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는 있고 우열이 없는 학교, 학생이 행복한 학교가 돼야
친구들과 협력하며 배우는 교육, 뒤처지는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며 함께 가는 교육, 학생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교육, 부모도 자녀의 성장에 만족하는 교육이 진정한 교육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요원한 일이다. 자신의 성적이 가장 중요하고 경쟁에서 앞서는 것이 주된 관심이다. 성적으로 주목받는 학생 외에 대부분은 들러리가 되는 교실이다. 교실 내 풍경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모두가 참여하며 협력하는 장소가 아니다. 독일과 같이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바로 자라야 사회가 발전하고 견고해진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교육의 기본 정신이기에 부진한 학생의 첫 번째 도우미는 항상 동료 학생이다. 다양한 차이가 있을 뿐 획일적인 우열이 없으며, 다채로운 개성이 있을 뿐 일등도 꼴찌도 없다. 학생은 학교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부모는 학교 교육에 만족한다. 독일에서 지식 교육 못지않게 비중을 두는 것은 성교육, 정치 교육, 생태 교육이다. (114~115)
- 젊은이들의 정치 참여를 장려해야 한다.
우리의 교육에서 정치는 없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사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는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된다. 학생들의 정치 참여는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독일에서는 고등학교 국회의원이 나오지만 대한민국에서는 25세에 피선거권이 있다. 선거권을 고등학생까지 낮추는 것에 대해 지배층의 반발이 거세다. 앞으로 살아갈 사회는 젊은이들이 주가 되는 사회다. 그들이 자신들을 위한 시스템을 기획하고 제안해서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경로가 필요하다.
학교에서부터 정치와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을 논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장려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교실에서 정치를 논하는 것을 금한다. 누구를 위한 시스템일까. 결국 현재 기득권을 가진 지배층이 젊은이들의 정치 참여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투표권을 통해 시스템에 변화를 주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젊은층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고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필요하다.
10대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안나 뤼어만이다. 10세 때 생태계 파괴의 실상을 보고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안나는 12세에 그린피스 회원이 되었고, 14세에 녹색당에 입당했다. 17세엔 헤센주 녹색당 청년 대변인이 되었고, 18세에 마침내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독일 최초의 고등학생 국회의원이 탄생한 것이다. (123)
우리나라는 이러한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 선거권 19세, 피선거권 25세의 현행 제도는 선거권, 피선거권 모두 18세라는 '세계적 표준'에 한참 뒤처져 있고, 선거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인식 자체도 극히 미미하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지배층은 젊은이들의 정치 참여를 장려하거나 정치의식을 고취하기보다는, 이를 차단하고 겁박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126)
- 생각하는 교사와 학생을 거세하는 교육 시스템
배이상헌 교사가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입장이 반대가 된다는 스토리의 단편영화를 보고 토론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되었다.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뉴스였다. 하지만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니다. 유튜브에서 <억압받는 다수>를 봤다. 여성이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이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은 많은 어색함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여성의 입장에서 보이지 않는 억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다. 학생들이 성윤리를 배우기에 적절하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의 의견을 들으며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교사들이 암기 중심 교육의 폐단을 깨닫고 사유하는 능력과 사회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학생을 양성하기 위해 자율성이 필요하다. 그런 자율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개인의 경제적 안정기반을 빼앗는 나라가 올바른 국가인지 의문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억압받거나 관심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공감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 선봉에 있는 사람들이 교사와 대학 교수들이다.
교사는 유명대학에 많은 학생을 보내는 역할로, 교수는 취업을 위한 지식 소매상으로 전락했다. 교육의 본질인 다양한 재능의 개발은 사라졌다. 진리를 탐구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연대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알려주는 교육자는 어디에 있는가. 교육의 목적은 취업이 아니다. 돈도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계발해서 사회에 기여하도록 돕는 것이다. 왜 그 본질을 가르치는 교육자를 보기 드문 것인가.
도덕 교사 배이상헌, 그가 교단에서 쫓겨난 지도 벌써 5개월이 지났다. 전 세계에서 1,300만 명 이상이 보았다는 프랑스 단편영화 <억압받는 다수 Oppressed Majority>를 성윤리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같이 보며 토론했다는 게 직위해제의 주된 사유다. (134)
사지선다형 단답형 문제를 풀며 단순 지식을 암기하는 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은 사유하지 않는 인간으로 굳어져간다. 교육의 목표가 높은 사유 능력과 사회적 공감 능력을 지닌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라면 한국 교육은 완전한 실패작이다. (146)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 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김예슬의 '자퇴 선언'을 한 학생이 읽어가자 일순 강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159)
교수와 학생은 대학의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가 아니라 단순한 관리 대상으로 전락했고, 경쟁과 승자독식의 논리 속에 학문공동체는 붕괴했다. 진리를 탐구하고 정의를 혜량 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최고 학문 기관이 대학이라면, 이 땅에서 대학은 숨을 거둔 지 오래다. 진리, 정의, 연대의 가치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외면당하고, '경쟁력', '효율성', '수익성', '선택과 집중' 따위의 마케팅 용어들만 난무한다. 대학은 취업학원으로, 학생은 지식 소비자로, 교수는 지식 소매상으로 전락했다. (161)
- 기업화된 대학은 비판능력이 사라지고 직업학교로 전락했다.
