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에 실린 그림은 지진 직후 소학교 4학년이 그린 것으로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현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대다수가 일본어를 잘 못하는 무고한 조선인 노동자였다. 평범한 일본인들이 참여했다. 군인도 참여했고 경찰도 참여했다. 일본도로 베고, 도비구치로 내리쳤다.
주말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일요일 늦은 오후 포항을 오는 지하철과 버스에서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를 읽었다. 1923년 9월 1일 정오 직전에 발생한 간토대지진 직후 유언비어가 퍼졌다. '조선인이 습격한다'거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 등의 근거 없는 말들이 지진으로 정신없는 일본인들 사이에 퍼졌고 한 곳에서 시작된 조선인에 대한 습격과 살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지금까지 나의 관심 밖에 있던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저자 가토 나오키가 90년 전에 일어났던 간토대지진의 참혹한 과거를 자료과 증언을 토대로 정리한 책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간 일본에서 몇 달 만에 주검이 될 수 밖에 없던 조선인들!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그의 가족의 심정을 공감하다 보니 책을 끝까지 놓을 수가 없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간토대지진이 일어나기 13년 전인 1910년의 일이다.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많은 영세농민이 경작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호경기로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많은 조선인이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와서 여공이나 건설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39페이지
자경단이 통행인을 붙잡고 " '바 비 부 베 보'라고 말해 봐"라거나 "15엔 50센이라고 말해 봐"라며 조선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말을 시키고 힐문하는 광경이 각지에서 벌어졌다.-40페이지
1910년에 일본의 지배에 들어가고 1919년 삼일운동으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저항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1923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생존이 위협받고 어수선한 가운데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는 부러지기 쉬운 일본인들의 마음을 동조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일본어 발음을 못한다는 것이 죽어야 하는 이유라니 인간의 가치가 무한인 듯하면서도 너무나 가볍다.
유언비어가 퍼져 나가는 데에는 이 유언비어들을 기정사실화하고 동분서주한 각지 경찰의 역할이 컸다. 메가폰을 손에 든 경관들이 "조선인이 습격해 온다"고 알리는 광경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엄령에 의해 출동한 군대는 그야말로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확인해 준 셈이었다.-48페이지
"무방비의 소수자를 득의양양하게 학살하는 다수의 무기와 힘. 그 충실하게 용감무쌍한 '대일본의 혼' 앞에서 진심으로 모멸과 증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 우매함과 비열함, 무절제에 대해서"라는 구절로 이 글은 끝을 맺는다. -106페이지
책을 읽으며 왜 당시에 군과 경찰은 학살을 조기에 종결짓기 위해 유언비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방조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들도 소수의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에 동조한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한반도에서나 일본에서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현재로 돌아와 우리도 동남아 노동자들에 대해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이야 다문화가족을 통해서 같은 국민이고, 인종에 따라 국가의 경제력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평등하게 대우하고 있다.
이때 한 여성이 조선인에게 폭행을 가하려는 군중 앞에 양팔을 벌려 가로막고 선 채 "이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당신들, 우물에 독 타는 걸 보았던가요?"라고 호소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1996년,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의 조사는 이 여성이 1974년에 92세로 작고한 오시마 사다코였다고 밝히고 있다. -107페이지
많은 증언자들이 공통적으로 "노동자들이 살해되었다. 우리는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체계적으로 일본어를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의 경우 "검문을 당했을 때 그 자리를 모면하기가 더욱 어려웠다"는 이유도 있다. -131페이지
책에는 일본인들이 값싼 노동력이 공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살륙의 분위기를 방조했다는 것도 보인다. 자국에서 돈 있고 권력이 있는 자제들에 대해서는 일본 군인이나 경찰도 건드리기를 주저했다. 중국인 왕희천은 군과 경찰, 노동브로커의 이해관계가 죽이는 것으로 합의되어 유명한 인사였음에도 살해됐다.
