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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234]달러이야기_유대인 이야기 속편이자 미국 부의 역사책

by bandiburi 2020. 6. 14.

홍익희 교수의 책 <유대인 이야기>를 읽고 학계도 아니고 KOTRA에 계셨던 분이 어떻게 이렇게 잘 정리해서 책으로 내셨을까 놀랐습니다. 마침 동 저자의 <달러 이야기>가 회사 책장에 있어 코로나 사태로 경제적인 타격이 심한 근래의 상황에서 달러 환율의 변동성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과감하게 집어 들었습니다. 책이 비록 두껍기는 하지만 줄 간격이 넓고 글씨도 여유 있게 배치되어 있어 술술 읽히는 책입니다. 

다 읽고나니 이 책의 제목은 <달러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적합하겠습니다. 시작은 화폐의 기원으로 시작했지만 내용이 진전될수록 '유대인'이 미국에서 경제를 어떻게 현재와 같이 금융강국으로 만들어갔는지를 설명합니다. 신변잡기식으로 화폐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미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발명품이나 기업가들도 여러 명 소개하고 있습니다. 독자로서 아쉬운 부분은 저자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 '유대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 이야기>의 속편을 읽고 있는 듯합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기술을 어떻게 얻어서 미국의 산업혁명이 진전되었는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은 재미있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에 미국은 이렇게 기술을 모방하고, 발명하며 보호무역주의로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은 패권국가이지만 개발도상국의 어려움보다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며 국가들 간의 조화보다는 울타리를 치고 나만 잘살면 된다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달러가 어떻게 현재의 기축통화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세기를 넘어오면서 모건과 록펠러, 카네기 등의 금융 및 기업가들이 독점적인 위치를 이용해 성장한 부분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카네기는 스스로 돈이라는 것이 위험성을 알고 내려놓을 줄 알았다는 점에서 멋진 삶을 살다 간 분이다라는 존경심이 솟아났습니다.

책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책입니다. 2번 이상 읽어본다면 많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90페이지) 미국에 흑인이 처음 들어온 것은 1619년 네덜란드 국적 선박이 버지니아 식민지에 20여 명의 흑인을 내려놓으면서부터다. 미국에 흑인들이 청교도들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노예는 아니었다. 그들은 계약노동자였다. 그때에는 비슷한 처지의 백인 계약 노동자들이 대부분 가난 때문에 계약을 맺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97) 독일의 국민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1902년 <근대 자본주의>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활동의 특징이 영리주의와 합리주의라고 보았다. 특히 영리주의면을 강조한 좀바르트는 경제에서 무한 추구 정신은 무한 화폐 추구라고 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는 청교도로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건전한 직업정신'과 '정당한 이윤추구'라는 '윤리적 자본주의 정신'이다.

102) 이때 총독은 놀라운 생각을 해냈다. 그는 프랑스 군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놀이용 카드를 징발했다. 상당한 양이었다. 그는 카드를 4등 분해 각 조각마다 서명을 하고 이를 법정화폐로 선언했다. 그는 그것을 경화로 상환하겠다고 약속했다. 

104) 스웨덴이 1661년 구리와 은을 준비금으로 삼아 지폐를 발행한 적이 있지만 정부의 신용만으로 발행된 7천 파운드어치의 이 증서가 서구 최초의 불환지폐에 해당된다. (중략)

세계 최초의 지폐는 10세기말 남송에서 상인들 간에 사용된 예탁증서인 교자였다. 당시는 철전을 사용했는데 비단 한필 사는 데 130근을 지불해야 할 정도로 가격이 너무 낮아 불편했다. 

105) 초기 지폐는 금이나 은으로 바꿀 수 있는 태환화폐였다. (중략) 그 무렵 영국에서 금장이 발행한 예치증서(Goldsmith Note)가 지폐 구실을 하며 오늘날 은행권의 모체가 되었다. 

108) 1763년 2월 '7년 전쟁'의 결과로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간에 파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대한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으며,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에 대한 독점적 우위권을 확보했다. 

109) 그런데 영국이 7년 전쟁으로 인해 많은 빚을 지게 되자, 영국은 재정 악화와 식민지 통치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종전의 방임 정책을 포기하고 과세와 중상주의적 통제를 강력하게 실시했다. 이로 인해 영국과 식민지 간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진다. 