'대학을 꼭 가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않으면 마치 사회적으로 낙오자가 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이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취업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모두가 낙오자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하고 싶은 다양한 활동과 깊이 있는 독서, 그리고 토론활동을 하며 사고 능력을 깊고 넓게 확장해야 하는 대학과정이다. 하지만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듯이 보인다.
대학생들의 삶의 질은 어떤가. 부모의 재력이 있는 학생들이 유리한 입장에서 공부를 한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이라면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거주여건도 열악할 수밖에 없다. 독일과 같이 등록금이 없고 매월 일정액 생활비를 준다면 모두가 기본 생활여건 면에서 동등해진다. 학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성적 장학금이나 근로 장학금이란 것도 기회의 평등이 아니다. 부유층 자녀에게 유리한 제도다. 불공평하다. 이 책을 보며 처음으로 불공평의 현주소를 보게 되었다.
근대 대학이 중세 대학에서 직업교육을 제외하면서 학문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업화된 대학은 다시 직업교육 중심으로 회귀하고 있다. 학문과 과학의 퇴보다. 취업이 잘 된다는 학과는 많은 학생이 몰린다. 반면에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위축된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기업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인 세력을 뿌리 뽑고, 순종적인 노동자와 무개성적인 소비자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사회과학 분야를 압살 하려는 배경이라는 부분은 쇼킹했다. 공감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운동장이 사라졌다. 주차장으로 변하고, 많은 기업이 제공한 건물이 기업의 이름으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외부의 가게들이 캠퍼스로 진입했다. 대학이 학문을 배우는 곳이기 전에 기업 이데올로기에 순종하는 기관으로 변했다. 대학이 학생과 교수와 강사들이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지배층과 기업의 영향력이 큰 현재에 그 경로는 험난해 보인다.
국립대의 경우는 주로 국가 권력이 행정적 재정적 수단을 동원해서, 사립대의 경우는 자본 권력이 돈의 위력을 무기로 대학을 지배해 온 것이다. (163)
독일에선 등록금만 없는 것이 아니다. 대학생의 생활비는 국가에서 대준다. 이를 '바푀크'라 한다. '모두를 위한 교육'을 공약으로 내건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71년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바푀크 덕분에 오늘날 독일 대학생들은 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다. (167)
물론 대학 평가를 시행하는 신문사는 평가의 '객관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객관적 평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평가지표는 숫자로 환원된 가치다. 재벌 신문이 제시하는 평가지표란 자본이 바라는 대학의 모습을 수치화한 것일 뿐이다. 거기에 담긴 것은 자본의 속셈이다. 대학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려는 의도이고, 비판적인 학문을 억압하려는 의지다. 아무도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는 일개 언론사가 철저히 자본의 관점에서 만든 자의적인 지표를 가지고 들이대는 대학 평가에 '지성의 전당'을 자처하는 대학이 굴종하는 현실은 한 편의 희비극에 가깝다. (174~175)
가다머에 따르면 근대 대학의 탄생은 중세 대학을 지배하던 "교리 해석과 직업 교육에서 학문 연구로의 이행"을 의미하며, 그 핵심은 "직업학교로서의 대학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학문과 직업을 분리한 것, 대학과 직업학교를 분리한 것 - 그것이 근대에 이르러 학문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그런데 오늘 21세기 한국에서, 대학을 다시 중세 시대로 되돌리려는 시대착오적 시도가 취업률 제고라는 거짓 허울을 쓰고 번져가고 있다. 큰일이다. (178~179)
특히 기업화된 대학이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압살 하려는 것은 기업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인 세력을 대학에서 뿌리 뽑고, 시장 논리에 순종적인 노동자와 무개성적인 소비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깊다. (185)
교수란 '앞에서(pro)' '말하는(fess)' 자이다. 앞에 나서서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업인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란 직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직업이다. 그렇기에 교수에게만 '정년 보장(tenure)'이라는 특혜적 신분 보장이 주어진 것이다. 정년 보장이 '철밥통'이 아니라 '정의의 소리'를 지켜주기 위한 사회적 제도이다. (188~189)
과거 운동권이 보인 권위주의적 행태와 권력 지향적 처신이 대중들의 지탄을 받기 시작하면서 대학에서도 '정치', '지식인', '운동권'이라는 말이 졸지에 '욕'이나 '낙인'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노골화된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대학을 일개 기업으로 전락시켰다. 그 결과 대학은 정치의 무풍지대로 퇴락해 버린 것이다. (193)
강사법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썩은 대학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무너진 교육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분명한 것은 정부는 대학/교육 문제를 풀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점령하고 있는 청와대와 국회에 문제 해결을 기대하는 것도 연목구어다. (199)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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