많은 일본인들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경단을 조직하고 조직적으로 조선인을 색출해서 학살하는데 동참했지만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는 소수의 일본인들은 온몸으로 생각없이 동참하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옳지 않기에 죽음을 불사하고 정의를 향해 뛰어드는 것이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의인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여단에는 '왕희천을 얼른 죽이는 편이 낫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배경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9월 3일 일어난 중국인 학살을 은폐하려 했던 군과 중국인 지도자를 없애 버리고 싶은 노동브로커, 그리고 가메이도 경찰서, 이 삼자의 이해가 왕희천의 살해라는 결론으로 일치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왕희천을 풀어 주면, 또다시 오지마에서 쓸데없이 이것저것 뒤지고 다닐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148페이지
이성을 잃고 흥분한 '일본' 군중이 '조선인'을 죽이라고 외칠 때, 그 앞에서 혼자 막아서는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일본인의 자존심'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긍지'가 아닐까? 나는 조선인을 숨겨 주었다는 기록을 마주칠 때마다 그 9월의 일본인 중에도 '인간'이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음을 느낀다.-186페이지
간토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뿌리 내리고 있던 차별 의식에서 시작했다. 피난민이 줄줄이 발생한 위기 상황에서 폭동의 가능성을 우선 걱정하는 행정의 치안 우선 사상이 이를 확대시켰고, 거기에 조선이나 시베리아에서 민중 탄압을 위한 게릴라전을 수행해 온 군의 '군사 논리'가 더해져 더욱 심각해졌다. -220페이지
간토대지진 직후에 벌어진 수 천의 조선인 피해자들에 대한 정연규 씨의 추도사는 가슴을 울린다.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고 동포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에 스며든다.
"1923년 10월 28일, 저 정연규, 피눈물로 흐느끼며 비탄에 잠겨, 사납게 타오르는 불꽃을 가슴에 안고, 멀리 고국에서 수천 리 떨어진 이곳, 바람과 물, 땅 모두 낯설고, 마음은 차갑게 식어 편히 눈 감을 수 없는 이향의 하늘 아래 하루 종일 운다. 매일 밤이 새도록 헤매고 울며 떠돌아다닌다. 이유 없이 참살당한 채 호소조차 못 하는 우리 동포. 그렇게 돌아가신 삼천의 영혼을 향해 복부가 찢기는 듯한 마음을 담아 이 추도사를 올리나이다. 아직 살아남아 있는 사람으로서, 오늘날 살아 있는 반도 이천만 동포의 한 사람으로서 삼가 슬픔의 눈물을 삼키며 이 추도사를 바치나이다. 바라건대, 영혼들이여, 더 이상 일하지 않는 그곳에서 편히, 우리의 슬픔을 받아 주소서."-232페이지
언론이 얼마나 공정하고 투명하게 글을 쓰는가가 한 사회의 발전 정도를 보여준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암울하다.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올라오는 제목이나 글을 보면 기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조사하고 분석해서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려는 의도보다는 편향된 의식을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가 더 커 보인다. 20세기 초의 일본 미디어도 당시 일반인들이 품고 있던 두려움을 악용해서 조선인 살해를 조장했다.
조선인이 일본의 지배에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이 품고 있었을 것이다. 미디어는 그러한 분위기에 아첨하며, 증오로 눈이 먼 조선인 폭도가 죄 없는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식의 뒤바뀐 그림을 보여 준 셈이다. -242페이지
이는 일군의 행정 관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치안'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기는커녕 소수자나 이민자들의 생명과 건강 따윈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250페이지
우리도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소수자나 이민자들의 권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례가 있었다. 뉴스에 이따금 나오는 경찰의 후진국에서 온 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진압 모습도 한 사례일 수 있다. 반대로 중국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한국인들이 지역을 떠나는 현상도 있다. 서로에 대해 만나서 이해하는 공감의 관계가 단절될 때 생각만으로 들리는 소문만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래서 저자도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맥락에서 인종주의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선동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화약고에서 하는 불장난만큼이나 우리 사회에 위험한 행위임을 인식해야 한다. -259페이지
'비인간'화를 진척시키는 자들은, 사람들이 상대를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때, 상대의 '비인간'화에 기대서만 통용되던 역사관이나 이데올로기, 아집과 자아도취는 붕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공감'이라는 파이프를 막으려고 한다.-263페이지
미야자와 기쿠지로와 구학영 사이에 있었던 것과 같은 작은 공감에 대해서 생각한다. 역사 문제나 외교처럼, 언뜻 신변의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차원에서 '비인간'화는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인간'화가 극심해질 때, 누군가와 누군가가 연결한 그런 공감의 실도 끊어져 버릴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두고 싶다. -264페이지
2023년이면 간토대지진이 일어난지 100년이 된다. 동시에 우리의 선배들이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세월이 100년이 되는 시기다. 바로 2년 뒤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역사적 사실을 알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질까. 나 자신도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98년이 된 시점이다.
잔인한 사실을 담고 있지만 대중이 맹목적으로 행동할 때 어떤 상황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반면교사로 삼아 일상에서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
독서습관362_구월 도쿄의 거리에서_가토 나오키_2015_갈무리(2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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