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해설가 김찬용의 이 책은 인상파부터 팝아트까지의 미술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전에도 미술작품에 대한 안목을 갖고자 관련된 도서를 몇 권을 읽었다.
조금씩 눈에 익은 작품이 늘어난다.
작품별로 어떤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독서의 즐거움이다.
김찬용은 도슨트, 즉 전시해설가로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쉽게 작품을 설명한다.
하나의 작품에 대해 화가, 작품의 배경, 메시지 등에 대해 해설할 수 있다면 전문가가 아닐까.
책을 읽고 인상파부터 팝아트에 대한 작품 전시관을 직접 들려본다면 더욱 유익하겠다.
최근에는 뱅크시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이 많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예술가다.
인간에 대한 가치가 어디에 태어났는지에 따라 평가절하되는 시대,
전 인류적 공동체 관념보다 국가적으로 배타적인 성향이 높아지는 시대,
뱅크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들과 짧은 소감을 포스팅했다.
뱅크시는 할아버지 배우 한 명을 고용해 대형 미술관이 즐비한 뉴욕 센트럴 파크에 노점을 벌이고 하루 동안 자신의 작품을 60달러에 판매하며, <안보다 바깥이 더 낫다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경매에서 수십억을 호가하는 그의 작품을 단돈 몇만 원에 살 수 있었는데도 노점에서 판매되던 작품은 사람들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뱅크시는 이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미술 작품이 가치를 평가받고 대중이 작품에 감동하는 데에는 시스템과 환경의 영향이 크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21)
미술 작품에 대한 금전적 가치 평가의 오류가 드러난다.
뱅크시의 프로젝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의 가치도 외모와 스펙만으로 평가하는 사회니까...
물론 앞으로 미술을 전공할 예정이고, 미술계에서 일할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반드시 독파해야 할 전공서입니다. 방대한 미술사를 최소한의 핵심만으로 잘 요약한 명저임에는 틀림없죠. 하지만 전공자나 미술 관련 직업인이 아닌 가벼운 미술 애호가라면,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벽돌 같은 두께감 때문에 쉽게 손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29)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지 하며 몇 년을 미루고 있다.
전공은 아니지만 미술사 관련 책들의 집대성이라 생각으로 읽어보려 한다.
이전의 그림처럼 종교화나 권력자를 그리는 작품이 아닌, 대자연과 시대의 모습을 빠르고 과감한 붓 터치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 인상파는 고전미술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술사학자들은 근대 회화의 실질적 시작을 인상파부터라고 논하곤 합니다. (32)
권력자와 종교화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 인상파가 근대 회화의 시작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을 거치며 회화의 세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사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작품이 담은 주제뿐만 아니라 기법에서도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당대 살롱전이 선호한 기법은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온 화사하고 아름다운 그러데이션의 색감과 섬세하고 정교한 마무리였습니다. 반면 마네는 중간색을 배제하고 대비를 강조한 색을 선택했고 빠른 붓 터치로 과감한 표현을 시도했죠. 이 또한 심사위원들에게는 꼴 보기 싫은 요소였습니다. 이렇듯 여러모로 미운털이 박힌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당대 최고의 문제작으로 비판받으며 살롱전에서 낙선하게 됩니다. (44)
저는 개인적으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감각적이긴 해도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작품은 1872년 32살의 모네가 그린 초기작으로, 이 시기는 그의 기법이 완숙기에 접어들기 이전이었기에 연구 과정에 속한 작품으로 보는 게 옳겠죠. 그렇다면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모네의 마스터피스가 아닌 <인상, 해돋이>가 왜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힐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상파 화가들Impressionists'을 일컫는 명칭이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 작품명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미술사적으로 상징성이 큰 작품이 되어버린 거죠. (47)
인상파의 유래가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서 시작되었구나.