112) 차는 보통 홍차, 우롱차, 녹차 세 종류가 있다. 차 잎을 따 온도, 습도, 시간을 잘 맞추면 잎의 효소가 산화작용으로 발효되어 잎이 검게 변한다. 이를 홍차라 한다. 반쯤 발효시킨 게 우롱차다. 따자마자 햇볕에 말려 효소를 없애면 장기간 녹색을 유지하는데 이것이 녹차다. 원래 수출은 녹차 위주였다. 그런데 17세기에 차를 선박으로 수입할 때 적도의 뜨거운 태양열을 받아 녹차 잎이 자연적으로 발효해 홍차가 되었다 한다.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인들은 홍차를 즐겨 마셨다. 

113) 이는 1696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이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처음으로 커피나무를 대량 재배하는 데 성공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 무렵 아랍은 커피나무의 유출을 엄격히 막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아랍에서 몰래 커피 묘목을 빼내 와 이를 실론과 자바 섬에 이식했는데 자바에서 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118) 초인플레이션은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현금을 정부가 세금으로 강탈해 가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이를 '인플레이션 세금'이라 부른다. 현금을 믿고 저축했던 서민들은 정부에 의해 촉발된 초인플레이션으로 순식간에 거지가 되었다.

122) 미국 달러를 슬랭으로 벅(buck)이라 부른다. 미국인들이 애용하는 단어다. '벅'은 본래 수사슴을 뜻한다. 액수가 적을 경우 미국인들은 요즘도 '달러'보다는 오히려 '벅'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것이 달러화의 속어로 쓰이게 된 이유가 있다. 1775년 발행된 대륙지폐는 6년이 지난 1781년에 그 가치가 떨어져 1백 달러에 해당하던 것이 1달러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아무리 전쟁통이라지만 국민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현금 자산의 가치가 대부분 증발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현금거래 대신 차라리 물물교환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당시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 수사슴, 즉 '벅'의 가죽이었다. 그래서 수사슴 가죽은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돈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그 무렵 남자들은 사슴이나 양가죽으로 만든, '녹비'라는 이름의 가죽옷을 입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벅'은 달러보다 더 귀염 받는 돈의 별명이 되었다. 

133)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하기에 벤저민 프랭클린은 너무나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은 바로 독서에 있었다. 

144) 이때 유대인들은 또 한 번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된다. 유대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주축이 된 금융가들은 왕에게 큰 딜을 제안한다. 돈을 모아 빌려주는 대가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는 민간은행 설립허가를 요구한 것이다. 그들의 제안은 상인들이 120만 파운드의 자본금을 모아 주식회사 은행을 세우고 이때 모은 자본금을 무도 국왕에게 대부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상인들은 출자액만큼을 은행권으로 교부받아 지불수단으로 통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금괴를 맡기고 그만큼의 은행권을 받는 것이어서 밑질 게 없는 장사였다. 

147) 결국 1844년 의회가 '은행허가법(Bank Charter Act)'을 통과시켜 영란은행을 제외한 여타 은행의 화폐 발행을 금지시키고 영란은행의 은행권만 법화의 지위를 부여했다. 세계 최초의 '민간 소유' 중앙은행이 탄생한 것이다. 

153) 그러나 해밀턴은 "사람들은 내가 가진 약간의 천재성에 대해 칭찬한다. 내 모든 천재성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깊이 공부하며 낮밤 가릴것 없이 그것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마침내 통달한다. 그렇게 이룬 성과에 대해 사람들은 천재성의 과실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노력과 통찰의 결실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155) 드디어 찬반 양진영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미합중국 헌법이 탄생했다. 이 헌법 논쟁에서 강력한 연방을 주장한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파는 공화당의 정신적 시조가 되고, 제퍼슨이 이끄는 반연방파는 민주당의 시조가 되었다

175) 미국은 192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호무역국가였다. 이러한 보호주의 울타리 안에서 미국의 제조업은 성장할 수 있었다. 

199) 이때부터 청바지는 옷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상이요 주의를 대표하게 되었다. 청바지는 다섯 개의 없음(No)을 표현한다. 곧, 노 클래서(계급 초월), 노 에이지(연령 초월), 노 시즌(계절 초월), 노 섹스(성별 초월), 그리고 노 보더(국경 초월)가 그것이다. 

238) 남북전쟁 기간 중인 1862년에는 홈스테드법, 곧 자영농지법이 서부에 도입되어 5년간 서부 개척에 종사했던 사람에게 약 160 에이커의 토지를 무상으로 주기로 함으로써 서부개척을 촉진시켰다. 

