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책을 읽고 독서록을 올리며 사회현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우리 사회에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 청년취업, 주택문제 등이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도 빈부격차에 대한 관심이 많다. 자연스럽게 도서관에서 책을 고를 때 소비사회, 빈곤, 노동 등의 용어가 표지에 들어 있으면 손이 간다. <새로운 빈곤>도 다른 책을 찾다가 마주친 책이다.
생산 중심의 사회에서 소비 중심의 사회로 이전되면서 '노동'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산업혁명 시기에는 공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부족했다. 농업 중심 사회에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살던 사람들에게 정해진 규율에 따라 공장에서 노동하도록 하기 위해 '노동윤리'와 '성실성'이란 말을 주입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쓰레기 취급을 했다. 빈곤층은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최저생계 수준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공장을 운영하는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는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방식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중공업 중심의 산업화를 한창 진행하던 70년대와 80년대에 수많은 농촌 청년들이 대규모로 도시로 이동하고 산업역군이란 명목으로 노동 공급원의 역할을 했다. 학교에서는 산업에 필요한 성실성을 강조하는 도덕교육과 실무에 필요한 과목을 가르쳤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노동 중심의 산업이 자동화되고 해외로 이전되면서 노동은 과거처럼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소비사회가 되며 필요한 것보다 항상 많이 생산하는 잉여사회가 되었다. 이를 소비하도록 사람들에게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가 되었다. 소비가 미덕인 것처럼 광고를 한다.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차별화할 수 있도록 일반인들이 갖기 어려운 고가품을 구매한다.
이제는 기업들이 한 나라안에서만 사업을 하지 않기에 노동의 가치는 글로벌하게 봐야 한다. 자본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부유층과 노동을 통해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노동의 수요가 감소하므로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쉬운 환경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이 아닌 AI 등 자동화를 통해 확보된 소득을 활용해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본소득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회적으로 찬반이 있는 '기본소득'에 대한 논쟁은 사회가 안정되고 개개인이 가진 장점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다.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사회는 불안정해진다.
부유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리겠지만 사회가 불안해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가 동일한 삶을 살 수는 없지만 격차를 해소하는 노력에는 동참이 필요하다.
이하 책의 내용 중에서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을 인용한다.
노동윤리가 당시 공개적인 논의 속에서 타파하고 근절하고자 했던 병적이고 위험한 습관은 예로부터 형성된 사람들의 성향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그것은 주어진 대로 만족하고, 만족한 데서 더 바라지 않는 성향이었다. 습관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인습에 젖은' 노동자들은 일을 계속해야 할, 또는 돈을 더 벌어야 할 이유를 찾지 않았다. (15페이지)
근대화의 개척자들이 맞닥뜨렸던 진정한 문제는, 노동의 목표를 정하고 그 과정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자신들이 하는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제 타인이 정하고 감독하는, 따라서 그 일을 하는 자신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작업에 자신들의 기술과 노동 능력을 사용하도록 바뀌어야 했다. (17)
천천히 사라진 가치 기준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동정과 공감, 그리고 관심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중략) 진보를 가로막거나 지체시키는 것은 도덕적일 수가 없었다.(21)
빈곤층과 '자발적으로 게으른' 이들을 일하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과제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과제였다. (22)
노동윤리가 산업사회 이전의 '인습'을 상대로 선포한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지명된 적들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적 욕구의 소박함과 인간적 갈망의 평범함이었다. (24)