최소한의 포인트만 짚고 넘어가자면, '화려한 색감과 빠른 붓 터치'를 기억해야 합니다. 다수의 인상파 화가들은 빛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죠. 더불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밑색 없이 빠른 붓 터치를 중심으로 팔레트가 아닌 캔버스에서 직접 색을 섞어가며 표현했죠. (50)
같은 인상파지만 마네는 '시대의 인상' 즉 '변화하는 산업 혁명 시대의 인간과 그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탐구했고, 모네는 '빛의 인상'에 매료되어 '자연의 빛이 계절과 시간의 순간마다 얼마나 세상을 다채롭고 아름답게 만드는가'에 집중했습니다. 기법적으로도 마네는 고전적 구도를 일부 차용하며 무거운 색으로 도발적인 느낌의 작품을 그렸고, 모네는 밝은 색채를 기반으로 다채로운 빛을 표현하기 위한 연작 작업을 해나갔죠. (53)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모네의 <인상, 해돋이>와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비교해보겠습니다. 모네의 작품에서는 수면에 반짝이는 빛을 그려내기 위해 팔레트에서 만든 색을 짧고 간결한 붓터치로 표현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쇠라의 작품 속 수면이나 나뭇잎의 표현 기법은 '터치'가 아닌 '점'으로 이뤄져 있죠. 또 팔레트에서 혼합한 색을 사용하기보다 물감의 원색 그대로 사용했는데요. 원색 점들이 캔버스 위에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9~62)
이러한 고흐의 업적을 사조로 구분할 때는 보통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라고 지칭하게 됩니다. 쇠라가 선보인 새로운(Neo-) 인상파와는 다른, 인상파 이후(Post-)의 인상파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거죠. 이렇게 뛰어난 후배들의 등장은 결국 기존 인상파의 죽음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인상파의 끝을 알리는데 일조한 예술가는 쇠라, 고흐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바로 고흐와 애증이 얽힌 동료, 폴 고갱입니다. (68)
광학적인 접근법으로 섬세한 빛의 표현을 선보인 '집요한 놈' 조르주 쇠라, 주관적인 접근법으로 감정이 느껴지는 과감한 터치를 선보인 '우울한 놈' 빈센트 반 고흐, 개념적인 접근법으로 상징과 은유를 담아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표현한 '나쁜 놈' 폴 고갱. 전문적으로 이들을 구분할 땐, 신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종합주의로 지칭하지만, 애호가인 우리는 이들을 크게 묶어 인상파의 끝을 알리고 20세기 미술의 시작을 선언한 '후기인상파'라고 묶어서 기억해도 좋겠습니다. (75)
인류의 역사를 바꾼 3대 사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 그 시작은 고대부터 중세까지 인류의 중심에 종교가 서 있던 때의 사과인 '아담과 이브의 사과'입니다. (...) 그렇게 종교가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새롭게 인류의 중심에 과학이 서게 되었는데요. 이때 과학계에 등장한 사과를 일컬어 '뉴턴의 사과'라고 합니다. (...) 인류가 과학과는 다른 인간적이고 창의적인 것을 갈구하던 시기, 예술계에 등장한 사과가 있는데요.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폴 세잔Paul Cezanne의 사과입니다. (81)
이러한 그의 연구가 가장 잘 담긴 작품이 바로 <생 빅투아르산 연작>입니다. 눈압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대자연에서 가장 완벽한 구조의 그림을 찾고자 했던 세잔은 쉬지 않고 산을 오르내리며 그림을 그렸고, 결국 1906년 10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야외에서 그림 연구를 하다가 폐렴에 걸려 합병증으로 67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91)
