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붕괴> 3부에는 마야 문명의 붕괴에 대해 정리합니다. 마야 문명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와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 지역에서 약 1,000년 전에 붕괴했습니다. 번영을 누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들을 남겨놓고 사라졌습니다. 역사 속 과거로의 여행은 흥미로우면서도 단절된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현재를 보며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을 생각합니다.
어쨌든 에스파냐인들에게는 거의 두 세기에 걸쳐 마야 사회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1549년부터 1578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유카탄 반도에서 보낸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 주교는 좋은 면에서나 나쁜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문화 파괴자로 그는 '이교도'의 관습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이유로 마야의 모든 문서를 불질렀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문서는 네 권에 불과하다. 한편 그는 마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또한 한 원주민에게 들었다며 기록해둔 마야 문자의 해독법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거의 4세기가 지난 후 해독의 실마리가 되었다. -227페이지
마야 문명은 문자를 가지고 기록으로 남긴 문서가 있었습니다. 디에고 데 란다 주교가 역사적 가치를 종교적 신념보다 앞에 두었다면 그 문서들이 지금까지 남아 마야 문명에 대해 많은 것을 얘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부족을 이루고 공동체로 성장하면서 계급이 생기고 종교가 생겼습니다. 일종의 규칙이 생성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그 공동체에서 함께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종교가 사회를 하나로 통일하는데 역할을 했지만 이분법적으로 이교도의 것은 모두 성스럽지 못한 것이다라고 판단해 파괴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종교를 이용해서 편의를 누리는 사람과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이었죠. 하지만 오늘날에도 일부 종교인들은 마야 문명을 만난 주교처럼 자신이 믿는 종교가 유일하고 자신이 하는 언행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종교나 집단의 얘기에 귀를 막습니다. 성경이나 불경, 코란을 아무리 달달 외우고 있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마야인을 만난 주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야의 농업의 한계가 무엇이었을까? 첫째, 마야의 농업은 단백질을 거의 생산하지 못했다. 마야인의 주식이던 옥수수는 유럽인의 주식이던 밀이나 보리에 비해 단백질 함유량이 적다. (중략) 둘째, 마야의 옥수수 농업은 다른 문명의 농업에 비해 집약적이지 못했고 생산력도 떨어졌다. 마야 지역의 습한 기후도 제약적인 요인이었다. 습한 기후 때문에 옥수수를 1년 이상 저장할 수 없었다. (중략) 끝으로 안데스 사람들에게는 라마가 있었고 유럽인들에게는 말과 황소, 당나귀와 낙타가 있었지만 마야인들에게는 밭을 갈고 짐을 끄는데 이용할 만한 가축이 없었다. 따라서 마야에서 육상 운송은 전적으로 인간이 감당해야 했다.
마야는 농업인구가 70퍼센트 이상이었습니다. 계급화된 사회에서 관리나 군인 등의 비농업인들을 농부들이 먹여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야인이 살던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농업을 하기에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단백질 함량이 적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했다는 점과 이마저도 낮은 생산량과 기후적으로 오래 보관할 수 없었던 점은 큰 단점이었습니다. 요즘은 멕시코하면 옥수수로 만든 토르티야가 떠오르고 별미로 먹는 것이지만 마야 문명 시대에 옥수수는 소중한 식량자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물건을 직접 운송했다는 부분은 큰 건물과 문자를 자랑하는 문명에게 예상하기 힘든 점이었습니다. 문자까지 발명한 사람들이 왜 다른 지역에서 사용하는 동물을 통한 운송을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이로 인해 비경제적인 운송수단의 한계로 보급품을 멀리 조달할 수가 없어 군사 원정 거리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다른 경쟁 부족 대비 기동성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들의 생활 반경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야의 붕괴를 요약하면 우선 가용자원을 넘어선 인구 증가이다. 토머스 맬서스가 1798년에 예견했고(중략) 고고학자 데이비드 웹스터의 표현대로 "지나치게 많은 농부가 지나치게 많은 땅에 지나치게 많은 곡물을 재배했다." 이로 인해 삼림 파괴와 산허리의 침식이 있었고, 그로 인해 농지가 더 필요했을 때 사용 가능한 농지가 줄어들었다. 또 인구는 많은데 자원은 부족했기 때문에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적어도 500만의 인구가 콜로라도 주보다 좁은 땅에서 북적거렸다고 생각해보라. 마지막으로 왕과 귀족들이 부를 축적하고 전쟁을 벌이며 경쟁적으로 기념물을 세우고, 이런 행위를 뒷받침할 만한 식량을 농부드에게서 갈취하려는 단기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249~250페이지
마야 문명이 붕괴한 추정 원인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집단의 리더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야 문명의 왕과 귀족들이 전쟁을 자제하고 자신들을 먹여살리는 농부들의 관점에서 고민을 했다면 인구가 증가하는 부분과 삼림이 파괴되며 농지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 해결할 방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유사한 환경이지만 사회의 여건이 다르다보니 삶의 질이 다릅니다. 어느 사회건 인구가 늘더라도 그에 맞는 시스템을 갖춘다면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살고 있습니다. 리더층이 사리사욕을 우선한 어두운 역사도 있었지만 현재의 경제강국 대한민국은 큰 방향을 제시한 리더와 이에 맞춰 희생을 감내하며 살아온 민초들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이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된 환경속에서 또다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리더층의 결단이 중요합니다. 인구 감소에 대한 해법과 자본주의의 폐단인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근시안적 정책보다는 중장기 국가의 미래를 보고 사회갈등을 줄이고 공동 발전 방향으로 나가야겠습니다.
독서습관328_문명의 붕괴_재레드 다이아몬드_2016_김영사(210120)
https://bandiburi-life.tistory.com/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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