'열등처우'란 임금이 아니라 원조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생활 조건이, 고용 노동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열악한 상태의 이들보다 나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27)
그는 파놉티콘(panopticon, 벤담이 설계한 감옥의 형태) 같은 시설의 입소자들이 노동을 사랑하리라 기대하지 않았고(그는 노동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을 사실 당연하게 생각했다), 노동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이라고 굳이 칭송하지도 않았다.(31~32)
성실한 노동은 도덕을 고양시키는 경험, 다시 말해 보편적 선의 제약 없는 실현으로만 달성될 수 있는 정신적 고양이라고 칭송받았다.(33~34)
미래 무계급 사회의 모습은 모든 면에서 공장과 비슷하게 건설되는 사회였다. 근대 산업사회의 그 유서 깊은 시대에, 노동은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 그리고 사회의 생존 능력의 축이었다.(35)
노동의 유형은 삶 전체를 물들였다. 그것은 작업 공정과 직접 관련이 있는 권리와 의무뿐만 아니라 기대되는 생활수준, 가족의 유형, 사회생활과 여가, 예의 규범과 일상적 일과까지 결정했다.(36)
대규모로 징집되는 군대는 위대한 근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였고, 이와 함께 공장은 근대 사회의 주요 '파놉티콘 시설'이었다.(37)
노동윤리의 설교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족의 미덕과, 가부장의 막강한 권리와 의무를 옹호한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남편이자 아버지들은, 공장 감독들과 군대 하사관들이 공장이나 연병장에서 자신들에게 하는, 감독하고 훈련시키는 바로 그 역할을 가족 안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했다.(38)
따라서 그 재가공의 연속성이 보장되려면 자본의 소유주는 고용되지 않은 이들을 생산자의 역할에 성공적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39)
노동윤리는 노동에 바치는 삶을 선택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노동에 바치는 삶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뜻했다. 선택이 허락되지 않고 선택이 금지되어 있다는 걸.(중략) 잠재적 노동자들이 자유의 상실에 저항함에 따라 노동윤리의 가르침이 더욱 뜨겁게 설파되었다.(40)
그것은 또한 자유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되돌릴 수 없이 분명하게 소비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이런 결과들이 이후의 근대 사회 역사를 상당 부분 결정하게 되었고, 근대 사회는 생산자의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 이행해 갔다. (45)
리카르도 페트렐라가 썼듯이, 현재 세계의 추세는 '덧없고 일시적인-생산품과 서비스 수명의 상당한 감소를 통해-것, 그리고 불안정한 것의 생산 쪽으로 경제의 방향'을 돌리고 있다. (55)
저축의 증가와 신용구매의 감소는 나쁜 소식이다. 소비자 신용구매의 팽창은 '상황이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로서 반갑게 받아들여진다. (61)
선택과 이동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노동의 미적 가치는 소비자 사회에서 계층을 나누는 강력한 요소로 변화했다. (67)
가난이라는 불행의 책임을 가난한 이들이 일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돌리고,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도덕적 타락을 비난하며 가난을 그 죄에 대한 벌로 뒤집어씌우는 건 노동윤리가 새로운 소비자 사회에서 한 마지막 봉사였다. (72)
제러미 시브룩이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듯이 오늘날 사회의 비밀은 '인위적으로 만드어지고 주관적인 결핍감의 개발'에 있다. (78)
그들의 빈곤은 경기침체와 비성장 탓에 심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 탓에 악화된다는 의미는 덧붙여 말하자면 이중의 의미로 그러하다.(79)
많은 이들이 소수 열등한 계층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정도로 복지국가를 생각할 때, 이것이 장기적으로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정치의 빈곤화와 시민 일반의 정치적 관심의 소멸이다. (93)
그러나 오늘날 국가 관리 아래에서 고용주들이 산업 예비군의 현역 복무를 다시 필요로 할 것이라는 전망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96)
세금과 관련하여 성가시기는 해도, 국가가 관리하는 복지 서비스는 기업의 관점에서는 좋은 투자였다.(98)
상품 판매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선택의 차별성을 떠받들어야 한다면, 복지국가 개념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인간의 조건, 인간의 욕구와 인간의 권리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호소해야 한다.(109)
자크 아탈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은 공장,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경영의 지위를 차지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부는 유동자산과 미궁 같은 법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된다.'(123)
* 그들=권력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자들
따라서 '빈곤은 개인의 결함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불행으로 받아들여지고, 사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무관심해진다'.(130)