당시 7번 갤러리에는 야수파로 불리게 될 여러 화가의 작품이 걸려 있었지만, 그중 가장 심하게 비평의 도마 위에 올라간 작품이 바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모자를 쓴 여인>이었습니다. 너무 거친 터치로 표현한 모자나 옷도 놀라웠지만, 가장 큰 이슈는 얼굴색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피부에 사용하는 색이 아닌 초록색이나 파란색을 과감하게 채색했기에, 사람들은 '도대체 왜 얼굴에 이런 색을 썼을까? 이 여인의 피부색은 정말 이런 색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죠. (...) 우리 각자의 눈은 의학적으로 같은 구조라도 서로 시력이 다르고 색맹과 색약인 사람도 있는 것처럼 각자가 무언가를 보고 인지하는 경험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결국 하늘은 파란색이고 피부는 살구색이라는 정의는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94~96)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을 보고 마티스는 '작은 입방체로만 이루어진 그림'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입체파라는 그룹명도 탄생하게 되었죠. 이후 피카소와 브라크는 한몸이 된 것처럼 함께 연구하며, 종이를 붙여 작품을 만드는 파피에 콜레(콜라주) 기법을 선보이거나, 종이를 이용해 기타 모양의 조형물을 만드는 등 회화와 조각의 장르적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말 그대로 파격의 미술을 선보입니다. (103)
여러분은 칸딘스키의 <구성 No.7>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드나요? 그림 속에서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이 있나요? 각자의 눈으로 즐기며 '이건 하늘 같은데, 이건 동물 같네, 그리고 이건 집 같아' 하는 식의 개인적 상상을 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모두가 공통되게 지칭하는 정답은 존재하지 않죠. 이처럼 정답 없이 각자 주관적인 감정 안에서 받아들이는 미술을 음악적인 미술, 즉 추상미술이라고 지칭합니다. (115)
(...) 결국 몬드리안이 선보인 추상은 서로 다른 요소가 있음에도 서로 평등하게 조화되며 하나의 훌륭한 결과물로 존재하는 미술이었습니다. (...) 하지만 1912년 처음 파리에 방문했을 때, 피카소의 작업실을 둘러본 이후 새 시대의 예술에 눈을 떠 추상미술의 길을 개척하며 역사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는데요. (...) (118)
두스부르흐는 추상미술의 판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견고히 하기 위해선 역동성을 강화할 대각선을 사용하는 것도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몬드리안은 이미 자신이 표현한 수직 수평의 선에 충분한 역동성과 재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 충돌이 누적되어 1925년 몬드리안이 데 스테일 운동에서 빠지겠다고 선언하며 신조형주의의 연구는 마침표를 찍게 된 것입니다. (120)
두스부르흐와 몬드리안의 갈등은 재미있다.
몬드리안의 작품 자체도 수직과 수평으로 단순한데, 대각선을 넣는 것을 반대했다.
대각선으로 다투다니 예술가의 미학 개념은 이해하기 어렵다.
뒤샹의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라면 자신의 감각을 연마해 미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장인이 되려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선택된 사물에 개념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게 하는 철학자적 면모를 더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감상자인 우리는 예술가가 선정한 그 사물을 마주하며 기존에 알고 있던 의미가 아닌 새로운 개념 아래 고뇌하게 되고 이와 같은 사유의 과정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를 기조로 생각할 때 뒤샹의 변기는 자본주의 시대를 향해가며 천정부지로 가격이 치솟아 거래되는 미술품에 대해, 그리고 온전히 고민 없이 사치품처럼 예술을 소비하는 시대를 향해 던진 풍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0)
2022년에 읽었던 뒤샹에 대한 책 『마르셀 뒤샹』이 떠오른다.
