격적인 언어적 실험이 난무하는 텍스트다. (247)
시점 변환이야말로 연암이 즐겨 사용하는 기법 중 하나다. 말하자면, 타자의 눈을 통해 조선의 문화나 습속을 바라봄으로써 익숙한 것들을 돌연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 사신들의 의관은 신선처럼 빛이 찬란하건만, "거리에 노는 아이들까지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서" 도리어 연극하는 배우 같다고 한다. (285)
연암이 보기에 청나라 쪽의 입장은 이렇다. "조선은 본래 예의로 이름이 나서 머리털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데, 이제 만일 억지로 그 심정을 꺽는다면 우리 군사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뒤엎을 터이니, 예의로써 얽어매어두느니만 못할 것이다. 저들이 만일 도리어 우리 풍속을 배운다면 말 타고 활쏘기가 편할 터인데, 이는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며 드디어 중지시켰다. 말하자면, 조선의 예를 존중해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문약함을 그대로 방치한 것이었다. (330)
이게 연암이 파악하는 천하의 형세다. 황제와 몽고, 서번, 그리고 한족과 만주족. 이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집약되는 한편, 그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제국의 배치가 한눈에 포착되지 않는가. 편협한 분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심층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자만이 제시할 수 있는 지도 그리기. 그의 북학이념이 단지 근대적 민족주의로 포섭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32)
중국을 유람하다가 마음껏 주희를 반박하는 이를 만나면, 반드시 범상치 않은 선비로 여기고 이단이라면서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차분히 대화를 이끌어 그 속내를 알라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를 통해 천하의 대세를 엿볼 수 있으리라. <심세편>
이 유연한 도움닫기! 여기에서도 역시 영토화하는 선분과 탈영토화 하는 선분이 뒤섞여 있다. 그의 위치는? 두 선분의 '사이'에 있다. (336)
이단을 배척함으로써만이 존립할 수 있는 이념이란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도그마다. 도그마란 원초적으로 배제와 부정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서구 중세의 '마녀사냥'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긍정적 생성을 통해 가치를 계속 증식해나갈 수 있다면 굳이 이단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니, 이단이라는 개념 자체도 불필요할 것이다. (338)
'이용'이 있은 뒤에야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롭게 사용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그리고 생활이 넉넉지 못하다면 어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도강록> (205)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여성들은 정말 운동을 하지 않는다. 헬스나 에어로빅처럼 '몸매가꾸기'에만 주력할 뿐, 일상에 뿌리내린 운동에는 거의 무관심한 형편이다. 전족이 말해주듯, 권력은 언제나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자기의 신체를 능동적으로 조절하고 변이하는 능력, 이것이 없이 여성해방은 불가능하다. (408)
이로써 보건대 카메라는 또 하나의 판타지다. 빛과 조명이 어우러져 탄생한 판타지! 하여, 결코 카메라를 믿지 마시라. 다큐조차 철저히 연출의 산물이다. 어떤 프레임으로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432)
■ 저자 : 고미숙
고전평론가.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작은 광산촌에서 자랐다. 춘천여자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가난했지만 '공부복'은 많았던 셈이다. 다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이다. 지난 십여 년간 <수유+너머>에서 활동했고, 2011년 이후 인문의역학연구소 <감이당>(gamidang.com)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감이당>의 모토는 몸, 삶, 글의 일치다. '아는 만큼 쓰고, 쓰는 만큼 사는' 길을 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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