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가진 부바르와 페퀴셰 두 사람이 좌충우돌하며 인간의 호기심과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책 <부바르와 페퀴셰>를 재미있게 읽었다. 처음 책을 들었을 때는 제목과 내용이 어떻게 연결될까 궁금했다. 부바르, 페퀴셰란 단어의 정체가 사람 이름인 것을 도입부에서 알려준다.
두 사람은 모두 필경사로 일하던 중 첫눈에 서로에 대해 끌림을 느낀다.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에게 반하는 것 같다.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저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했다. 필경사로 열심히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잭팟이 터진다. 부바르가 유산을 상속받게 된 것이다. 소설의 본 내용이 전개될 수 있는 환경이 설정됐다.
이와 같이 그들의 만남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서 묶이고 말았다. 게다가 서로에 대해 느끼는 그들의 호감을 어떻게 설명할까? 한 사람의 하찮은 특징이나 가증스러운 결점과 같은 것들이 왜 상대방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첫눈에 반한다고 하는 것은 열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일주일도 되기 전에 그들은 서로 말을 놓았다. (18)
이전에 그들은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굴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혐오감 속에서 서로 힘을 북돋워주고,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아껴주었다. 페퀴셰는 부바르의 거친 면을 닮게 되었고, 부바르는 페퀴셰의 우울함을 다소 지니게 되었다. (21)
"자네도 알다시피 가스파랭은 이익이란 원금의 십 분의 일을 초과할 수 없다더군. 그러면 차라리 은행에 넣어두는 게 낫겠어. 십사 년 후에는 이자가 늘어서 날씨와 씨름하지 않고도 두 배는 얻을 수 있을 테니까." (66)
<부바르와 페퀴셰>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혁명과 반동의 역사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주된 내용은 아니고 부바르와 페퀴셰가 다양한 분야에 대한 배움의 경로를 걷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1권에서는 1848년 혁명으로 공화정이 선포되고, 185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공화정을 무너뜨리는 역사까지 담고 있다.
혁명과 쿠데타가 부바르와 페퀴셰가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신분에 따라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주민들 중에는 귀족과 신부 등 기득권 세력이 있고, 노동자, 농민과 같은 세력이 있어 역사의 급격한 전환은 이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온다.
갑자기 폭음과 함께 증류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 페퀴셰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마 우리가 화학을 몰랐기 때문일 거야!" (86~87) (...) 그래서 그들은 생리학이란 (구태의연한 말로 하자면) 의학적인 소설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생리학이란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었다. 무위도식하며 한 달을 보내다가 두 사람은 정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102)
부바르와 페퀴셰는 사고의 폭이 점점 넓어졌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광물에 대해서는 곧 싫증을 느껴서 그들은 기분전환으로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의 <조화론>을 읽었다. (118)
부바르와 페퀴셰는 연구를 계속했지만, 열의가 생기지 않았다. (...) 시베리아의 매머드 그리고 모든 작가에게 있어서 '진정한 증거의 표시'로 끊임없이 비교되는 화석에 대해 싫증이 났다. 그래서 하루는 부바르가 배낭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노라고 단언하고 말았다. 지질학은 너무 불완전한 것이다! (142) 여섯 달 후에 부바르와 페퀴셰는 고고학자가 되어 있었고, 그들의 집은 마치 박물관 같았다. (148)
부바르와 페퀴셰는 경제적으로 걱정이 없어지자 파리를 벗어나 땅을 사서 정착한다. 그들은 호기심이 왕성하다. 하나의 분야에 관심이 쏠리면 관련된 책을 탐독한다. 그리고 그 분야의 준전문가처럼 행동한다. 책에서 얘기하는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며 책의 내용이 올바른지 확인한다. 저자는 이런 두 사람의 행동을 통해 인간이 지식이라고 정리한 이론들의 한계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켈트어의 모어인 히브리어까지 배우려고 했다. (170)
수프 그릇으로 인해 그들은 도자기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시골에서 연구하고 탐험하는 새로운 주제가 된 것이다. 당시는 상류층 사람들이 루앙의 오래된 접시를 구하려고 애쓰던 시대였다. (172)
그러나 그들은 역사에 대한 흥미와 진실 그 자체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되었다. 어쩌면 진실은 고대에서 발견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역사가들이 당시 상황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감정 없이 서술해야 하니까 말이다. (180~181) "우리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르면서, 앙굴렘 공작의 머리카락과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내려고 하다니!"(196) 그들은 부들이 심어진 길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부바르는 자기가 낭송한 대사로 인해 아직도 흥분되어 있었다. 보르댕 부인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문학이 주는, 놀라움과도 같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예술은 어떤 경우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법이며, 가장 우둔한 연기자에 의해서도 세상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211)
어떤 작가는 이것이 옳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저것이 옳다고 한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이들 모두 적용해 보며 적합성을 따져본다. 하지만 어느 것도 세상을 명확하게 정의해 주는 이론은 없다.