그 책에서 변기를 작품이라고 하는 것에 놀랐던 기억이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630
[637]마르셀 뒤샹_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작품과 예술가의 삶을 간접 체험
이 도록은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이자 가장 불가사의한 예술가 중 한 명인 마르셀 뒤샹(1887~1968)에 대한 쉽고 친절한 소개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창의적인 작
bandiburi-life.tistory.com
이렇게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탄생한 다다이즘은 21세기 현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미술사조로 평가받지만, 막상 당대에는 빠르게 그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난해하긴 해도 분명 강렬한 미술 같은데 왜 빨리 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쟁이 끝나버렸기 때문이죠. 전쟁 시대의 상처와 혼돈을 자양분으로 예술을 선보인 다다이즘.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그에 따른 평화로의 갈망이 오히려 악재가 된 것입니다. (133)
초현실주의가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초현실주의를 '다다이즘의 순한 맛'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전쟁의 시대 속 아름다움이 아닌 파괴된 혼돈과 허무를 표현한 예술이 다다이즘이었다면, 초현실주의는 여기서 힘을 조금 뺀 상태로 파괴된 현실을 부정한 채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의식을 표현한 것이니까요. 그래서인지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은 뭔가 익숙한 듯 생경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미술 방식을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고 부릅니다. 데페이즈망은 사전적으로 '추방, 낯섦'을 의미하는데요. 미술에서 데페이즈망이란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선보임으로써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오묘한 감상과 경험을 제시하는 작품을 의미합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 1953 (138~139)
마그리트의 <겨울비>는 1980년대 명곡 웨더 걸스The Weather Girls의 <잇츠 레이닝 맨It's Raining Man: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에도 영향을 주고, 1999년 SF영화인 <매트릭스The Matrix>의 감독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자매지만 당시에는 형제)에게까지 영감을 주며 영화 주요 장면에 오마주 되기도 했었죠. (141)
하지만 전쟁통에 급하게 미국으로 넘어온 예술가들은 작품은 고사하고 생활할 터전조차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준 인물이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철의 여인으로 평가받는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명소로 익숙하죠? 이미 20세기부터 광산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구겐하임 가문은 광산 왕이라 불렀습니다. 벤자민 구겐하임 역시 그 상속자 중 하나였고, 그 재산을 스물한 살의 페기 구겐하임이 물려받았습니다. (152)
마크 로스코는 폴록과 달리 미국 출신의 예술가는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로스코는 10살 때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화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인 1940년, 마르쿠스 로트코비츠라는 원래의 이름 대신 로스코로 개명하며 미국의 예술가로 자리 잡았죠. (...) 로스코는 명석한 두뇌로 예일대에 인문학 전공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인종 차별을 겪으며 학교를 그만두게 된 후 뒤늦게 화가의 길에 들어선 인물이었습니다. (157)
팝아트Pop Art의 팝Pop이 '인기 있는, 대중적인'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Popular의 줄임말이기에 팝아트는 결국 대중적인 미술 혹은 인기 있는 미술을 표방합니다. 그래서 보통 팝아트적 특성이 있다고 평가 받는 미술들은 대중적으로 익숙하게 소비되는 이미지를 소재로 선택하여 채도 높고 강한 색 대비를 강조하며, 디자인적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20세기 팝아티스트 중 이러한 특성이 가장 복합적으로 잘 드러난 예술가가 앤디 워홀이기에 애호가를 표방하는 우리에게는 '팝아트 = 앤디 워홀'의 공식이 성립됩니다. (170)
1980년 뉴욕에서 열린 '타임스스퀘어 쇼Times Square Show' 전시에 거리에서 낙서하던 흑인 청년의 작품이 걸려 이슈가 되었는데요.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작품을 뿜어내는 이 청년의 이름은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였습니다. (...) 그는 이 전시를 계기로 미술계의 스타로 도약했고, 초고속으로 앤디 워홀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데요. (...) '거리의 아티스트, 바운의 낙서 화가'와 같은 타이틀 때문에 바스키아를 빈민가 출신의 흑인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바스키아는 20세기 중엽 미국 뉴욕의 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73)