그것은 사회에 그들이 실재한다고 해서 최하층 계급의 실체가 입증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134)
로렌스 미드는 풍요 속의 빈곤이 지속되는 첫 번째 원인으로서, 그리고 빈곤을 종식시키려는 국가 정책들이 잇달아 실패하는 첫 번째 원인으로서 그 무능력을 꼽았다. (141)
그들은 사치스런 소비가 성공의 상징이고, 대중적 존경과 명성으로 직행하는 고속도로라고 배운다. 그리고 특정 물건을 소유하고 소비하며 특정한 삶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행복의 필요조건,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 필요조건이라고 배운다.(146)
라인버가 말하듯이, 전기 처형 광경은 '증가하는 최하층 계급을 탄압하려는 정치인들에게 냉소적으로 이용'된다. 최하층 계급에 대한 탄압을 요구하면서, 침묵하는 미국인 대다수는 그 자신의 내면의 공포를 억누르며 하는 것이다.(151)
가난과 범죄행위를 연관시키는 것은 또 다른 효과가 있다. 그것은 빈곤층과 도덕적 책임감을 분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152)
리자르드 카푸친스키는 동시대 삶의 가장 뛰어난 기록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들 '자선 박람회'를 이끌어가는 미디어가 일관되게 작용하는 세 가지 상호 연관된 효과를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155)
'인원감축'의 인간적인 면은 그저 더 많은 정리해고이다. 인적 측면에서 보자면, 정리해고된 이들은 '구조조정'의 주요 '쓰레기'를 이룬다. (163)
근대화의 성공적인 진보가 지구의 가장 먼 곳까지 이르고, 인간의 생산과 소비의 모든 것이 사실상 돈과 시장을 매개로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생계의 상품화, 상업화, 화폐화 과정이 지구 구석구석까지 침투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생산된 문제의 지구적 해결책, 또는 지역적 잉여의 지구적 배출은 더 이상 효과가 없다.(169~170)
우리는,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우리가 우리 화장실을 청소하느라 손을 더럽히는 이들이 받는 돈의 열 배를 받고, 제3 세계에서 우리 키보드를 만드는 이들이 받는 돈의 100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 아이들이 내버려두지 않도록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173)
감독은 다른 많은 사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재활용 과업에서 쓰레기 폐기의 과업으로 옮겨 갔다. 근대가 지구적으로 승리하고 지구가 만원이 된 결과 쓰레기 폐기 산업이 붕괴했고,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치러지는 전투의 전선에 감옥이 재배치되었다. (180)
사회 국가는 시민들을 보호하고, 잉여, 배제, 폐기에 대비해 시민들을 보호한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사회 국가는 그 전망을 바탕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에 대한 시민들의 충성과 복종을 요구할 수 있었다.(182)
사람들은 정리해고, 폐기처분, 쓰레기로 분류되는 것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라져가는 희망을 되살려 줄 강력한 국가권력을 새로이 요구한다. 그 요구는 사회적 불확실성과 사회적 보호가 아니라 개인의 취약성과 개인의 안전이라는 기초에 근거하고 있다.(184)
산업 시대의 빈곤층은 산업노동력으로 재정의되었다. 고용, 안정적인 고용, 불행의 여지가 없는 고용은 규범이 되었다. 가난은 실업과 동일시되고, 규범의 위반, 비정상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의 치료와, 부에 대한 이중의 위협의 싹을 잘라 버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공장 노동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가난한 이들을 설득하고 필요하다면 강요하는 것이었다.(198)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로서 노동이라는 개념은 가난한 이들을 가난의 상태로 두는 것을 윤리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199)
제러미 벤담은 당대 어떤 사상가보다도 더 나은 근대적 시각을 가졌던 위대한 개혁가였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서 모든 형태의 경제적 유인책이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믿을 만한 수단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200)
미국은 이 탈복지 세계에서 앞장을 선 나라이다. 최근 20년 동안, 미국 하위 20퍼센트 가정의 총소득은 21퍼센트가 감소했고, 상위 20퍼센트의 총소득은 22퍼센트 증가했다. 최하층에서 최상층으로의 소득의 재분배는 끊임없이 가속이 붙고 있다. (206)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가 최근에 지적했듯이, 서구 세계의 위기는 '정확하게는 스스로에게 문제 제기를 멈추었다는 사실에 있다.'(212)
그들은 전후의 사회적 윤리적 합의가 깨지기를 바라거나, 그들의 요구가 장기적으로 기본 소득이라는, 매우 의심스러워 보이는 수단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214)
적어도 인류가 똑같은 위업을 한 번 더 달성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있다. 결국(중략) '집단적인 자발적 소박함이 궁핍화에 대한 유일한 긍정적 대안이 되고 있다.(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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