252) 오늘날의 뉴욕을 만든 힘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리운하이며 또 하나는 유대인이다. 뉴욕상공회의소를 주도하던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제안한 것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리운하였다. 이리운하(Erie Canal)는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이리호에서 뉴욕 항구를 연결하는 운하로, 1817년에 착공되어 1825년에 완공되었다. 

259) <부의 역사>, 권홍우, 인물과사상사, 2008년 6월

266) 유대인들의 성공비결은 유대인 특유의 고유 정신과 '남과 다름'을 추구하는 역발상이었다. 

269) 1886년 10월 28일, 1년 동안의 조립 끝에 높이 46미터의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 항 초입 리버티 섬에서 제막되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 편에 서서 전쟁을 치렀다. 프랑스의 도움을 얻은 미국은 영국과의 힘겨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이 독립선언 1백 주년을 맞자 프랑스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민간 차원에서 선물을 준비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다. 유럽 대륙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는 유대인에게 뉴욕은 자유의 여신이 반겨주는 말 그대로 자유의 땅이었다. 

282) 당시 세계의 금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손아귀에 있었다. 영국의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세계의 금 시세를 정했다. 이를 이용해 로스차일드는 금광개발에 열을 올리며 세계의 금을 독점적으로 공급하여 큰돈을 벌고 있었다. 그로서는 금본위제를 쓰는 나라가 많아져야 금의 수요가 늘어 금값을 더 받을 수 있었다. 로스차일드는 미국 내 대리인 벨몬트와 셀리그먼을 시켜 미국이 금본위제로 회귀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288) 미국은 재벌들에 의한 산업집중, 이른바 '도금시대(The Gilded Age)'가 시작되었다. 도금시대란 소설가이자 유머 작가인 마크 트웨인이 그의 작품명으로 처음 쓴 말로, 도금처럼 겉과 속이 다르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그는 <도금시대>에서 워싱턴 DC와 당대의 지도적 인물 여럿을 조롱했다. 특히 그는 유대인을 강하게 비판했다. 

300) 먼로주의란 1823년 미국의 제5대 대통령 J. 먼로가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외교방침으로, 한마디로 미국도 유럽 일에 간섭을 안 할 테니 유럽도 미국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일종의 불가침 조약 같은 것이었다. 미국은 1867년에 멕시코에 침투한 프랑스 세력을 먼로주의의 명분하에 물리친 바 있다. 그것은 먼로 독트린 선언 이후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 특수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16) 193년 러시아 키시네프에서 유대인들이 현지인들에게 학살과 테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제이콥 시프가 높은 리스크를 안고 국제 금융시장에서 일본에 대한 자금 조달을 주선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의 인종차별 사태가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우리 민족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친 큰 사건이었다. 제이콥 시프의 사례를 통해 일본인들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유대인들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세계 금융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319) 1904년 7월 29일 카츠라는 태프트를 만나 양국 간의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와 필리핀 지배를,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한다는 내용의 비밀각서에 합의한다. 

350) 모건은 1870년대 기업 이사회에 참여하여 자신이 단순히 자금을 지원하는 은행가 이상의 존재임을 세상에 알렸는데, 이는 미국 은행가들이 기업의 이사회에 진입하는 효시가 된다. 또한 모건의 이사회 참여는 특정 기업에 대한 영향력 증대와 타 은행들의 개입을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를 '관계금융(Relationship Banking)'이라 불렀다. 이 관계금융은 20세기에 일반적인 관행으로 자리잡게 된다. 

356) 코카콜라는 1886년 애틀랜타의 약제사 존 펨버턴이 발명했다. 그는 코카나무 잎에서 추출한 코카인과 콜라나무 열매에서 추출한 카페인을 섞어 새로운 음료를 만들었는데, 원료가 코카와 콜라였기에 '코카콜라'라고 이름 붙였다. 카페인에 기초한 이음료는 자양강장제로 홍보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중략) 그 뒤 코카나무 잎이 마약으로 분류되면서 1905년부터 코카인은 넣지 않았다. 

368) 카네기는 이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33세이던 추운 겨울 어느 날 스스로에게 각서를 썼다. 그가 썼던 각서의 일부분을 소개하면 이렇다. 

 "인간은 우상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부의 축적은 가장 나쁜 종류의 우상숭배 가운데 하나다. 그 어떤 우상도 돈에 대한 숭배만큼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은 없다. 나는 내가 관계하고 있는 일이면 그 무엇이든 전력투구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특히 나의 정신적 삶을 고양시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업에 대한 생각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 이는 영원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나 스스로를 타락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370) 그에 루스벨트는 이 문제를 모건과 논의해보려고 그를 백악관으로 불렀다. 그러나 모건은 대통령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화가 난 루스벨트는 법무장관을 시켜 10여 년 전에 제정되었지만 유명무실하게 된 셔먼독점금지법에 의해 모건을 기소했다. 1902년 2월 모건의 노던증권은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제소되었다. 