1921년 독일 크레펠트에서 태어난 요셉 보이스는 의사가 되길 꿈꾼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19살 나이에 나치 공군 부조종사로 입대하며 인생이 뒤바뀌게 되는데요. 전투를 위해 크리미아 반도를 비행하던 중 소련군의 폭격을 받아 추락하는 사고를 겪게 된 것입니다. 당시 부서진 비행기 안에서 커다란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매던 보이스를 구해준 건 크리미아 반도의 원주민 타타르인이었습니다. (...) 전쟁 중 만난 낯선 이들 덕분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경험은 보이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주었는데요. 결국 전쟁이 끝나자 보이스는 의사가 되길 포기하고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배우며 예술가의 삶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163~166)
플럭서스는 리투아니아어로 '흐름'을 뜻하는 단어로, 자신들은 고인 물이 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변화되는 시대에 맞춰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겠다는 의지였죠. 이들이 추구했던 것들은 특권층을 위한 예술이나 자본주의에 흡수되는 예술이 아닌 예술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술은 문화, 사회, 정치에 자극을 주며 세상을 변화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시각보다는 철학에 더 집중한, 메시지 중심의 예술이었죠. (...) 예를 들어, 보이스의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행위 예술 작품 <7,000그루의 오크나무>를 볼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나요? (...) 보이스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188)
이는 비단 허스트만의 방식은 아닙니다. 이미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를 통해 해골, 꽃, 유리잔, 모래시계, 나비 등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는 소재들을 이용해 '죽음을 기억하고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미술이 등장했는데요. 허스트는 이를 지극히 현대적인 재료와 현대적인 방식으로 선보인 것입니다. - 데미안 허스트, <살아 있는 누군가의 마음에서 불가능한 물리적인 죽음>, 1991 (216~219)
아프리카의 몇몇 낙후된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전기 에너지가 부족해 밤이 되면 촛불을 켜고 생활하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오랜 시간을 걸어 불빛이 새어나오는 건물 앞에서 책을 보곤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된 엘리아슨은 이 아이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죠. 스튜디오 작가, 디자이너, 기술자 외 많은 이들의 협력과 후원 끝에 뒷면에는 고성능 태양열 전지판이 달려 있고, 앞면에는 조명과 더불어 태양 모양의 아름다운 미감을 지난 태양열 목걸이를 만들어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태양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그는 '우리는 힘이 없는 이들에게 힘을 전한다We bring POWER to people without POWER'는 말을 남겼죠. (229)
독서습관1035_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_2021_arte(250408)
■ 저자: 김찬용
우리나라 1세대 전시해설가이자, 열렬한 미술 애호가.
14년간 80여 개 전시에서 수십만 관람객을 미술의 길로 안내하여 '전시장의 피리 부는 사나이'로 불려왔다. 런던 테이트모던, 파리 퐁피두센터,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등 국내외 대표적인 미술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원봉사로 여겨지며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도슨트를 직업화하기 위해 14년간 전업 도슨트로 활동하며 '전시해설가'라는 명칭을 만들기도 했다. 전시뿐 아니라 유튜브, 강연, 방송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미술계의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꼽히는 그는 사실 뒤에서 오래 연구하고 준비하는 노력파다. 또한 스타 도슨트로 빛나는 순간보다도 작품 뒤에서 대중들을 안내하고 납득시키는 순간을 더 사랑하는 도슨트다. 누구나 미술 애호가가 되어 일상에서 미술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오래된 마음과 공부를 담아 이 책을 집필하였다.
'독서습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38]마틴 에덴 2_작가로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 지인들을 도와주고 삶을 마감하는 마틴 에덴 (1) | 2025.04.14 |
---|---|
[1037] 마틴 에덴 1_부르주아 여인 루스를 향한 사랑으로 성장하는 마틴 에덴 (0) | 2025.04.14 |
[1036]고전이 답했다_독서와 실행으로 성공한 고명환이 전하는 메지시 (0) | 2025.04.11 |
[1034]일할 사람이 사라진다_대한민국의 인구와 노동의 미래에 대한 대책 (1) | 2025.04.07 |
[1033]작은 것들의 신_암무와 벨루타의 카스트를 넘는 사랑 그리고 쌍둥이 라헬과 에스타 (2) | 2025.04.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