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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독서습관467_자기 계발 및 사진 그리고 음식의 거짓말과 현대사회_거짓말 상회_2018_인문학협동조합_2018_블랙피쉬(211031)

by bandiburi 2021. 11. 1.

매주 책을 반납하고 빌리기 위해 들리는 정약용도서관 2층의 추천도서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 청년 취업 등 이슈에 대한 책들이 놓여 있는데 모두 빌리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 그중에서 <거짓말 상회>라는 제목에 '거짓말 파는 한국사회를 읽어드립니다'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책을 빌렸다.

내용이 궁금해서 주말을 이용해 읽었는데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은 긍정적이지만 우리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 없는 상태라는 점에서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사회는 한 가문의 총력전을 요구한다. 한 개인의 노동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릴 것을 독려하면서 그를 위해 그의 아내[남편]가, 부모가, 그리고 자식이 희생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젊은 부부는 맞벌이로 일하며 밤이 늦어 퇴근하고 그들의 늙은 부모는 육아 전선에 내몰린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아이를 업고 어린이집으로 가고, 다시 아이를 하원 시키고는 놀이터로, 키즈 카페로, 그 어디로 간다. 그들 사이로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내다 파는 조금 더 늙은 노인들이 지나간다. (18~19)
책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째, '자기 계발의 거짓말'이다. 성인이 된 자녀를 둔 부모 입장에서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 '내가 학창 시절에는~'이란 말로 아이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산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일할 기회가 많고 대학으로 진학하는 비율도 적었던 시대와 지금의 청년들이 처한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 선진국의 초입에 있는 나름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그만큼 국가경제의 성장을 과거처럼 기대할 수 없고 일자리의 변화도 급격하다.

환경변화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일방적이 아닌 건설적인 대화가 될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의 입장을 헤아리려고 노력한다.
2000년대를 거쳐 2010년에 이르러 자기 계발론의 대중적 영향력은 최전성기에 이르렀지만, 최상위 1% 특권층 사회에 포획된 착취 논리가 자기 계발의 실체라는 자각도 급격히 확산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2010년대 이후 청년 담론의 핵심적인 스탠스이기도 합니다. (5페이지)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한 자기 계발의 거짓말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개인들을 자신을 둘러싼 구조와 마주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이 사회의 시스템이나 구조는 잘못되지 않았고 모든 문제는 승리하거나 살아남지 못하는 나약한 개인에게 있다는 자기 계발의 논리, 이것은 패배한 다수의 개인에게 끊임없이 증식되는 자기 혐오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적이다.(29)

 

책에서 소개된 여러 사례 중에서 우리 사회가 저출산, 인구감소를 걱정하고 있지만 구조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일부분의 근시안적인 처방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 있다.

부부가 모두 일해야만 집을 얻고, 도시에서 자립할 희망을 가지고 살지만 현실은 맞벌이를 하며 자녀를 양육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부부는 일터로 가고 조부모까지 자녀양육에 참여해야만 하는 팍팍한 현실이다.

그러면서 국가는 저출산 대책을 운운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빈부격차가 자녀양육에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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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래 청년 세대와 기성세대는 언제나 치열한 헤게모니 경쟁을 벌여 왔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청년이 이전 세대에게 완벽하게 패배를 고한 역사는 없다. 청년은 스스로가 어떠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를 목도해야 한다. 주체적 각성, 거기에서부터 다시 한번 전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헬조선'이라는 폐허를 극복할 주체는 지금의 청년 세대이기 때문이다. (44)

 

결국 자리에서 끌어내려진 대통령 또한 헬조선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구축한 자기 계발의 서사, 그 거짓이 지금의 시대를 불러왔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절망적이다. (65)
둘째, 사진의 거짓말이다. 우리는 정부기관이나 언론, 기업의 홍보부서에서 배포하는 사진을 보고 사람과 조직을 판단하게 된다. 이런 경우 사진은 제공자의 보여주고 싶은 의도가 있다. 때로는 그 사진의 이면을 보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식 뒤 카퍼레이드와 4년 뒤에 벌어진 퇴진 촛불집회 사진은 권력의 주인이 시민에게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권력자가 자신의 강함과 인자함을 보여주기 위한 사진은 자주 이용된다.

사진에 대한 글 중에서 안타까운 점은 노동자들의 고공농성과 단식에 대해 우리들이 둔감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삶과 죽음을 걸고 투쟁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언론에 보도되는 지면을 통해 만나게 되는데 그 언론이 지면을 좀처럼 할당하지 않는다. 단식 기간이 길어지고, 고공투쟁을 높이가 높아져야만 관심을 보인다. 이 부분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렇다면 사진 이미지를 보고 정치가에게 표를 던지고, 그에게 정치적인 판단을 위탁해 버리고도 우리는 자신을 과연 주권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대의제에 의해 은폐된 과두 정치에 불과하다고 썼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정치적 권리란 고작 몇 명의 정치 엘리트 중 한둘에게 표를 던질 자유뿐이라는 것이다. 잘 정제되고 요리된 홍보 사진을 보고 정치가를 믿어 버리는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초라한 정치적 자유마저도 감당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닌가? (100)

 

우리는 사진 속의 굶고 있는 약자들의 육체를 바라보며,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딛고 있는 사회적 조건이 우리의 그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깊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154)

 

2016년 말의 촛불 정국은 이 취임식 사진에서 잊혔던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대통령과 정치인들, 그리고 심지어 시민들조차 잊었던 것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공화국의 주권자는 시민이라는 것, 그리고 통치자의 권력과 행정 제도의 정당성은 시민으로부터 위탁된 것이라는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157~158)

 

 

셋째, 음식의 거짓말이다. 유튜브에는 먹방이 인기고, TV 프로그램에서도 음식 소개는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TV에서 소개되는 음식점이 모두 우리의 취향에 맞는 맛집이 아닌 것부터가 거짓말이라고 볼 수 있다.