378) <J.P 모건의 1백 64년사>, 박태견 기자, 프레시안, 2002년 7월 25일

382) 월가 변호사인 조지 비셀은 휴가 차 내려온 고향에서 석유 샘플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연료로서의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에게 '약국에서 의약품으로 팔리는 석유를 파내 조명용으로 쓰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예일대학교 벤저민 실리먼 교수에게 석유 성분 분석 및 용도 조사를 의뢰했다. 그는 지하의 소금 광맥을 찾아내 뽑아 올리는 중국의 염정 굴착 기술을 동원하면 석유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401) 이 조개 마크를 부친 석유회사가 바로 셀(Shell) 석유회사다. 지금도 일본과 서구에는 많은 셀 석유회사가 있다. 마커스 사무엘은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항상 조개를 주워 상품으로 만들어 팔았던 그 시절을 삶의 거울로 삼으며 살았다. 그는 '나는 가난한 유대인 소년으로서 일본의 해안에서 혼자 조개를 줍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406) 자국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는 것은 적국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1차 세계대전 중 중동을 둘러싼 한 판 전쟁이 불가피했다. 중동은 1914년 1차 세계대전부터 열강의 격전장이 된다. 신이 내린 축복이 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중동은 당시 석유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채굴 초기부터 석유자원은 미국과 유럽 석유메이저들의 소유가 되고 만다. 

413) 록펠러는 57세에 일선에서 은퇴해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그가 자선 사업을 결심하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55세 때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검진을 받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419) 셔먼독점금지법은 뉴욕을 중심으로 전 미국에서 경제독점 네트워크를 형성하던 제이피모건을 견제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법은 미국 최초의 독점금지법이다. 금융과 상업 독점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432) 정부와 의회는 먼저 1933년에 글래스와 스티걸 의원이 공동 발의한 금융독점방지법인 '글래서-스티걸법'이라는 칸막이법을 제정해, 은행과 증권업이 서로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겸업을 금지시켰다. 동시에 이미 겸업을 하고 있던 기존의 기관들을 강제 분리시켰다. 

437) 지금도 8월과 10월을 제외하고 1년에 10회, 매달 첫째 주 일요일 저녁에 미국과 영국,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6개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바젤에 모여 비밀회합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필요할 경우 다른 나라 중앙은행 총재나 막후 실력자들도 불러들여 회합을 열고 있다. 바젤이 이처럼 지금까지 계속 국제금융계의 크렘린으로 군림하는 이유는 국제결제은행 막후에 모건 가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503)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세운 선조들이 정치적 힘의 세습을 거부했듯이 오늘 우리는 경제적 힘의 세습을 거부한다.'며 상속세를 올렸다. 

512)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기준이다.'라고 말하며 부자들의 소득을 상당 부분 세금으로 거두어 갔다. 증세정책으로 부자와 노동자 계급의 임금격차를 축소시켜 중심사회가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번영을 이룩했다. 

524) 대표적인 유대 지식인인 앨빈 토플러는 "권력의 중심이 힘(폭력)에서 부로 그리고 지금은 정보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한다.

544) 이들은 3월 4~7일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 '미국 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연례총회에 참석키 위해 모인 유대인들이었다. 애이팩은 미국을 움직이는 강력한 유대계 시민운동조직의 하나다. 


독서습관234_달러이야기_홍익희_한스미디어(200613)


■ 저자 : 홍익희

서울고와 외대 스페인어과를 나와 1978년 KOTRA에 입사했다. 이후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무역관 근무를 거쳐 경남무역관장, 뉴욕무역관장(중략)을 역임하고 2010년 정년퇴직했다. 현재는 배제대학 교수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32년간 수출전선 곳곳에서 유대인들과 부딪치며 그들의 장단점을 눈여겨보았다. 우리 민족의 앞날도 제조업보다는 그들이 주도하는 서비스산업에 있다고 보고 유대인 경제사에 천착해 아브라함에서부터 현대의 월스트리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궤적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경제사> 시리즈 10권을 섰다. 그 축약본 <유대인 이야기>가 2013년 초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인터넷 서점 예스24 연말 네티즌 투표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와 금융 등 각종 서비스산업에 대한 이야기와 <한민족 경제사> 등 65권을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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