저자는 인간의 지적인 호기심과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정립된 관련 지식이란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보여주는 것 같다. 짧은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농업, 지질학, 박물학, 조경, 마술,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려고 한다. 그래서 소설이 지루하지 않게 읽히는 이유다. 2부로 이어진다. 불현듯 페퀴셰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연극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도비냑의 <연극의 실제>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몇몇 저서를 통해 연극의 법칙을 공부했다. (215) 그 당시에는 권력층들이 하층민에게 아첨을 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누구보다도 중요한 존재였다. 모두들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 되는 영광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노동자들은 귀족이 된 것이다. (237) 밖으로 나오다가, 부바르와 페퀴셰는 파베르주가 죄프루아 신부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다시 사람들이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토론을 하면 권위는 사라지는 거예요! 신권이라는 것, 그것만이 존재하는 거지요!" "그렇고 말고요, 백작님!" (265)
신권 이론은 샤를 2세 때에 영국인 필머에 의해서 성립된 것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창조주는 제1의 인간에게 이 세상의 통치권을 부여했고, 그것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왕은 신의 형상이다"라고 보쉬에는 썼다. 아버지가 다스리는 가정이라는 제국은 유일자의 통치에 익숙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모델로 삼아 왕을 만든 것이다. (266) 불화가 가라앉고 나자, 그들은 자기들의 연구에 정치 경제라는 기본적인 분야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공급과 수요, 원금과 대출 이율, 수입, 수입금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271)
1851년 십이월 삼일이었다. 그 여자는 산문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국민에 대한 호소문, 의회의 해산, 의원들의 투옥에 대한 기사를 재빨리 읽었다. 페퀴셰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273)
독서습관695_부바르와 페퀴셰①_귀스타브 플로베르_2006_책세상(230214)
■ 저자: 귀스타브 플로베르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1821년 12월, 노르망디의 루앙 시립병원에서 수석 외과 의사인 아버지 아실 클레오파 플로베르와 어머니 쥐스틴 카롤린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 탓에 자연과학과 매우 친숙한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낭만적인 문학 작품들을 탐독했다.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했지만 여전히 문학에 대한 소양과 관심을 잃지 않았던 그는 1836년까지 여러 소품들을 쓰기도 했다.
1844년 거리에서 신경성 발작을 일으켜 마차에서 떨어진 후로 적성에 맞지 않는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본격적인 창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 활동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1845년에 <감정 교육>을 집필하고 1849년에 <성 앙투안의 유혹>을 탈고하지만 주위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를 단번에 유명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은 1856년에 발표한 <보바리 부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유명해진 계기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대중적이고 종교적인 도덕과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기소된 것이었다.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오히려 그것이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보바리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플로베르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현지 답사하는 것은 물론, 작품과 관련된 전문 서적을 수천여 권 탐독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실제처럼 느끼게 하기 위한 그만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예술적인 '미'였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현실만을 강조하면서 독창적인 예술 작품으로서의 미를 무시한 당대의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다양한 색조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말년에 건강 악화와 경제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그는 1880년 5월 뇌일혈로 사망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살람보>, <부바르와 페퀴셰>, <세 가지 이야기>, <통상 관념 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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