책에서 소개된 '맥적'의 유래에 대해 우리들이 얼마나 인터넷 정보에 대해 맹신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인터넷에서 조회한 정보도 누군가 가공해서 올리게 되는데 그 사람의 글이 신뢰성이 있는지 좀처럼 알기 어렵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낙관주의자란 "지금 이곳에 있는 세계가 도달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라고 말했다. 만약 지금의 세계가 역사적으로 주어진 최선의 형태라면, 개인이 그것을 변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낙관주의는 현재 주어진 권력의 구조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비관주의와 유사하게 작동하는 세계 인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희망이란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고 믿고 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의한 권력을 교체하기 위해 행동하는 일,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우리가 겪어 보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고 움직이는 일이다. 더 나은 세계는 어쩌면 지극히 강고하고 당연해 보이는 자본주의와 대의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희망은 일종의 세계관이다. (165~166)

 

우리가 거리에 나서는 순간 사회는 극적으로 변화한다. 즉 부조리한 권력이 있어도 아무도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부당한 권력에 대해 시민들이 분노하고 들끓어 오르며 항의하는 사회로 바뀐다. 권력자에게나 시민에게나 두 사회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일본의 철학자 기라타니 고진은 설명한다. (167)

 

저자는 인터넷에 소개된 맥적의 유래가 왜 잘못되었는지 낱낱이 밝힌다. 유래가 나왔다는 인용된 책을 확인했는데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우리가 현재 즐기고 있는 떡갈비, 불고기 등의 유래를 찾아들어가면 실제는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은 굉장히 높은데 실제로 역사적 관점에서의 관심은 허술하기 그지없다는 비판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한마디가 반짝한다. "기록이라는 것은 원래 그 당시 너무 당연한 일은 적지 않는다. (중략) 어느 시대의 당연한 일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없고, 무리하게 알려고 하면 거기에서 터무니없는 오해가 생기게 된다." 역사학자의 교훈 앞에서, 이번에는 나를 장애물 달리기에 내모는 빈도가 무척 높은 음식, '맥적'이 반짝하고 떠오른다.(175~176)

 

음식에 대한 학자의 연구와 시민의 교양이 두루 부족함도 직시해야 한다. 음식 문화사 연구는 자료를 깊이, 옳게, 제대로 읽지 못하고 답습에 빠져 있다. 시민과 대중문화 종사자는 인터넷 검색 창 찍어 나오는 내용을 복사해 붙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지난 음식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도, 오늘의 음식 현실에 대한 정당한 인식도 불가능하다. 맥적을 둘러싼 거짓말이 환기하는 것은 오늘의 한국인이다. 저마다 먹는 얘기 하겠다고 수천 년을 거슬러 오르지만, 실제로는 지난 역사에도 오늘에도 성의가 없는 한국인의 허름한 음식 담론이다. (184)

 

 

곡물 가루에 바탕을 둔 식생활, 또는 곡물 가루에서 온 음식을 분식(粉食)이라고 한다. 분식을 대표하는 곡물 가루가 밀가루다. (188)

 

인문학적 소양을 기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시민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마음의 포만감을 느낀다

 

지난 경험과 고착된 감각의 거짓말이 낳은 "맛없다"를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벗어남은 더 넓은 세계로 창을 내는 아주 구체적인 행위다. 미각에 깃든 거짓말 하나를 그 뿌리까지 반성하다 보면, 내가 맞을 세계를 더욱 넓힐 수가 있다. 내가 나아갈 세계가 더욱 넓어질 수 있다.(197~198)
음식, 사진, 자기 계발의 문구 등 우리 주변의 익숙한 서사들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져야 한다. 특히 소중하거나 사랑하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괜찮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는 순간 그 작은 거짓말들은 어느새 돌이키기 힘든 괴물이 되어 우리를 집어삼키고 만다. (262)
이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개인들에게는 여전히 시대적 책임이 남는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 그것이 인물이든 조직이든 무엇이든 그것을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한 개인은 그가 속한 시대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져야 하는 것이다. (266~267)

 

■ 저자 : 인문학협동조합

삶과 앎과 노동의 행복한 공생을 꿈꾸는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의 각성과 결의로 출발했다. 공부와 인문학 본연의 상상력과 태도, 노동에 대한 존중을 통해 앎과 삶의 불일치를 협동적 활동으로 극복하고, 시민들과 인문학의 공유를 통해 서로의 삶에 보탬이 되게 하고, 인문학자와 인문학 공간들의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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